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인가 싶은 겨울이 이어지더니 이번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얼어붙었다. 그렇지만 계절은 입춘을 지나 어느새 봄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간다. 이번 주말에는 가까운 울주를 찾아 선사시대로의 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 먼 옛날 울산 태화강의 상류 대곡천에 살던 사람들은 그들의 생활과 생각을 바위에 그림으로 남겼다. 무엇보다 대곡천은 아름답다. 봄이 오는 대곡천을 따라 걸으며, 세계에서 가장 긴 시간이 흐르는 암각화를 만난다.
태화강 상류 대곡천의 두 바위 기록
선사시대 암각화 새겨진 천전리 각석
아래쪽에 새겨진 신라 왕족 명문 눈길
고래사냥 그림 그려진 반구대 암각화
내달까지 매주 토·일 근접 관람 가능
선사시대와 신라 왕족의 기록, 울주 천전리 각석
태화강의 지류인 대곡천 일대는 먼 옛날부터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경치를 감상하고 시문을 꽃피웠던 명소였다. 대곡천 가운데에 있는 반구대는 그 형상이 거북이 엎드린 모양과 같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고려 말 언양으로 귀양 온 포은 정몽주가 자주 찾아 유명해졌다.
이 반구대를 중심으로 상류 쪽에 ‘울주 천전리 각석’, 하류 쪽에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가 있다. 두 곳 모두 국보로 지정돼 있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돼 있을 만큼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천전리 각석은 1970년 12월 24일 동국대박물관 조사단이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머문 곳으로 알려진 반고사 터를 찾기 위해 반구대를 방문했다가 마을 주민의 안내로 발견했다. 각석이 새겨진 바위는 높이 약 3m, 너비 약 10m의 장방형에 선사시대 암각화와 신라시대 명문, 가는 선 그림(세선화) 등이 새겨져 있다. 바위 전체가 15도 정도 앞으로 기울어져 있어 비바람으로부터 마모를 막아주는 자연 보호막 역할을 했다.
위쪽에는 각종 동물 문양과 동심원, 나선형, 물결무늬, 마름모 등이 새겨져 있다. 아래쪽에는 신라시대 말을 탄 행렬 모습과 돛을 단 배, 용 등이 날카로운 금속도구로 새겨져 있다.
천전리 각석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바위 중간 아래쪽에 있는 책 모양의 명문이다. 신라 법흥왕 때인 525년(을사년)에 새겨진 것은 원래 있던 글씨라는 뜻의 원명, 539년(기미년)에 새겨진 것은 추가됐다는 의미의 추명으로 불린다.
원명에는 사부지 갈문왕(법흥왕의 동생)이 이곳에 놀러 와서 골짜기 이름을 서석곡이라 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14년 뒤의 추명은 사부지 갈문왕이 죽은 뒤, 그의 부인인 지몰시혜가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며 아들 심맥부지(진흥왕), 부걸지비(법흥왕비) 등과 함께 천전리 각석을 방문했다는 내용이다.
천전리 각석은 선사시대뿐만 아니라 고대 신라사 연구에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유적이다. 각석 명문은 갈문왕의 존재 등 신라 왕실의 구성, 왕권 강화, 여성 지위 등에 대한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
천전리 각석 계곡은 선사인들과 신라 왕족, 화랑 등이 즐겨 찾았던 경승지였다. 계곡 옆에 앉아 물소리를 들으며 신라시대 왕족이 찾아와 글을 새기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일상의 피로가 씻기는 느낌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래사냥, 반구대 암각화
반구대 암각화의 발견 과정 또한 드라마틱하다. 천전리 각석 발견 1년 뒤인 1971년 12월 25일 동국대와 고려대, 연세대 합동조사단이 후속 조사를 위해 다시 반구대를 찾았고, 마을 주민들은 하류 쪽에도 그림이 새겨진 절벽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마침 극심한 겨울 가뭄으로 사연댐의 수위가 5~6m 정도 내려가 있었고, 조사단은 물 위로 드러난 바위 면에서 고래와 동물, 사냥과 어로 장면 등의 그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절벽 윗부분이 처마처럼 앞으로 튀어나와 있어 오랫동안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한 것도 천전리 각석과 비슷했다.
