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푸른 뱀의 해] 풍요와 다산의 상징… 재생의 한 해 소망

입력 : 2024-12-31 17: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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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세계선 뱀에 대한 두려움 가져
허물 벗는 모습 불사·영생의 의미
지팡이 감고 있는 모습은 의료 상징
집안 재운 관장… ‘업신’ 모시기도

을사년(乙巳年) 푸른 뱀의 해가 밝았다. 뱀은 십이지 가운데 사람들이 가장 꺼리는 동물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알고 보면 일찍부터 사람들은 뱀을 불사·재생·영생의 상징으로 여겼다. 푸른 뱀의 해는 대한민국 재생의 한 해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부산일보DB 을사년(乙巳年) 푸른 뱀의 해가 밝았다. 뱀은 십이지 가운데 사람들이 가장 꺼리는 동물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알고 보면 일찍부터 사람들은 뱀을 불사·재생·영생의 상징으로 여겼다. 푸른 뱀의 해는 대한민국 재생의 한 해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부산일보DB

을사년(乙巳年) 푸른 뱀의 해가 밝았다. 뱀(巳)의 해인 건 알겠는데, 왜 푸른 뱀이라고 하는지 궁금해진다. 우선 십간(十干)과 십이지(十二支)를 조합해 만든 간지(干支)를 알아야 의문이 풀린다. 을사년은 십간의 ‘을’과 십이지의 ‘사’가 합쳐진 해다. 간지 체계는 자연의 오행, 그리고 색과 연관되어 있다. 오행인 목, 화, 토, 금, 수는 각각 청, 적, 황, 백, 흑색과 연결이 된다. ‘을’은 오행 상 ‘목’을 의미하기 때문에 청색, ‘사’는 뱀과 연결이 되어 을사년은 푸른 뱀의 해가 된다.

뱀이 지팡이를 감고 있는 모습은 WHO(세계보건기구)를 비롯한 여러 의료 기관의 상징이 되었다. 부산일보DB 뱀이 지팡이를 감고 있는 모습은 WHO(세계보건기구)를 비롯한 여러 의료 기관의 상징이 되었다. 부산일보DB

푸른 뱀이든 붉은 뱀이든 뱀은 십이지 가운데 사람들이 가장 꺼리는 동물임에 틀림이 없다. 둘로 갈라져 날름거리는 혀, 징그러운 비늘로 덮인 몸, 몸으로 기는 괴이한 이동법이 모두 거부감을 준다. 뱀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는 동서양 공통이었다.‘잔 속의 뱀 그림자’는 뱀에 대한 두려움을 담은 말이다. 성서 창세기에도 ‘야훼 하느님께서 만드신 들짐승 가운데 가장 간교한 것이 뱀이었다’라는 대목이 있다. 에덴동산에서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도록 유혹한 것도 뱀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메두사의 머리카락 역시 뱀이다.

뱀의 해 을사년에는 한반도에서 뒤숭숭한 일이 많았다. 1545년에는 을사사화, 1905년에는 을사늑약이 있었다. 을사사화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파평 윤씨 내부의 대결로 ‘대윤’과 ‘소윤’이 충돌해 대윤 일파가 모조리 숙청된 사건이다. 을사늑약은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강제로 체결한 불평등한 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일본의 보호국이 되고 말았다. 을사늑약이 맺어지면서 을사년 내내 우울하고 어수선한 분위기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쓸쓸하고 스산한 분위기를 ‘을사년스럽다’라고 불렀다. 그게 시간이 지나며 변해 ‘을씨년스럽다’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하지만 상상 세계에서 뱀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신비한 존재였다. 사람들이 허물을 벗어 새롭게 태어나고, 겨울잠을 자기 위해 일정 기간 종적을 감추는 뱀을 불사·재생·영생의 상징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신화학자인 조셉 캠벨도 뱀을 두고 “과거를 벗어던지고 계속해서 새 삶을 사는 생명의 상징”이라고 했다. 상상 세계의 뱀을 현실 세계에 사는 우리의 바람을 이루어 주는 신적인 존재로 생각해 섬겼던 것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의학과 치료의 신으로 추앙된 아스클레피오스 이야기가 나온다. 아폴론의 아들이었던 아스클레피오스는 죽은 사람까지 치료해 살려내는 실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고대인들은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에서 하루를 보내면 모든 병이 낫는다는 신앙을 가질 정도였다. 그의 상징이 된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에 뱀 한 마리가 똬리를 틀면서 지팡이를 기어오르는 모습이 나오는 이야기가 흥미롭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제우스의 번개를 맞아 죽은 글라우코스를 치료하던 중 뱀 한 마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깜짝 놀란 아스클레피오스가 지팡이를 휘둘러 그 뱀을 죽였다. 잠시 후 또 한 마리의 뱀이 입에 약초를 물고 들어와 죽은 뱀의 입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죽었던 뱀이 다시 살아나고, 뱀이 했던 대로 그 약초를 글라우코스의 입에 갖다 대어 살려냈다는 것이다. 그 뒤 아스클레피오스는 뱀에 대한 존경의 의미를 담아 그의 상징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다. 뱀이 지팡이를 감고 있는 모습은 지금까지 의료의 상징이 되었다. WHO(세계보건기구)는 물론이고 대한의사협회를 비롯한 많은 의학 관련 단체들의 상징도 이와 비슷하다.

