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투르누스 신전
로마인은 포로 로마노를 개발한 뒤 처음에는 신전을 지었다. 신전 건립 순서, 연도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로마의 공식 연표이자 종교 서적인 <제사장 연대기>에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로마에서 해마다 벌어진 사건과 집정관 등 역대 행정관의 명단 등을 기록하고 있다.
<제사장 연대기>에 따르면 포로 로마노에 가장 먼저 지은 건물은 BC 497년 카피톨리노 언덕 기슭에 만든 사투르누스 신전이었다. 로마인이 새로 마련한 땅에 왜 이 신전을 가장 먼저 지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사투르누스 신은 어떤 존재였을까. 그리스신화와 로마신화를 일부 차용해 그에 대해 알아보자.
그리스에서 쫓겨난 크로노스
‘먼 옛날에는 텅 빈 공간에 카오스 신이 혼자 존재하고 있었다. 외롭게 사는 데 지겨워진 그는 세상을 만들기로 했다. 카오스는 가이아 등 여러 신을 만들었고 가이아도 우라노스 등 많은 신을 탄생시켰다. 우라노스는 모든 신을 다스리며 제왕처럼 군림했다. 말을 듣지 않는 자식들은 지옥인 타르타로스에 가둬버렸다.
크로노스는 우라노스의 막내아들이었다. 그는 영원히 타르타로스에 갇혀 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가이아의 도움을 받아 그곳에서 탈출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아버지에게 낫을 휘둘러 권좌에서 몰아냈다. 우라노스는 달아나면서 아들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너도 나처럼 네 자식에게 쫓겨날 것이다.”
아버지의 저주 때문에 불안해진 크로노스는 부인 레아가 아이를 낳을 때마다 곧바로 삼켜버렸다. 그가 잡아먹은 자식은 헤라, 데메테르, 헤스티아, 하데스, 포세이돈이었다. 막내아들 제우스만 어머니의 도움으로 겨우 달아날 수 있었다. 제우스는 조금씩 힘을 키워 다섯 형제를 아버지의 뱃속에서 꺼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형제들과 뜻을 모아 아버지를 신의 왕 자리에서 몰아냈다.
쫓겨난 크로노스는 바다를 건너 이탈리아로 달아났다. 그는 이름을 사투르누스로 바꾸고 야누스 신의 딸과 결혼했다. 그곳에 농업 기술을 퍼뜨린 덕에 농업의 신으로 추앙받게 됐다. 당시 농업은 재산을 일구는 산업이었기 때문에 ‘부의 신’으로도 숭배받았다. 사투르누스가 다스렸던 시대를 로마인은 ‘황금 시대’라고 불렀다.’
사투르누스를 다르게 보는 시각도 있다. 그는 로마 건국 이전 한 부족의 족장이었는데, 죽어서 신이 됐다는 이야기다. BC 1세기 로마 역사학자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가 <라틴어 원론>이라는 책에 그런 기록을 남겼다.
‘사투르누스는 카피톨리노 언덕에 있던 사투르니아 마을의 원주민을 다스리던 족장이었다. 그래서 카피톨리노 언덕은 로마 건국 이전에는 몬스 사투르니우스(사투르누스의 산)로 불렸다.’
크리스마스에 영향 미친 사투르날리아 축제
왜 이 신전을 가장 먼저 지었는지 이유는 모르지만 어찌 됐든 사투르누스 신전 봉헌식은 12월 17일 열렸다. 사투르누스 신전은 고대 로마의 금, 은 같은 국고를 보관하는 창고로도 사용됐다.
로마인은 사투르누스의 황금시대를 기리기 위해 매년 12월 17~23일 사투르날리아 축제를 열었다. 축제 날짜를 잘 살펴보면 매우 흥미로운 점이 있다. 크리스마스와 비슷하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이 축제는 오늘날 크리스마스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1907년 미국에서 발간된 <가톨릭 백과사전>은 ‘사투르날리아 같은 이교도의 겨울 축제는 크리스마스 날짜 선택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서술했다.
처음에는 축제기간이 하루였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1주일로 늘었다. 다른 로마 축제는 대개 신전이라는 한정된 장소에서 열린 반면 사투르날리아는 포로 로마노 등 로마의 모든 장소에서 대대적으로 펼쳐졌다. 축제 기간 동안에는 상업 활동을 하지 않았고, 학교와 법정도 문을 닫았다.
5세기 말 학자였던 마르코비우스 테오도시우스는 <사투르날리아>라는 책에서 이 축제를 상세히 설명했다. 로마인은 평소에는 색깔 있는 토가를 하층민이 입는 옷이라고 천대하며 착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투르날리아 축제 중에는 전통 토가를 벗고 화려한 토가를 애용했다.
