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감서은의 싱글노트] 슈퍼우먼, 그리고 서태지와 아이들

입력 : 2017-06-13 12:23:32 수정 : 2017-06-13 14:3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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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은 엄마 이야기를 하다보면 열에 아홉은 눈물을 글썽인다.

내 경우 눈물샘을 열게 하는 가족이, 엄마보다는 외할머니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셔서 한창 정서적인 교감이 많이 필요하던 시기에 할머니가 엄마 아빠 역할을 대신 해 우리 자매들을 보살펴 주셨다.

할머니는 1918년 함경도에서 술도가를 하는 부잣집 막내딸로 태어나셨다. 병치레가 많았던 할머니는 온실 속 화초처럼 귀하게 자라셨단다. 내게 외 고조, 증조 되시는 어르신들은 넉넉한 만큼 많이 베풀고 어려운 사람을 챙기셨다.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인민군이 소위 있는 집안 사람들을 끌어다가 인민재판을 통해 거의 다 총살하고 재산을 빼앗아 갔다.

할머니 가족도 심판대에 섰다. 그런데 동네 주민들이 저분들은 우리를 먹여 살려 주신 정말 좋으신 분이니 제발 살려달라고 성토를 하여 재산은 몰수당했으나 목숨만은 부지 할 수 있으셨단다.

시기가 언제였는지 모르겠지만 할머니는 중국에서도 살았다 하셨다. 장개석이랑 이웃이라 친했는데 그 분 참 멋진 분이셨다고 추억하시기도 했다. 나는 나중에서야 할머니가 말씀하시던 장개석이 장제스라는 걸 알고 신기했다.

고달픈 피난생활 이야기는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산 역사의 기록이었다. 그런데 할머니 입으로 자주 듣다보니, 내게는 잠 안 오는 밤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 전래동화 같았다. 배타고 도망가다 인민군 검열에 걸려서 손에 끼고 있던 금반지를 백설기 떡 안에 쑤셔 넣어 바다에 던져버린 사건, 동굴에 대피해 있는데 안에서 포가 터져서 할머니 앞뒤로 다 죽고 혼자 간신히 살아남으신 일화 등 나는 재밌게 듣고 할머니는 눈가가 촉촉하셨다.

피난민 할머니는 지인의 소개로 평안도 분인 외할아버지를 만나 가정을 이루셨다. 힘든 시절에 아이를 여럿 잃으셔서 울 엄마가 첫째가 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부산에 터를 잡으셨다.

세월이 흘러 엄마 삼촌 이모들 모두 결혼을 하고 외할아버지는 세상을 뜨셨고 손주들이 태어났다. 이 때부터 내가 기억하는 '슈퍼우먼' 할머니의 역사가 시작된다.

할머니는 우리집 손녀들을 건사 하셨다. 새벽에 일어나셔서 아침밥을 하시고 도시락을 식구대로 다 싸시고 간식, 빨래, 청소, 설거지 등 젊은 사람도 하기 힘든 대가족 집안일을 모두 해 주셨다. 어릴 적 내가 봐도 일밖에 모르고 철이 없던 엄마는 할머니 일을 돕기는커녕 양말 하나도 벗은 자리 그대로 두는 철부지였다. 

그런 뒷바라지를 하면서도 할머니는 불평하지 않으시고 우직하셨다.

우리집 일만 봐 주신 게 아니다. 인천에 살고 있는 삼촌과 이모들이 SOS를 칠 때 마다 친히 출동 하셔서 필요한 만큼의 도움을 주고 오셨다.

부산 인천을 오가실 때 할머니는 항상 통일호를 타셨다. 새마을호는 속도가 빨라서 어지러워 싫다고 하시고 무궁화호는 무슨 핑계로 싫다고 하신지 모르겠는데 여하튼 당신은 통일호를 좋아하신단다. 

한 푼이라도 아끼시려는 귀여운 변명이다.

기차를 탈 때는 역에 한 시간도 넘게 미리 도착 하셨다. 가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넉넉하게 가야 한다고 하셨다. 전쟁을 겪으면서 몸에 밴 생활 패턴 같았다.

