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가호호 술을 빚던 시절이 있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사라졌던 가양주(家釀酒) 문화가 100년 만에 다시 부활하고 있다. 현재까지 발급된 지역특산주 면허만 1400건에 이르고, 해마다 새로운 양조장과 전통주가 탄생한다.
전통주엔 지역의 특색이 오롯이 담겼다. 지역에서 나는 재료로 술을 빚어, 특산음식과도 잘 어울린다. <부산일보>는 ‘술도락 맛홀릭’ 기획시리즈를 통해 부산·울산·경남 지역의 전통주 양조장을 탐방하고, 지역의 맛과 가치를 재조명한다. 이지민 대동여주도 대표 등 전통주 전문가도 힘을 보탠다.
뿌리를 찾아가다 보면 우리나라에 닿는 것들이 있다. 크리스마스 트리로 유명한 ‘구상나무’가 그렇고, 과일 중에는 ‘키위’가 있다. 한국과 중국·일본 등 동아시아에서 자생하던 다래나무가 뉴질랜드로 건너가 품종 개량된 과일이 지금의 그린키위(헤이워드 품종)다. 외국 물을 먹고 돌아온 키위는 오늘날 제주를 비롯해 남부지방에서 널리 재배된다. 과일로만 먹기 아쉬워 와인을 만들기도 한다. 경남 사천의 ‘오름주가’는 20년 가까이, 국내에서 유일하게 ‘키위 와인’을 빚어 온 양조장이다. 다래에서 키위를 거쳐 와인으로, 그 멀고도 색다른 여정을 소개한다.
■ 사천 키위, 와인에 빠지다
내비게이션 안내를 따라 삼천포터미널에서 사천시청 방면으로 달리길 10여 분. 목적지는 사천대로 바로 왼편 들녘 3층짜리 건물을 가리키는데 한참을 돌고 돌아 앞에 다다랐다. ‘사천시 특산주 다래와인’ ‘영농조합법인 오름주가’. 현관 입구의 낡은 글자 간판이 양조장의 세월을 말해 준다.
오름주가 조현국(46) 대표가 현관 왼쪽 또 다른 유리 문을 열고 나와 취재진을 맞는다. 지난해 여름 창고를 개조해 마련한 와인 체험 공간이다. 입구에 들어서니 테이블 위 얼음 바구니 안에 든 와인 병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시음용 와인이다.
“이 공간 이름이 ‘빠지다’입니다. ‘잘 가다가 삼천포로 빠지다’란 표현에서 따왔는데, 시음뿐만 아니라 와인 족욕을 하면서 매실·녹차·요구르트·젤리 등 다양한 지역 특산물도 맛볼 수 있어요. 2~3층에 올라가면 사천 9경 중 하나인 ‘실안 노을’을 구경하기에도 아주 좋습니다.”
‘빠지다’처럼 술을 매개로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은 양조인들의 꿈이다. 지금은 50평 남짓한 ‘빠지다’를 포함해 연면적 350평의 번듯한 와이너리를 갖춘 오름주가이지만, 시작은 소박했다.
조 대표는 토목 기사로 일하던 20대 시절, 관절에 좋다는 술을 우연히 알게 되면서 우리 술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전통주 창업을 준비하며 2006년께 사천시농업기술센터를 방문했다가 약초가 아닌 키위, 약주가 아닌 과실주(와인)로 방향을 틀었다. “처음엔 삼백초라는 약초로 술을 만들어 보려고 센터를 찾아갔는데, 사천 특산물인 참다래(키위)를 활용해 지역 특산주를 한번 해보자고 얘기가 됐어요. 대학원 전공이 발효공학이기도 했고, 참다래 홍보 효과도 있겠다 싶어 키위 와인을 만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2007년 하반기 첫 키위 와인을 선보였지만 시장의 평가는 차가웠다. 지인들조차 ‘너무 쓰다’며 고개를 저었다. 절치부심한 조 대표는 몇 년 뒤 소비자 입맛에 맞춰 스위트 와인을 내놓았고, 비로소 오름주가와 키위 와인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 ‘삼천포’에 ‘사천’을 더하다
현재 오름주가의 술은 스위트 와인 ‘7004S’와 드라이 와인 ‘7004D’, 그리고 토종다래로 만든 ‘다래로’까지 모두 3종이다. 키위 와인 자체도 색다른데, 이름도 이색적이다. 옛 지명 삼천포(3004)와 현 지명 사천(4000)을 숫자화한 뒤 둘을 합쳐 7004란 이름이 탄생했다.
