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아파트 아파트

입력 : 2024-11-28 18: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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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아 소설가

어떤 대상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건 무엇일까
글을 쓰고 말을 하기 전에
삶에 대한 진정성 가지고
제대로 알고 깊게 생각해야

잊고 싶은 게 많은 건지 그저 기억력이 안 좋은 건지 모르겠지만, 지나간 일들을 세세하게 기억하지는 못하는 편이다. 그렇지만 어떤 사건들은 굳이 기억하려 애쓰지 않아도 당시의 감정선까지 선명하게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 마치 현미경으로 나뭇잎의 잎맥을 들여다보듯 그 당시의 마음이 고배율로 확대되는 것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는데, 학교에서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쓰라고 한 적이 있다. 수신인이 왜 미국 대통령이어야 했는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아무것도 모른 채 선생님이 쓰라고 하니까 그냥 썼다. 그때도 나는 쓰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고 수업 대신에 글을 쓰라고 하니까 신이 났을 뿐. 레이건 대통령께, 라고 시작했지만 수신인과 관계없이 내 이야기를 썼던 것 같다. 그 편지로 나는 상을 받았고, 내 글은 교내 게시판에 전시되었다. 당시에는 어린애답게 마냥 기뻤다.

부끄러운 마음이 든 것은 한참 뒤의 일인데, 그건 내가 몰랐던 여러 사실들을 알게 된 후였다. 나는 편지의 본론에 들어가기 전, 서두에 우리나라를 소개했다. 그때 나는 사계절이 우리나라에만 있는 줄 알았기에, 각 계절의 풍경을 정성 들여 묘사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88올림픽이 열릴 거라는 이야기도 자랑스럽게 덧붙였다. 우리나라의 대통령 이름도 소개했다. 학살자의 이름인 줄도 모르고 천진하게. 어리긴 했지만 그때의 내가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더라면 편지는 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독재 정권과 치열하게 싸운 이들, 경제개발의 미명 아래 고통받는 약자들. 아마 그런 이야기를 편지에 썼다면 자동 탈락되거나 교장실에 불려 갔겠지만 말이다.

최근에 내 아이는 교육 앱을 통해 화상 영어 회화 수업을 시작했다. 짧은 영어로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하나 싶어 가끔 엿듣는데, 하루는 플로리다에 살고 있는 미국인 선생님이 아이에게 물었다. “너 부산에 산다고 했지? 부산이라는 도시 이름은 들어봤는데, 거기 사는 사람은 처음 봤어. 부산이 어떤 도시인지 나에게 설명해 줄래?” 어떤 대답이 나올지 궁금했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아이는 고향을 어떻게 설명할까. 아이가 대답했다. “바다가 가까워요.” 그렇지, 부산은 바다지. 나는 아이의 마음속에 있을 부산의 바다를 그려보았다. 선생님이 다시 물었다. “오, 그렇구나. 좀 더 말해봐. 부산은 또 어떤 특징이 있는 도시야?” 아이는 음, 하고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아름다운 아파트가 많아요.”

아름다운 아파트라니…. 푸른 바다 위를 날아다니는 하얀 바닷새들과 작은 등대의 이미지가 내 머릿속에서 와르르 무너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어린 시절의 나와는 달리 아이는 부끄러운 누군가의 이름을 자랑스럽게 소개하지 않았다는 점이랄까. 그래, 네가 태어난 이 도시에서 가장 많이 본 것은 아파트였구나. 아이의 말을 듣고 창밖을 보니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온통 아파트였다. 높고 거대한 건물들에 가려진 작고 연약한 것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 대해 이야기할 때, 당연하게도 그 이야기들은 그 대상의 전부가 아니다. 우리는 아는 만큼만, 보는 만큼만, 생각하는 만큼만 말하고 쓸 수 있다. 때로는 그 생각들마저도 적절하게 표현이 되지 않을 때도 있지만, 언어적 한계는 차치하더라도 무언가를 제대로 알고 똑바로 보고 깊게 생각하려는 태도는 삶에 대한 진정성이며 각자에게 맡겨진 계율일 것이다. 오래전 내가 미국 대통령에게 쓴 편지 속 무지의 부끄러움에 대해서는 어렸으니까 그만큼밖에 몰랐다고 변명이라도 할 수 있겠지만, 이제 더 이상 그렇게 둘러댈 수는 없다. 세상을 제대로 보는 일에 게을러지지 않는 것, 글을 쓰고 말을 하기 전에 더 애써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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