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과 인연] 장모가 작명해 준 부산 용호동 '나막집' 돼지곰탕

입력 : 2023-05-26 16:22:35 수정 : 2023-05-26 16: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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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국물 돼지곰탕 담백한 맛 일품

나막집 맑은 돼지곰탕. 나막집 맑은 돼지곰탕.

광우병 사태로 2008년 봄 '육식의 종말'을 선언한 지 15년이 지났다. 미국산 소 수입이라는 오직 한 가지 이유만이 육식을 유도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생태주의자들과 어울리고 있었고, 지인 중에 채식주의자가 있어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15년 동안 단 한 번도 육식하지 않았냐고? 사실이라고 주장하고 싶지만, 실은 아닐 수도 있다. 일단 채식주의자의 입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까다로운 것이 사실인 모양이다. 채식도 여러 등급으로 나눠 분류하고 있었다. 등급이 무슨 소용이랴 만은.

정확하게 말하면 채식 수준은 '페스코'다. 유제품인 치즈나 달걀은 섭취, 물고기 등 해산물은 먹는 '얼치기 채식주의자'. 해산물까지 안 먹는 '락토 오보'는 도전할 생각도 못햤다. 이 상황에서 '식물은 씹어먹으면 불쌍하지 않으냐?' 등의 도발적인 질문은 하지 말아 주시면 고맙겠다. 물고기가 통증을 느낀다는 실험 결과도 굳이 제시하지 말아주시면 정말 고맙겠다. 박애주의자는 아니니깐.

한 번은 큰동서가 '30년 채식주의자는 왜 소고기를 먹기로 결심했나'라는 자극적인 문구가 걸린 <소고기를 위한 변론>이라는 책이 나왔다고 추천했다. 읽어보겠다고 약속하고, 책을 읽었다.

독후감을 한 줄로 적자면 '나도 수천 에이커의 땅을 가진 방목 목장주와 결혼하면, 소고기를 먹을 수 있겠다'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다 자기 상황에서 이해하고, 스스로 관대하다. 채식을 하면서도 따라오지 않는 마누라나, 아이들에게 단 한 번도 섭섭함이나 불만을 가진 적이 없다.

다만, 저들끼리 불고기 파티를 할 때는 좀 소외당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언젠가부터는 호주산 쇠고기를 사서 스테이크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올리브기름에 잔뜩 저민 이 요리는 '아빠의 시그니처 요리로 우리 집에서 추앙(?)받고 있다.

고기 안 먹는 이야기가 좀 장황해졌다. 눈치챘겠지만, 이제 육식을 다시 시작한다. 채식을 선언하면서 먹은 라면수프 속의 쇠고기 분말, 바다에서 산다고 해산물이라며 굳이 우기고 먹은 고래 고기, 닭 고운 육수로 만든 쌀국수, 채식하는 줄 모르던 선배가 쌈을 사서 내 입에 직접 넣어준 삼겹살 한 점. 이런 일탈의 기억은 이제 묻어도 되겠다.


모든 것에서 평온해지기 위해 현업에서 은퇴를 하면, 까다롭게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먹겠다고 다짐했는데, 그 시기가 당겨졌다. 4월에 제주도에서 모임이 잡혔고, 그렇다면 이참에 제주 고기국수 한번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속으로 했다. 동남아 여행 가서 닭고기 육수의 쌀국수를 먹은 터였다. 해외에서는 가급적 채식의 원칙을 지키지만, 정확한 재료를 몰라 안 그런 적도 있었다.

라오스에서 일이다. 쌀국수 국물이 새콤,매콤하고, 하도 맛있어서 육수 솥을 슬쩍 들여다봤더니 머리털이 숭숭하게 남은 닭 한 마리가 뽀얗게 끓고 있었다. 베트남에서는 쌀국수에 소고기 고명을 얹어주는 메뉴에서 소고기를 빼달라고 했더니 가격을 맞춘다고 달걀을 2개나 풀어 첫 주문에서는 맛도 없는 쌀국수를 먹은 적이 있다. 다낭의 '포 코롱'의 사장님은 그 이후 요구한 '채식 쌀국수(?)'를 척척 잘 만들어 주신다. 지난해 다시 다낭에 갔을 땐 소고기 고명값을 빼고 가격을 깎아 주셨다.

고기국수나 쌀국수나 거기서 거기겠지만, 국내에서 곰탕, 돼지국수, 고기국수를 먹지 않았고, 제주에서도 멸치 육수로 만든 춘자국수만 먹었던 터라 고기국수는 환상 같은 게 있었다. 제주에서 유명하다는 집에 갔었는데 별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사장님에게는 맛이 없어서가 아니라 배가 불러서 남겼다고 말씀드렸다.


나막집 개방 주방. 나막집 개방 주방.

채소 육수 베이스의 맑은 돼지국밥

어찌 '육식을 종말'한 것이 소문이라도 났던지 오래된 인연인 김일대 전무께서 밥 한번 먹자고 전화를 했다. 김 전무님은 부산~제주 여객선 서경페리의 전무이실 때 인연을 맺었는데 그 뒤 대마도 '쓰시마 리조트'에서도 업무를 이어가 자주 뵌 분이다. 사위가 용호동에 밥집을 냈는데 한 번 가자고 했다.