“당시 주세법 영향도 있었어요. 와인 분위기에 맞게 영어 이름을 쓰면 더 큰 글씨의 한글로도 표기해야 했거든요. 그래서 제약이 없는 숫자를 활용해 작명을 했죠.”
7004S의 작은 병이 ‘3004’, 7004D의 작은 병은 ‘4000’이다. 어느 제품이건 지역명이 연상돼 지역 특산주의 취지와도 맞아떨어진다.
우리나라 최초의 키위 와인이 탄생한 지 올해로 17년째. 강산이 두 번 가까이 변할 시간이지만 키위로 와인을 만드는 곳은 여전히 오름주가가 유일하다. 키위가 와인을 빚기엔 까다로운 과일이기 때문이다.
“포도 와인보다 3배 이상의 노력이 들어가는 것 같아요. 키위는 착즙이 안 되다 보니 슬러지를 걷어 내는 과정도 힘들고, 특히 대량으로 빚을 땐 농가마다 후숙 정도가 다른 키위들을 비슷한 상태로 맞추는 과정도 필요하거든요.”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조 대표는 키위 와인 레시피를 완성했다. 첫서리가 내리기 직전인 11월 초순, 최대한 늦은 시기에 수확한 키위를 15브릭스(Brix) 당도까지 후숙시킨다. 이후 껍질째 파쇄해 설탕으로 24브릭스까지 보당한 뒤 효모를 접종한다. 1~2달 발효하면 당의 절반이 알코올로 바뀌는데, 맑은 부분만 탱크로 옮겨 담아 1년 이상 숙성·침전시킨 뒤 병입을 하면 완성이다. 스위트 와인은 덜 발효시켜 당을 많이 남긴다. 스위트 와인의 알코올 도수(8도)가 드라이 와인(12도)보다 낮은 이유다.
오름주가의 시작은 드라이 와인이지만 현재는 술 판매량의 95% 이상을 스위트 와인이 차지하고 있다. 그만큼 7004S는 호불호가 갈리지 않는 대중적인 맛이다. 싱그러운 빛깔에 어울리는 상큼한 향에, 맛은 새콤달콤하다. 초록색 키위 새 라벨 이미지와도 잘 어울린다. 식전주로 입맛을 돋우는 여느 화이트 와인과 비슷하면서도 특색이 분명한 향미다.
■ 키위 와인, 해산물과 만나다
일반적으로 화이트 와인은 해산물, 레드 와인은 육류와 어울린다고 알려져 있다. 굳이 화이트 와인이어서가 아니더라도, 사천표 키위 와인은 사천에서 많이 나는 생선류 해산물과 궁합이 맞다.
오름주가 양조장에서 차량으로 5분 거리인 ‘삼천포맛집정서방’ 식당에선 해산물 위주의 한식과 함께 키위 와인을 즐길 수 있다. 대표 메뉴인 ‘숯불불고기+생선구이 밥상’은 반건조 생선을 쓰는 게 특징이다. 사흘 동안 건조시킨 제철 생선을 1차로 섭씨 480도 화덕에서 구운 뒤 숯불로 한 번 더 구워 낸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식감의 비결이다. 일반 솥밥에 4000원을 추가하면 바지락과 취나물을 밥 위에 얹어 준다. 게장과 꼬막장, 청각무침 등 바다향 그득한 한 상에 삼천포의 맛이 푸짐하게 담겼다.
