지난 20일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과 서울 나들이를 했다. 오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청소년과 함께하는 수도권 독립운동 답사'의 일환으로 효창공원과 백범김구기념관을 함께 둘러봤다.
이 공원은 일제 강점기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의 묘를 서삼릉으로 옮기면서 근대식 공원으로 조성돼 원래 이름인 '효창원에서 '효창공원'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설명을 들으면서 박근혜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가 떠올랐다.
2013년 2월 취임 이후 박 대통령은 네 번의 광복절 경축사에서 1948년 8월 15일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를 두 번은 '정부수립'으로 두 번은 '건국'으로 규정했다. 우리 헌법은 전문에서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규정하고 있지만 대통령 스스로 헌법 정신을 부정해버렸다. 나아가 여당 대표가 건국절의 법제화를 위한 토론을 제기하고 있으니 정부와 여당 전체가 헌법을 부정하는 나라가 돼버렸다.
일본 아베 총리는 2013년 4월 국회에서 침략의 정의는 학계에서도 국제적으로도 확립되어 있지 않다면서 어느 나라 편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말해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지만, 헌법 정신은 특정 정권이나 지도자에 의해 독점되거나 변경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박 대통령은 또 광복절 경축사에서 안중근 의사의 순국 장소를 하얼빈 감옥이라고 잘못 말했다고 나중에 청와대 관계자가 정정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안 의사가 1909년 10월 러시아와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러 만주에 갔던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역에서 저격하고 뤼순 감옥으로 옮겨져 순국했다는 것은 역사에 관심이 있는 초등학생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더구나 2013년 6월 대통령으로서 처음 중국을 방문했을 때 안 의사 의거 현장에 기념 표지석을 설치해달라는 박 대통령의 요청을 시진핑 국가주석이 받아들여 만들어진 것이 안 의사 기념관인 만큼 대통령의 연설을 들은 국민들의 충격은 더욱 컸다.
1945년 11월 중국에서 돌아온 백범 김구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의 유골을 찾아 안장하는 것이었다. 심산 김창숙과 직접 찾아다니다가 결정한 곳이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의 무덤이 있던 효창공원이었다.
이곳에는 이동녕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의 요인뿐만 아니라 일본 천황과 요인을 암살하려다 순국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무덤이 있다. 삼의사의 무덤 옆에는 안중근 의사의 유골을 찾으면 묻으려고 백범이 만든 가묘가 있지만, 안 의사의 정확한 매장지조차 알지 못하니 마음이 무거울 뿐이다.
오후에는 광화문광장 북측에서 열린 1923년 관동대지진 때 학살당한 재일한인 추도식에 참석했다. 1923년 9월 1일 도쿄 인근을 강타한 관동대지진 때 일본 내무성 경보국과 경시청은 조선인들이 폭탄을 소지하고 방화를 하며 우물에 독을 풀고 약탈을 한다는 유언비어를 유포하면서 주의를 촉구하고 단속을 지시하는 통달을 내렸다.
군과 경찰 주도로 만들어진 민간 자경단은 거리에서 조선인들이 잘 못하는 일본어 단어를 말하게 하여 잘 못하는 사람들을 조선인이란 이유만으로 폭행하고 살해했다. 내무성 경보국은 조선인 사망자는 231명이고 조선인으로 오해받아 사망한 일본인이 59명이라고 발표했지만, 상하이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은 당시 사망자가 6천661명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일본에 의해 자행된 명백한 '제노사이드'(인종대학살)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진상조차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93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에서 열린 추도식도 유가족 일부와 양국의 시민단체와 연구자, 종교계 인사들이 노력하여 성사되었지만, 우리 정부 관계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양국 정부는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관동대지진 참사는 결코 잊혀져서는 안 될 비인도적 사건이며, 한국 정부는 무고한 재일한인 학살의 역사 규명을 일본 정부에 촉구해야 한다. 또한 학살의 흔적을 찾아 진실을 밝히는 것이 우리들의 책무이며, 이를 위해서는 일부 관련단체와 정부와 정치권의 복잡한 이해관계에 의해 지난해 말 활동이 종료된 총리실 산하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를 하루빨리 재출범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서 관동대지진 재일한인 희생자문제에 이르기까지 한일 양국 시민사회가 보여준 성숙하고 진지한 역사 대화는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한다. 역사를 직시하고 진실을 규명하는 것이야말로 한일 간의 진정한 화해와 미래지향적 관계 구축을 위한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조진구 고려대 글로벌일본연구원 연구교수(도쿄대학 법학박사, 국제정치 전공)
<이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저작권자 ⓒ 부산일보(www.busa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