특이하게도 주메뉴가 돼지곰탕이라고 했다. 곰탕은 소의 각 부위를 푹 고아 끓여내는 것인데, 그만큼 육수에 자신이 있다는 얘긴가 보다. W아파트의 상가동 1층에 있는 가게는 생각보다 작았다. 20평이 채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중 주방 공간이 절반 이상 차지해, 사실상 주방을 둘러싸고 음식을 먹는 구조였다. 모든 조리 과정을 쳐다보면서.

돼지곰탕은 90%의 채소 육수와 10%의 돼지 사골육수로 만든다고 한다. 맑은 국물이다.

가게 이름은 '나막집' 사장 이름, 즉 김 전무의 사위 이름은 이성훈이다. 이 대표는 이쪽 업계에서는 꽤 알려졌는데 '낭만부엌'에서 10년을 일했다고 했다. 어찌 보면 이 업계의 베테랑인 셈이다.

누군가의 사위가 되었고, 자기 사업을 위해 나막집을 차린 것이다.



쌀알이 펄펄 살아있는 돼지곰탕. 쌀알이 펄펄 살아있는 돼지곰탕.

나막집은 나지막한 부엌이라는 뜻

가게를 준비하며 온 식구가 모여 상호를 정하는 회의를 했다. 처음엔 '낮은부엌'이라고 하기로 하고 알아보니 이미 상표 등록이 돼 있는 상호였다. 그래서 고민하고 있는데 이 대표의 장모가 사위를 위해 '나즈막한 부엌'을 제안했다. 좋다는 의견이 다수였고, 나즈막한 부엌은 등록할 때 너무 길어 '나막집'으로 결정했단다.

주방일이 바쁜 사위를 대신해 김 전무가 음식을 소개하며 곰탕 한술 떠보라고 했다. "쌀이 좀 설익은 것 같지 않나요?" 안 그래도 한 숟가락 입에 넣으니 쌀이 탱탱하게 살아있다. 그런데 이것도 하나의 비법이란다.

보통 돼지국밥은 토렴하거나, 밥을 국에 말게 되면 빨리 퍼지는데 쫀득한 쌀알의 느낌을 살아나게 하기 위해 밥을 좀 되게 짓는다는 것.

처음엔 좀 씹히는가 싶더니, 소주 몇 잔 먹고 밥술을 뜨니 참 알맞게 국물이 배 맛났다.

이왕 온 김에 이것저것 먹어보자 싶어 삼겹구이를 주문했다. 삼겹구이는 통마늘을 넣어 '전용 구이 기계'로 구워내고 있었다. 삼겹구이 기계가 빙빙 돌아가며 내부의 고기와 마늘을 먹기에 가장 적당한 맛으로 구워주는 것. 취향에 따라 고수를 얹어 먹는다. 고수 좀 많이 달라고 했다.

창녕 우포늪 인근 술도가에 만든 전통주 '조선주조사'도 팔고 있었다. 우리나라 청주다. 소맥을 먹다가 먹으니 좀 도수(알코올 14도)가 약한 듯했다. 처음부터 청주를 선택했다면 탁월했겠다.


나막집 수육. 칼질이 좋아 감칠맛이 났다. 나막집 수육. 칼질이 좋아 감칠맛이 났다.

장인이 와도 덤 서비스는 없어

당일 삶아 촉촉하고 부드럽다는 수육은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늦게 배운 00이 밤새는 줄 모른다더니 안주가 금세 동이 난다. 맛이 너무 좋아서 그런지 음식량이 살짝 아쉽다는 생각을 했다. 김 전무가 말했다. "사위는 장인이 와도 딱 무게를 달아서 내주더라고요. 덤으로 조금 더 줘도 될 텐데 안 줍디다." 철저하게 무게를 달아 정량을 내는 고집이 있다.

한 접시를 더 시키기엔 살짝 부담스러운 가격. 맛보기 수육(9000원)이 해결사다.

그런데 여기가 W아파트 공간 아닌가.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아파트 주민으로 보인다. 가족끼리 와서 식사를 하는 팀이 많았다. 음식을 거의 다 먹었을 즈음 이 대표가 장인에게 인사를 하러 왔다. 내일 준비할 음식을 하러 장에 나간다며 먼저 나간다고 했다. 나막집에서 내놓는 김치는 다 직접 담그는 것이라고 했다. 수육의 특징은 칼질. 잘 삶은 수육을 덩이째 썰어 무게를 단 뒤 잘 드는 칼로 얇게 썰어내는 게 비결. 고기가 혀에 감긴다.

주방에서는 특이하게 사장뿐만 아니라 종업원들이 모두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있다. 일종의 나막집만의 규율이었다. 사장이 퇴근하고 난 뒤 서빙 직원에게 슬쩍 물어보니 수건을 두르니 좀 덥긴 하다고 한다. 날이 더워지는 여름에는 얇은 세프 모자로 바꾸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다. 지인의 사위가 하는 집이라 편하게 하는 말이다.

매주 화요일 휴무. 돼지곰탕 9000원, 고기가 배인 특돼지곰탕 1만4000원, 칼국수 8000원, 수육·삼겹구이 각 29000원.


나막집 삼겹구이. 나막집 삼겹구이.

창녕 우포늪 인근에서 만든 청주. 창녕 우포늪 인근에서 만든 청주.

나막집이 새겨준 곰탕 그릇. 뚜껑이 있어 고급스럽다. 나막집이 새겨준 곰탕 그릇. 뚜껑이 있어 고급스럽다.

나막집 메뉴. 나막집 메뉴.

이재희 기자 jae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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