뱀은 좌선에 든 부처님을 보호하고 나선 영물이기도 하다. 부처님이 성도(成道) 후 49일 동안 해탈의 즐거움을 누렸다는 대목에서 등장하는 무짤린다 용왕이 뱀이다. 〈부처님생애〉에는 ‘다섯 번째 칠일, 무짤린다 나무 아래에서 법의 즐거움을 누릴 때였다. 때아닌 폭풍이 불고 폭우가 쏟아졌다. 그러자 나무에 의지해서 살던 무짤린다 용왕이 나타났다. 무짤린다는 자신의 몸으로 부처님의 온몸을 감싸고 머리를 부채처럼 폈다. 이레 동안의 폭우가 그치자 무찰린다는 부처님을 감쌌던 몸을 풀었다’라고 전한다. 실제로 동남아시아 불교국가에서는 선정(禪定)에 든 부처님을 감싼 뱀의 형상을 자주 볼 수 있다.

뱀은 한꺼번에 많은 알과 새끼를 낳아 풍요와 다산도 의미한다. 따라서 꿈에 뱀이 나타나면 임신이나 재물이 들어올 풍요의 징조로 여겼다. 대표적으로 우리에게는 창고에 살며 살림을 늘게 해주고 집을 지켜준다고 믿었던 업신이 있었다. 업신을 홀대하면 그 집안은 패가망신하고, 잘해주면 부자로 만들어 준다는 것이었다. 업신이 인간 앞에는 구렁이의 모습으로 나타나, 이를 ‘업구렁이’라 불렀다.

부산 기장에서는 집안의 재운을 관장하는 가신인 업을 모시는 의례인 ‘업신 모시기’가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기장에서는 집안에 상주하는 구렁이나 두꺼비를 ‘업장군’이라고 부른다. 업장군이 집안의 고방, 나무나 볏짚을 쌓아 놓은 아래, 또는 담의 구멍 속 등에 살고 있다고 여기고 있다. 기장에서는 정월 초하루나 추석 또는 정월 중 하루를 택해 고방에 업신을 위해 제사상을 차려 놓고 집안에 재복을 내려 달라고 두 손을 모아 비비면서 소원을 빈다. 기장과 가까운 해운대 청사포에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푸른 뱀과 관련된 전설을 소개한다.

옛날, 이 마을에는 금슬이 좋은 신혼부부가 있었다. 어느 날 부인은 예감이 좋지 않아 고기잡이를 나가는 남편에게 하루만 쉬라고 말했다. 남편은 별일이 없을 것이라며 걱정하는 아내를 안심시킨 후 바다로 나갔다. 그러나 부인의 예감대로 석양이 저물고 밤이 되었지만,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 이후, 김 씨 여인은 매일 바위 위에 서서 남편의 배를 기다렸다. 그러나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고 김 씨 여인은 기다림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소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소나무가 자라는 것을 바라보면서 언제인가는 남편이 무사히 돌아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아무리 말려도 김 씨 여인은 남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남편을 기다리던 김 씨 여인은 점점 말라갔다. 마침내 그녀의 정성이 용궁에 가서 닿았다. 용왕은 자신을 대신하여 푸른 뱀을 그녀에게 보냈다. 김 씨 여인은 푸른 뱀의 인도를 받아 용궁에 도착해 그리워하던 남편을 만나게 되었다. 그 후로 이 마을 이름을 푸른 뱀의 포구 청사포(靑蛇浦)라 하고, 김 씨 여인이 심은 나무를 망부송이라 부르게 되었다.

청사포에는 지금도 망부송이라고 부르는 수령이 400년이 넘고 키가 15m에 이르는 소나무가 있다. 청사포는 1900년까지 청사포(靑蛇浦)라고 표기했지만 마을 주민들이 뱀 사(蛇)자가 좋지 않다고 해서 1927년부터 청사포(靑沙浦)라고 고쳐 현재까지 불리고 있다. 기왕이면 을사년 푸른 뱀 새해는 청사포에서 맞이하면 의미가 있겠다. 푸른 뱀은 새로운 시작, 지혜로운 변혁, 성장과 발전의 의미로 해석된다. 비록 안팎으로 을씨년스럽게 시작하지만 우리는 국난 극복이 취미이자 특기인 국민이 아니던가. 푸른 뱀의 해는 대한민국 재생의 한 해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듯 오랫동안 우리를 옭아맸던 나쁜 버릇이나 관습을 올해는 훌훌 벗어버리자.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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