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일이다. 20여 명의 지인과 부산이라는 도시를 알아가기 위해 ‘도시탐사대’를 만들었다. 한 달에 두 번 정도 도시 곳곳을 탐사하고 이를 기록하기로 했다. 하지만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는 바람에 단 한 번의 현장 탐사를 끝으로 사실상 중단돼 버렸다. 최근에는 코로나의 위세도 점점 잦아들고 반대로 도시를 알고 싶은 기자의 갈증은 더 높아져 주말에 짬을 내 3~4명의 지인들과 함께 ‘동네 한 바퀴’를 하며 도시 곳곳을 돌아보고 있다.
모르는 도시 곳곳을 알아가는 것은 분명 즐거운 일이다. 지인들과 동네를 둘러보며 문화와 역사의 흔적을 찾고 얘기하는 즐거움, 또 맛집이나 카페, 유명 건축물 등을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도로가 사방을 막아버려 섬처럼 고립돼 버린 ‘정과정 유적지’(수영구 망미동)를 보곤 많이 안타까웠다. 과거와 현재의 단절, 소통의 부재를 보아서다. 유배 문학이나 고려가요, 혹은 부산의 역사를 언급할 때 좀처럼 빼놓을 수 없는 곳이지만, 우리는 이를 너무 홀대하고 있었다.
단절은 도시 속에 널브러져 있었다. 특히 아파트 단지는 심각했다. 대부분 스크린 도어가 설치돼 주민이 아니면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가로경관 대신 성벽같은 아파트 담장이 가로막고 있었다. 마을의 확장이라는 ‘수평적 확대’에서 고층 아파트를 내세운 ‘수직적 압축’으로 도시가 바뀌면서 가장 큰 도시 변화는 바로 이웃과의 소통 부재인데 이걸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구덕산 아래 빼곡히 들어선 고층 아파트를 보곤 격세지감을 느꼈다. 이런 생각도 해봤다. 어릴 적 여기서 살았던 사람이 오랜만에 이곳을 방문한다면, 어떤 마음일까? 어린 시절의 흔적이나 추억을 찾을 길 없어 꽤 슬펐을 텐데.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에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생활상이 도시 곳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래서 흔히 ‘도시는 살아있는 박물관이다’라고 말한다. 아이들은 이를 보고, 만지고, 느끼면서 성장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해 자긍심도 갖게 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부산이란 도시는 너무 쉽게 그 흔적을 지워 버렸다. 남선창고, 하야리아 공원 내 건물들, 동래구청사 등. 때론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때론 재개발·재건축이란 이름으로 말이다.
영화에 대한 공간 소멸은 그 단적인 예다. 삼일·삼성·보림극장은 이제 옛 이름이 돼 버렸다. 누군가에겐 “내 청춘은 여기서 시작돼 이곳에서 마침표를 찍었다”고 할 수 있는 곳이었지만, 이들 극장들은 하나둘 사라져갔다.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아야 할 ‘영화 도시 부산’의 부끄러움이며 슬픈 과거다.
이것만이 아니다. 수많은 공간이 단순히 오래됐다는 이유로 허무하게 소멸돼 갔다. 이런 걸 보면 부산은 ‘과거를 지우는 지우개 도시’라 해도 할 말이 없다. 과거를 지움은 추억 ·시간과의 단절이요, 나아가 우리의 아버지·할아버지 세대와의 단절이기도 하다. 지금 이 순간 도시 어디에선가 또 다른 우리의 기억들이 너무 쉽게 지워지고 있을 터이다.
영국의 환경심리학자인 제니 로와 건축학자 라일라 맥케이는 공동저서 〈회복도시〉라는 책에서 ‘행복한 도시를 위한 7가지 요건’을 얘기했는데, 이중 ‘이웃도시’와 ‘포용도시’가 포함돼 있다. 이는 서로 배척하지 않고 이웃처럼 함께 살아가는 도시를 말한다.
예기〈禮記〉에 이런 말이 있다. ‘예라고 하는 것은 근원으로 돌아가 옛것을 보존하며 자신을 존재하게끔 한 사람들을 잊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 말은 사람에게만 머물지 않는다. 이젠 도시에서도 예가 지켜져야 한다. 부산이란 도시가 그랬으면 좋겠다.
도시는 표정만 있는 게 아니라 역사와 이야기가 살아 숨쉬는 곳이어야 한다. 켜켜이 쌓인 우리의 삶이 살아 숨쉬는 곳 말이다.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없애고, 지워도 두려워하지 않는 도시는 정녕 두렵다. 기억해야 할 것을 기억하지 않는 도시는 병든 도시다. 독일의 철학자이자 평론가 발터 베냐민은 “새것을 갖는 게 아니라, 오래된 것을 새로운 가치로 만들면 아무리 오래된 것도 새것이 된다”고 했다.
이젠 부산도 달라져야 한다. 단절이 일상화되는데도, 미래 자산이 눈앞에서 사라지는데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보고 있어서는 안 된다. 그래 놓고 ‘Busan is good(부산이라 좋다·부산의 새 슬로건)’라고 해선 안 된다. 그렇다면 양심 불량이다. 아니 도시 정체성의 상실이다. 시민의 입에서 “부산이라 좋다”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그때를 상상해 본다. 도시 슬로건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는 미국 뉴욕시의 슬로건 ‘I Love New York’은 50여 년간 그대로다.
지금 ‘부산이라 좋다’라는 말이 역설적으로 들리는 이유다.
정달식 선임기자 dosol@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