할머니는 육중한 몸으로 참 부지런하셨다. 그 무게를 버티는 다리가 성할 리가 없지. 뒤뚱뒤뚱 걷는 걸음걸이가 내게는 친근했는데 당신은 얼마나 아프셨을까.

이런 슈퍼우먼 덕에 우리 외가 손주들 열명 중 할머니 손을 거쳐 가지 않은 사람이 없다.

나는 할머니의 다정한 손녀였다. 다리도 많이 주물러 드렸고 얘기도 제일 많이 들어 드렸다. 자리끼도 내가 챙겨 드렸다. 늘 고향을 그리워하시던 할머니는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 흘러간 가요 테이프 감상으로 위안 삼으셨다. 나는 고복수, 현인 노래들을 곧잘 불러 드리곤 했다. 인정 많은 둘째라며 사람들에게 내 칭찬을 많이 하고 다니셨다.

내가 고3이 되던 해 6월이었다.

그 날도 할머니는 평소처럼 밤늦게 들어온 내 도시락을 받아 설거지를 하셨다. 당시 나는 건강에 문제가 생겨 수험생 생활이 힘겨웠었다. 잠깐이지만 할머니의 뒷모습에 문득 죄송한 마음이 들었으나 더 봐야 할 책이 있어서 내방으로 들어갔다.

난 공부하다 새벽 서너시가 되어서야 잠을 청하는 악바리 학생이었다. 자기 전에는 화장실에 갔다가 꼭 할머니 곤히 주무시는 걸 확인하고 내 침대에 누웠다.

그런데 그날따라 허리가 찌뿌둥해서 누워서 책을 보다가 평소와 다르게 스르륵 잠이 들어버렸다. 아침에 아빠가 다급히 나를 깨우신다. 지각인가 놀라서 벌떡 깼다. 아빠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으셨다. 

아뿔사. 할머니가 소천 하셨다. 향년79세셨다.

나중에 효도를 하려 해도 어른들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나는 고3만 지나면 할머니 모시고 금강산이라도 가고 싶었고, 연기자 꿈을 이루어 TV에 나오는 모습도 보여드리고 싶었다. 마지막까지 허약한 내 걱정을 해 주시며 도시락 설거지를 하시던  할머니는 더 이상 내 곁에 없다.

주무시다 자연스레 돌아가시는 게 가장 큰 복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모진 풍파 다 견디셨던 분이 마지막 순간에 혼자 얼마나 힘드셨으면 생을 놓으셨을까. 끝까지 자식에게 폐 안 끼치고 아니, 도움만 주시다가 그렇게 모두가 잠든 때 조용히 세상과 이별하셨다.

요즘 우리들은 조그만 충격에도 트라우마가 생기고, 스트레스가 많고 공황장애로 힘들어한다.

약하게 태어나서 귀하게 자란 부잣집 막내 아가씨가 파란만장한 현대사를 몸소 체험하시고 일흔아홉 생애를 여장부로 강하게 살아내셨다.

난리통에 믿을 건 금밖에 없다시며 유독 누런 금을 좋아하셨던 여인. 
혈혈단신 남한 생활을 하다 보니 의심이 많으셨는데 오히려 큰 일 에는 초연하셨던 그.
비만과 당뇨로 불편한 몸으로 흔한 푸념 한번 없이 묵묵하셨던 속 깊은 분.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과연 명작이구나"하시며 수십 번을 보신 심미안 할머니. 서태지와 아이들이 처음 평가받는 프로그램에 나왔을 때 보시고 심사위원들이 혹평을 할 때 "아니야 쟤네 앞으로 크게 될거야 두고봐" 하셨던 신식 할머니. 외출 할 땐 머리에 무스를 바르고 버터, 피자, 소시지를 좋아하신 멋쟁이 할머니.

사랑하는 할머니! 그립고 그립습니다. 제가 살면서 나누고 싶은 매 순간순간에 당신을 떠올립니다. 당신이 주신 사랑과 가르침이 저의 8할입니다. 6.25와 할머니 기일이 있는 6월이 되니 유난히 더 보고싶네요. 당신 계신 곳으로 제 감사와 존경을 보냅니다.

이수옥님, 당신은 저의 영웅이십니다.

사진 = 크크스튜디오 큐보스픽쳐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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