삼천포맛집정서방은 사천지역에서 유일하게 키위 와인을 맛볼 수 있는 식당이다. 병술이 부담스러운 이들을 위해 하우스 잔와인과 하이볼도 판매한다. 특히 2008년산 드라이 와인(‘나에게 다래와인’)으로 만든 하이볼은 골드키위를 띄운 비주얼부터 개성 있다. 시원한 음료수를 들이켜듯 식사와 함께하기 좋다.
오름주가의 연간 와인 생산량은 8만~9만 병 정도다. 국내 300여 와이너리 중에서도 손꼽히는 규모인데, 조 대표는 양보다 다양화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토종다래로 만든 ‘다래로’도 다양화 시도 중 하나다. 지난해와 올해 단 2000병만 한정 생산했는데, 토종다래 농가와 소비자 모두 만족해하고 있다. 새로운 제품도 구상 중이다. 오크칩을 넣어 숙성한 와인, 키위 샴페인과 증류주를 비롯해 복숭아로 만든 와인도 머지않은 시기에 선보일 예정이다.
“저희 스위트 와인이 입에 안 맞는 분들은 키위 와인 자체를 멀리하시더라고요. 탄산감 있는 샴페인, 드라이하면서 오크맛이 느껴지는 와인 등 제품군을 다변화해 소비자 선택의 폭을 넓히고자 합니다.”
오름주가는 이름에 담긴 ‘옳은 술을 만들겠다’는 초심 그대로 꾸준히 오르는 중이다. 고향에서 지역 농가와의 상생을 생각하는 조 대표의 마음, 키위 와인에 담긴 애정이 ‘실안 노을’의 따뜻함을 닮았다.
글·사진=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제품명 : 7004S
-양조장 : 오름주가(경남 사천시)
-내용량 : 750mL
-알코올 : 8.0%
-원재료 : 키위(참다래)·정제수·설탕·효모 등
[기자들의 시음평]
▶김희돈 스포츠라이프부 부장
“강한 향에 비해 맛은 깔끔하다. 숙성된 와인이라기보단 담금주 같은 느낌. 입문자용으로 괜찮을 듯.”
▶남형욱 디지털미디어부 기자
“찬바람 부는 가을보다 여름에 좀 더 어울릴 듯. 오이·당근 같은 간단한 채소와 마셔도 좋을 것 같다.”
▶이상배 디지털미디어부 기자
“스위트 와인 치고는 새콤달콤. 새콤함이 좀 더 세게 발현되며, 단맛이 과일의 풍미를 더 올려 준다.”
▶이지민 디지털미디어부 에디터
“단맛보단 신맛이 더 강하다. 신맛 끝에 단맛이 살짝 느껴지며, 마지막에 스치는 키위향이 흥미롭다.”
[전문가의 맛 코멘트]
▶이지민 대동여주도 대표
“약간 초록빛과 우드 컬러가 감도는 라이트 골드 빛깔의 와인이다. 향을 맡는 순간 싱그럽고 매력적인 산미가 느껴진다. 상큼한 시트러스 향이 함께 나타나며 무르익어 가는 과실을 연상케 한다. 맛보는 순간 키위의 새콤달콤함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입 천장에선 약간의 쿰쿰함도 느껴진다. 혀에서 새콤함과 쌉싸래함이 은은하게 이어지며, 타닌감도 있어 입안에 살짝 코팅되는 느낌이 있다. 맛에서 유기산을 마신다는 느낌이 풍부하게 전해져 온다. 키위를 좋아하는 이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와인일 것 같다. 원재료의 개성을 충분히 담아낸 와인으로 산미가 좋아서, 새콤달콤한 소스의 탕수육 같은 음식과 함께하면 좋은 페어링을 선사해 줄 것 같다.”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