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백지신탁

입력 : 2023-03-16 19:32:46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

백지신탁은 공직자가 자신이 보유한 주식이나 채권 가격에 영향을 주는 정책을 입안하거나 법을 집행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다. 외국에서는 ‘블라인드 트러스트(Blind Trust)’로 불리며, 국내에는 지난 2005년 도입됐다. 백지신탁 대상자는 국회의원과 장·차관을 포함한 1급 이상 고위 공직자와 금융위원회 등 주식과 관련된 4급 이상이다. 공직자윤리법에 따르면 해당 공직자는 자신과 직계존비속이 보유 중인 3000만 원 초과 주식을 임명일로부터 한 달 이내에 매각하거나 금융회사에 백지신탁해야 한다.

윤석열 정부의 고위 공직자 16명 중 7명이 아직도 보유 주식을 매각하거나 백지신탁하지 않았다고 한다. 정당한 사유 없이 주식을 매각 또는 백지신탁하지 않을 경우 1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게 돼 있다. 보유 주식이 직무 관련성이 없다고 생각하면 1개월 이내에 심사를 청구하여 매각·백지신탁 의무를 면제받을 수 있다. 백지신탁하지 않은 고위 공직자들이 직무 관련성 평가에서 면제받은 것인지, 그 구체적 심사 내용은 무엇인지는 공개할 필요가 있다. 경실련이 직무 관련성 심사 내역을 정보공개 청구했지만 인사혁신처가 기각했다고 한다. 오히려 인사혁신처는 백지신탁을 시대 변화에 맞게 수정할 부분이 있는지 살펴보는 중이다.

유병호 감사원 사무총장과 박성근 국무총리 비서실장이 배우자가 소유한 기업 주식을 백지신탁하라는 심사위 판단에 불복해 각각 행정소송과 행정심판을 제기했다고 한다. 집행정지 신청이 먼저 인용돼 백지신탁은 보류됐다. 행시 출신 유 총장과 검사 출신 박 실장은 둘 다 차관급인데 공직자윤리법을 몰랐던 것일까. 2010년에는 주식백지신탁심사위의 결정에 불복한 행정소송이 헌법재판소까지 올라가 합헌 결정을 받는 일도 있었다. 주식을 포기할 수 없으면 처음부터 공직을 맡지 않으면 된다.

정순신 변호사가 국가수사본부장에 임명됐다 낙마한 사건은 국민적인 공분을 일으켰다. 검사 아빠를 둔 아들은 학폭으로 강제 전학 조치를 받았지만 ‘행정가처분취소신청’을 통한 시간 끌기로 졸업할 때까지 학교폭력 사실이 생활기록부에 기록되지 않았다. 고위공직자들의 백지신탁 불복 소송도 마찬가지의 시간 끌기 수단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소송 기간 동안 임기를 무사히 마치고 취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고위공직자들의 불복이 이해충돌 방지라는 제도의 취지를 무력화시키고 있다. 대체 누구를 위한 법인가.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당신을 위한 뉴스레터

실시간 핫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