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일의 기억, 전쟁에서 꽃핀 문화] 1. 전시에 밴 예술혼 ③ 무용계의 르네상스

입력 : 2017-07-05 19:15:03 수정 : 2017-07-09 09:2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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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무용·발레·남방춤 등 유입, 근현대 무용 1막 열어젖히다

1958년 첫 번째 개인발표회에서 선보인 조예경(조숙자)의 '남방춤'. 조숙자 제공

6·25 한국전쟁은 한국 무용계의 암흑기로 여겨진다. 이는 '서울 중심'의 평가다. 피란 시기 전국 각지에서 춤꾼들이 몰려든 부산은 한국근현대 무용계의 1막을 열어젖힌 '춤의 중심지'였다. 한국창작춤의 원류인 신무용을 비롯해 발레, 남방춤 등 외국춤이 유입되면서 향토춤 일색이던 부산은 춤의 르네상스를 맞는다.

피란 예인들 다양한 장르
군 위문 통해 공연 기회 잡아
이매방·김진홍·김온경 활약

학원 생기며 '춤의 대중화'
휴전 후 영남춤 부흥 이어져

1951년 제1회 민속무용연구소 무용발표회에서 극무용 '춘향전'에 출연한 김온경(왼쪽 두 번째)과 남승악. 김온경 제공
■피란 예인들을 보듬다

8·15 해방과 함께 중국, 일본 등지에서 활동하던 유학파 춤꾼들이 귀국해 그중 상당수는 부산에 정착했다. 이 시기 부산은 권번을 중심으로 한 교방춤과 풍류꾼들의 마당춤(들놀음, 탈놀음) 등이 전통춤의 명맥을 잇고 있었다. 1948년 추강 김동민(1910~1999)이 서구 토성동 자택에 차린 민속무용연구소는 무용학원의 시초로서 일반인에게 국악과 무용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부친의 영향으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춤을 시작한 김온경.
6·25가 터지면서 민속무용연구소에는 '피란 예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추강 선생의 딸 김온경(79·부산시무형문화재 제10호 동래고무 보유자)은 "국악인들 사이에 '부산에 가면 김동민을 찾으라'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며 "아버지께선 찾아온 예인들과 함께 풍류를 즐기며 노잣돈을 쥐여주거나 숙식을 제공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현재 국립국악원의 전신인 '이왕직 아악부'도 피란 시기 민족무용연구소 사무실에서 더부살이를 했다. 1951년 용두산공원에 임시 사무실을 내고 '국립국악원' 간판을 내건 뒤에도 국악 강습회를 여러 차례 민족무용연구소에서 열었다.

같은 해 민속무용연구소는 부산극장에서 부산 최초로 한국무용 발표회(제1회 민속무용연구소 무용발표회)를 열었다. 열한 살 때 아버지의 권유로 춤에 입문한 김온경은 부산여중 1학년생이던 당시 극무용 '춘향전'의 주인공 춘향이 역으로 무대에 올랐다. 함께 춤을 배우던 친척 언니 남승악(81)도 방자역으로 출연했다. 김온경은 "부산에서 극무용을 발표하는 건 처음이었고, 서울 무용가들도 공연을 보러와 1~2층 객석이 가득 들어찼다"며 "무대 장치와 배경 세트까지 제대로 갖추느라 제작비가 많이 들었다"고 말했다.

1952년 부친 김동민이 운영하던 `민속무용연구소` 앞에서 김온경(맨 오른쪽). 김온경 제공
1950년대 후반 남승악의 `화랑무`. 김온경 제공


■위문에서 시작된 춤바람
피란기 이매방 등에게 춤을 배워 지금도 무대에 오르는 김진홍.
가난하고 불안한 나날의 전쟁 시기, 무용발표회는 생계에 급급한 춤꾼들에겐 꿈과 같은 무대였다. 상당수 춤꾼들은 군부대 위문 공연에서 춤을 선보였다. 김진홍(82·부산시무형문화재 제14호 동래한량춤 보유자)도 해병대 군예대 등에 소속돼 전방 부대를 돌며 춤으로 군인들을 위로했다. 중학생 시절 피아노를 배웠던 김진홍은 전쟁이 나자 손가락 연습을 위해 타자학원에 다니다 원장의 소개로 55보급창 미군부대에서 일을 시작했다. 부대 내 식당(클럽)에서 본 저녁 쇼 공연에서 남방춤(인도춤)에 매료됐고, 1951년 삼일극장에서 열린 무용콩쿠르에서 '타부'란 남방춤을 선보여 입상한다. 이를 계기로 그의 춤 인생이 시작되는데, 그 첫걸음은 군 위문공연이었다. 김진홍은 "지금의 판문점 근처에서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천막에서 생활했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얼음을 깨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은 뒤 공연을 했다"며 "별다른 분장 도구가 없어 석유 난로 그을음을 긁어다 바셀린과 섞어 끓인 물로 눈썹을 그렸다"고 말했다.