로마인은 평소에는 모자를 잘 쓰지 않았지만 축제 때에는 필레우스라는 창 없는 모자를 즐겨 쓰고 다녔다. 일상에서는 모자를 아예 쓸 수 없었던 노예도 이때만큼은 필레우스를 쓰고 다녔다. 이렇게 되면 누가 노예이고 주인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노예와 주인의 신분이 일시적으로 바뀌는 이른바 ‘야자 타임’도 있었다. 어떤 역사책은 ‘이때에는 노예가 먼저 밥을 먹고, 주인은 노예에게 밥을 대접했다’고 기록했다. 다른 책은 ‘노예와 주인이 같은 상에서 함께 밥을 먹었다’고 적고 있다. 1세기 로마 시인인 퀸투스 호라티우스 플라쿠스는 이를 ‘12월의 자유’라고 표현했다. 축제 중 ‘야자 타임’은 세월이 흐르면서 없어졌다.
사투르날리아 축제 중에는 가면을 썼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기록도 있다. 핼러윈 데이 때 어린이가 가면을 쓰고 여러 집을 돌아다니며 사탕이나 과자를 얻는 ‘트릭 or 트릿’과 비슷한 놀이도 있었다. 평소에는 금지됐던 도박이나 주사위 놀이도 이때만큼은 허용됐다. 특히 노예가 두 놀이를 즐겼다. 내기에 주로 걸었던 것은 동전이나 견과류 등이었다. 과식이나 폭음도 이때만큼은 너그럽게 받아들여졌다.
로마인은 선물을 주고받으면서 서로를 축복하기도 했다. 선물을 주는 날은 12월 23일이었다. 선물의 값어치가 사회적 신분을 나타냈기 때문에 때로는 값비싼 항아리, 밀랍인형 등을 주고받기도 했다. 자료에 나오는 내용을 바탕으로 당시 주고받은 선물 목록을 살펴보면 주사위, 뼈로 만든 공기놀이 돌, 빗, 이쑤시개, 모자, 사냥용 칼, 도끼, 불을 밝히는 등, 둥근 공, 향수, 소시지, 컵, 숟가락, 앵무새, 옷가지, 마스크, 책이 있었다. 때로는 노예나 외국동물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 정말 친한 친구끼리는 짓궂은 장난삼아 저질 선물을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선물과 함께 시를 적어 보내기도 했다. 오늘날 선물카드와 비슷한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성탄절에 선물을 주고받는다. 역사학자들은 사투르날리아의 영향이라고 주장한다.
■ 카스토르‧폴룩스 신전
레길루스 호수 전투의 승리
“타르퀴니우스가 이끄는라틴 연합군이 몰려온다.”
악정을 일삼는 바람에 쫓겨난 ‘거만한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가 BC 499년 왕 자리를 되찾으려고 라틴 연합군을 이끌고 로마로 쳐들어갔다. 로마는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를 독재관으로, 티투스 베르기니우스를 사마관(기병대장)으로 임명해 전쟁에 나섰다.
로마인들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라틴 연합군의 병력이 로마군의 세 배 이상이라는 정보 때문이었다. 로마가 패한다면 타르퀴니우스가 엄청난 보복을 저지를 것이 뻔했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할 지경이었다.
로마군과 라틴 연합군은 로마 동남쪽 레길루스 호수 근처에서 만났다. 서로 마주보며 하룻밤을 보낸 두 군대는 다음날 아침 일찍 전투에 돌입했다. 로마 장군 중 한 명인 발레리우스가 일찌감치 전사한데다 병력에서 절대적으로 열세였던 탓에 로마군은 일방적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위기에 빠진 포스투미우스는 두 손을 높이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승리를 내려주시면 카스토르·폴룩스 신전을 지어 봉헌하겠습니다.”
그때 아주 잘 생기고 덩치도 큰 기병 두 명이 나타났다. 그들은 창을 높이 치켜들고 라틴 연합군을 향해 달려갔다. 그 둘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시 전투 현장에서 그들을 목격했다는 한 로마 시인은 두 젊은이가 싸우는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다.
‘빠르도다, 너무나 빠르도다/ 위대한 쌍둥이 형제로구나/ 칼은 무희처럼 춤을 추고/ 말은 바람처럼 날렵하도다.’
두 기병의 용감한 모습을 보고 사기가 오른 로마군 병사들은 전력을 다해 싸웠다. 기가 꺾인 라틴 연합군 병사들은 무기를 버리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전쟁은 마침내 로마군의 대승으로 막을 내렸다.