암각화가 집중적으로 새겨진 바위 크기는 너비 약 8m, 높이 약 5m로 약 300여 점의 그림이 새겨져 있으며, 주변 10여 개의 바위에서도 그림이 확인된다.
반구대 암각화의 중요성은 바로 48점에 달하는 고래 그림이다. 고래 그림 중에는 새끼를 밴 것 같은 고래 등 다양한 종류의 고래 떼가 하늘로 치솟을 듯 위쪽을 향해 그려져 있다. 배와 작살, 그물을 이용해 고래를 사냥하는 매우 사실적인 포경 장면도 묘사돼 있다. 이는 과거 울산 태화강과 울산만 주변에 뛰어난 해양 어로 문화를 가진 포경 집단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영국 BBC 방송은 2004년 “반구대 암각화에는 배 위에서 작살과 낚싯줄을 사용하는 모습이 보인다”면서 “이것이야말로 고래사냥의 시원이라 할 수 있다”고 보도해 노르웨이가 고래잡이의 시원이라는 기존 학설을 반박했다.
반구대에서 반구대 암각화로 가는 길은 1㎞ 남짓으로 계곡을 따라 대나무숲, 황톳길이 이어지는 걷기 좋은 구간이다. 반구대 암각화는 산책로 끝에서 계곡 너머 반대쪽 절벽에 있다. 멀리에서도 암각화를 살펴볼 수 있도록 디지털 망원경이 설치돼 있다.
매주 토, 일요일에는 반구대 암각화를 보다 가까이에서 볼 수 있도록 전망대 아래 계곡으로 내려가는 근접 관람이 3월 말까지 시범 운영 중이다. 오전 10시 30분부터 1시간 간격으로 6차례, 현장에서 선착순으로 30명씩 관람할 수 있다.
어떻게 둘러볼까
천전리 각석은 입구 쪽의 대곡박물관에, 반구대 암각화 역시 초입에 있는 울산암각화박물관에 주차한 뒤 걸어가는 것이 가장 좋다. 각각 박물관 주차장에서 1㎞ 정도 떨어져 있다.
암각화박물관에서는 천전리 각석, 반구대 암각화를 원형 그대로 복원 전시해 놓고 있어 보다 가까이서, 자세한 설명과 함께 살펴볼 수 있다. 3월 말까지 ‘대곡천 사냥꾼’이라는 주제로 특별전시도 열린다.
여유롭게 산책을 즐기고 싶다면 울산암각화박물관에 차를 세우고 박물관에서 암각화에 대한 기초 지식을 익힌 뒤, 계곡 산책로를 따라 북쪽의 천전리 각석을 찾으면 된다. 약 1.2㎞ 거리로 왕복 1시간이면 충분하다. 다음에는 반구서원과 반구대 쪽 계곡길을 따라 반구대 암각화까지 산책을 즐긴다. 역시 왕복 1시간 정도 걸린다.
천전리 각석과 반구대 암각화는 계곡과 숲을 따라 산책로가 연결돼 있어 가족, 연인과 함께 호젓하게 둘러보기 제격이다. 시간과 체력이 뒷받침해 준다면 망성교(선바위)~반구대 암각화~천전리 각석까지 이어지는 15㎞ 구간의 태화강 100리길 3구간을 추천한다.
매주 토요일마다 운행하는 울산시티투어 역사탐방 코스를 이용하면 해설사의 스토리텔링과 함께 천전리 각석과 반구대 암각화를 편리하게 다녀올 수 있다. KTX울산역에서 오전 10시 30분 출발해 천전리 각석, 대곡박물관, 반구대암각화와 암각화박물관을 둘러보는 코스다. 요금은 1만 원으로 반드시 사전에 예약해야 한다. 열차, 고속버스 탑승권 소지자는 30% 할인 혜택도 있다.
글·사진=정상섭 선임기자 verst@busan.com
정상섭 선임기자 verst@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