군예대 생활을 끝내고 부산에 내려와 미군부대 쇼하러 다니던 김진홍은 우연히 스승 이매방(1927~2015) 선생을 만나 첫 만남부터 함께 무대에 서게 된다. 김진홍은 "미군부대 공연을 가려고 차를 기다리는데 자신을 이귀태(이매방의 본명)라고 소개하며 선생이 찾아와 합동 무대를 제안했다"며 "상관의 허락을 받고 각자 2분씩, 마지막은 함께 2인무로 남방춤을 췄다"고 회고했다.

이 시기 무용인들은 차츰 부산에 정착하면서 곳곳에 무용연구소(학원)를 차려 주부와 학생(아동)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생계 수단으로 시작된 무용 교육은 당시 사회적으로 '춤바람' 현상을 일으키며 춤의 대중화를 가져온다.

1951년 김진홍의 남방춤 `타부`. 목걸이 등 장신구는 깡통을 잘라 만들었다. 김진홍 제공

1952년 악극단쇼에 출연해 `천안삼거리`를 공연한 김진홍. 김진홍 제공
1960년대 스승 이매방(왼쪽 세번째)과 함께 공연한 김진홍(왼쪽 첫번째). 김진홍 제공

■휴전 후 더 커진 춤사위

피란 왔던 수많은 춤꾼 중 상당수는 휴전 후에도 부산에 남아 무용발표회를 여는 등 활발히 활동하며 춤의 고장 부산과 영남 춤의 부흥을 이끌었다. 일본에서 유학한 정무연(1954년)에 이어 김미화가 1957년, 같은해 진주에서 활동하던 황무봉이 부산에 정착하는 등 타 지역 무용인들의 유입도 꾸준히 이어졌다.
부산 최초의 무용 전임교수로서 부산 발레계를 이끈 조숙자.
부산 출신으로 지역 발레계의 산증인인 조숙자(89·예명 조예경)도 1958년 서면교차로 부근에 부산예술무용학원을 차리고, 제1회 무용발표회를 열었다. 조숙자는 1966년 부산 최초로 서울 국립극장에서 개인발표회를 가졌고, 1969년 부산에서 무용분야 첫 전임교수로 한성여대(현 경성대)에 임용돼 부산 발레계를 이끌었다. 조숙자는 "당시 국립극장에서 열린 무용 공연을 보면서 '나도 충분히 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도전했었다"며 "고향이 부산이기도 했지만, 부산에서 열심히 활동해도 무용가로서 전국적인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부산에서 태어나 줄곧 고향을 중심으로 활동한 김혜성은 1960년 부산 최초 개인무용단인 '프리마발레단'을 창단하기도 했다.

무용계의 활성화는 무용인들의 권익단체 결성으로 이어졌다. 1957년 최초로 부산무용가협회가 생긴 뒤 이듬해 부산무용예술인협회로 재결성됐다. 1962년엔 한국무용협회 부산지부(초대 회장 김미화)가 설립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무용인들의 사회 참여도 활발했다. 1959년에는 부산일보 주최로 제일극장에서 '태풍 사라호 이재민 구호를 위한 음악무용공연'이 열려 이재민들의 아픔을 위로했다. 1952년 국제신보에 무용평론 글을 실으며 등단한 강이문은 1950년대 후반 본격적으로 활동하며 1세대로서 춤비평을 이끌었다. 박성옥은 1956년 동남아에 이어 1960년 한순옥과 함께 파리 공연에 참가하는 등 해외 교류도 이어지며, 부산 무용계는 다방면에서 움트게 된다.
1958년 부산극장에서 가진 조예경(조숙자)의 제1회 무용발표회 팸플릿. 조숙자 제공
1958년 제1회 무용발표회에서 조예경(조숙자)의 발레 공연. 조숙자 제공
1966년 서울 국립극장에서 부산 무용인 최초로 개인발표회를 연 조예경(조숙자)의 당시 공연 팸플릿. 조숙자 제공
1966년 제4회 개인발표회에서 황창호와 조예경(조숙자)의 발레 공연. 조숙자 제공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