전쟁이 끝날 무렵 이번에는 포로 로마노에 두 기병이 나타났다. 유혈이 낭자한 전투를 막 마치고 돌아온 모습이었다. 그들은 유투르나 분수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고 몸을 씻겨 주었다. 사람들이 그들 주변에 모였다.
“방금 전쟁터에서 돌아오신 것이오?”
“예, 그렇습니다.”
“전쟁의 결과는 어떻게 됐지요?‘
“로마군이 대승을 거뒀습니다.”
두 기병에게서 반가운 소식을 들은 로마인들은 환호했다. 그들은 서로 얼싸안고 기뻐했다. 어떤 사람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다. 다음날 포스투미우스가 보낸 전령이 전쟁 소식을 담은 편지를 들고 왔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우리가 이겼습니다.’
로마인들은 포로 로마노에 나타나 승리의 소식을 전해준 두 청년이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한참이나 갑론을박하던 사람들 중에서 누군가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두 병사는 카스토르와 폴룩스 신이십니다. 위기에 빠진 로마를 구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신 것입니다.”
로마 구해준 디오스쿠리 형제
카스토르와 폴룩스는 어머니는 같고 아버지는 다른 ‘이부 형제’였다. 둘의 어머니는 스파르타의 왕 틴다레우스의 부인인 레다였다. 카스토르의 아버지는 틴다레우스였지만 폴룩스의 아버지는 ‘신들의 왕’ 제우스였다. 레다가 카스토르를 임신했을 때 제우스가 백조로 변신해 그녀를 범해 폴룩스도 임신하게 만든 것이었다.
두 형제는 같은 날 태어나 쌍둥이가 됐다. 둘은 그리스어로 ‘제우스의 아들’이라는 뜻인 디오스쿠리로 불렸다. ‘쌍둥이’라는 뜻인 제미니로 불리기도 했다.
카스토르는 인간의 아들이고 폴룩스는 신의 아들이었다. 카스토르는 죽을 운명이었던 반면 폴룩스는 불사의 존재였다. 카스토르는 사이가 나빴던 린케우스 형제와 싸우다 방망이에 맞아 목숨을 잃고 말았다. 슬퍼하던 폴룩스는 제우스에게 간청했다.
“제가 가진 불사의 능력 절반을 카스토르에게 주십시오.”
제우스는 아들의 간청을 받아들였다. 이후 형제는 반신반인이 돼 1년 가운데 절반은 죽은 사람이 사는 하데스의 지하세계에서, 나머지 절반은 신이 사는 올림푸스 산에서 지내게 됐다.
그리스 신이었던 카스토르, 폴룩스 형제는 BC 5세기 무렵부터 로마인 사이에서도 숭배받게 됐다. 이탈리아 남부지역에 식민도시를 하나씩 건설하기 시작한 그리스인들에 의해 신화가 서서히 퍼진 덕분이었다. 둘은 백마를 타고 다니는 신으로 묘사됐다.
석상 두 개로 남은 반인반신 형제
포스투미우스는 신전을 지어 바치겠다는 맹세를 지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이 아버지의 약속을 이어받아 신전을 완성했다.
로마인이 카스토르·폴룩스 신전을 완공한 것은 사투르누스 신전을 봉헌하고 13년 뒤였다. 디오스쿠리 신전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이 신전은 ‘왕정의 완전한 몰락과 공화정의 완벽한 정착’을 상징하는 건축물이 됐다.
로마인은 나라를 멸망의 위기에서 구해준 두 기병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7월 15일 디오스쿠리 축제를 열었다. 축제 중에는 디오스쿠리로 분장한 기병 1800명이 마르스 평원에 있는 마르스 신전에서 출발해 시내 곳곳과 포로 로마노를 거친 뒤 카스토르·폴룩스 신전까지 퍼레이드를 벌였다.
카스토르‧폴룩스 신전은 포로 로마노 한복판에 서 있어 원로원 회의장으로 자주 사용됐다. 정치인이 많은 사람을 불러모아놓고 연설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특이한 것은 로마인이 이 신전 안에 무게, 길이 등을 재는 각종 도량형 측정 도구를 가져다 놓고 분쟁이 발생할 경우 측정했다는 사실이다. 왜 여기에서 그랬는지 그 이유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포로 로마노에는 기둥만 남아 있는 건물이 대부분이다. 카스토르‧폴룩스 신전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기둥 3개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이처럼 신전은 거의 사라졌지만 두 형제의 석상은 아직 남아있다. 카피톨리노 언덕의 캄피돌리오 광장 계단 앞에 말을 붙들고 서 있는 두 나체 청년의 석상이 바로 그들이다. 물론 두 석상은 고대 로마에 만든 것은 아니다.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