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촛불-4차 부산 시국 대회 참관기] 웃고 떠들고 즐기고… 더 나은 세상 향한 축제의 장
입력 : 2016-11-27 23:05:26 수정 : 2016-11-29 17: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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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서면에서 열린 4차 시국대회에 참가한 김은영 선임기자가 촛불을 들고 있다.
3만, 10만, 13만…부산에서도 날마다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3주째 주말을 쉬지 못하고 서면의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앉아서 '헌법 송'과 '하야 송'을 따라 부른다. 시위를 통해 민주주의를 다시금 배운다더니 요즘이 딱 그렇다.
4차 부산 시국대회가 열린 지난 26일엔 비까지 추적추적 내렸다. '한 철 농사 대신 역사 농사를 짓겠다'며 트랙터를 몰고 상경하는 농민만큼은 못 되더라도 점이라도 하나 찍겠다는 심정으로 집을 나섰다.
26일 서면에서 열린 4차 시국대회에 참가한 김은영 선임기자가 촛불을 들고 있다.
서면~문현교차로 거리행진 궂은 날씨도 막지 못한 열기 최루탄에 운 87년 투쟁과 대조
털모자에 장갑, 비옷까지 챙겨서 나름 완전 무장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점점 내려가는 밤 기온과 엉덩이 깔판을 타고 올라오는 냉기를 4시간여 동안 길바닥에 앉아서 견디기도 쉽지 않았다. 함께하는 시민들이 없었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그 일을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주말마다 하고 있다.
한편으론 '합법적으로' 서면 중앙대로를 가득 메운 사람들의 열기가 새로운 우주 에너지를 만들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시민들은 이미 '박근혜 퇴진'을 넘어서 '더 나은 세상'과 '더 큰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말로만 듣던 '광장 민주주의'가 이런 것인가 싶었다.
29년 전, 1987년 6월 투쟁 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풍경이다. 대학생이 중심이 되고, 일명 '넥타이 부대'와 시민들이 가세한, 그러면서도 조직화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의 힘으로 꾸려지던 당시엔 경찰이 쏘는 최루탄과 지랄탄을 피해 골목골목 게릴라 시위를 벌이며 도망 다녀야 했고, 그로 인해 사람이 죽어나가던 시절이었다. 그만큼 절박했지만 그만큼 위험하기도 했다. 아주 평범한 대학생이던 나마저도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거의 매일 거리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모두들 축제를 즐기듯 촛불 하나 밝힌 채 삼삼오오 광장으로 모여 들었다. 웃고, 떠들고, 노래했다. 사람들이 한마음이 되어서 외치는 구호만 아니라면 축제의 현장에 서 있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두려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경찰조차도 시위대를 보호하기 위해서 경계를 서 주었다.
오히려 붉은 띠를 맨 푸른색 조끼 차림의 노동조합 깃발은 줄어들었다. 그 자리를 청소년, 가족, 연인들, 각종 동아리 모임이 대신했다. 사람들은 SNS라는 플랫폼을 통해 시국 집회를 알리고, 촛불 집회 참가 경험을 공유했다.
광장의 마이크도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다. 이제 겨우 열두 살 아이는 어른들이 선거를 잘 못 해서 그렇다고, 파도타기로 넘어가는 마이크를 붙잡고 똑 부러지게 말했다. 아들을 군대 보낸 한 아버지는 '이런 나라를 지키려고 내가 아들 둘을 군대 보낸 건 아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일용직이라고 소개한 한 시민도, 다음 주가 시험이라는 고등학생도 집회 현장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했다. 대학생들은 동맹휴업을 예고했다. 여든이 넘으신 호호백발 할머니는 대통령을 향해, 집권당을 향해 듣기에도 민망한 언사도 퍼부었지만 그 누구도 상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26일 오후 부산 서면에서 열린 4차 시국대회에서 참가 시민들이 촛불과 휴대전화 불빛을 흔들며 대통령 퇴진을 외치고 있다. 강선배 기자 ksun@
함께한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아름다운 밤이었다. 서면을 출발해 전포동을 지나 문현동으로 향하는 거리 행진 도중에도 연도 변 고층 아파트 베란다로 몸을 내민 시민들이 손전등 불빛으로 화답했다. 가슴이 뭉클했다. 더욱이 1987년 6월 항쟁 당시 부산 사람들에겐 격렬한 시위 장소의 하나였던 문현교차로에서 수만을 헤아리는 시위대가 집결해 촛불을 든 두 손을 하늘로 번쩍 치켜든 채 '거위의 꿈'을 합창할 땐 형언할 수 없는 카타르시스마저 느껴졌다.
내가, 지금, 날마다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 가는 민주주의 현장에 서 있구나 싶었다. 지식인의 책무를 역설한 놈 촘스키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된다는 건 이처럼 노력이 필요했다. 어쩌면,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무뎌지고 있는 칼날을 다시 벼릴 수 있게 해 준 '국가의 민낯'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날의 축제 같은 집회도 길어지지 않기를 소원했다. 29년 전 '6.29 선언'이라는 항복을 받아낸 뒤 거리 시위를 접었던 기억이 생생한 기자로서는 2016년 올해가 가기 전에 다시 소중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또한 '6.29 선언' 이후 다섯 달 만에 6월 민주항쟁의 결과가 물거품이 된 과오가 반복되지 않도록 지금의 광장 열기를 오래오래 기억하자고 다짐했다. 그래야만 '한국적 민주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우뚝 설 수 있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