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철의 사리 분별] 과거와 미래가 같지 않기를

입력 : 2025-05-08 18: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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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누적된 사회 병증 12·3 사태로 드러나
부조리한 과거 청산 못 한 후유증 심각
엘리트주의·승자 독식·권위주의 만연

'나쁜 역사' 재현한 본질적 원인 분석
제도적 혁명으로 가치관 왜곡 교정
비판적 성찰 통해 민주 시민 거듭나야

12·3 사태 이후 158일째로 접어들었다. 많은 일이 있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파면됐고, 6월 3일 새 대통령을 선출한다. 정치권은 정권 창출을 위해 연일 난타전을 벌이고 있다. 비상계엄 사태는 벌써 잊혀 가는 모양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에 대한 2심 무죄 판결과 유죄 취지 파기환송, 미국발 관세전쟁 등 굵직한 사안이 연이어 휘몰아쳤기 때문일까. 아니면 지난 일을 되돌아보지 않는 우리 사회 관성에 따른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되짚을 지적 저력조차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대선 결과에 따라 새 정부가 꾸려지는 등 많은 일들이 또 이어질 것이다. 새 대통령은 산적한 현안 처리를 위해 눈코 뜰 새 없는 시간을 보낼 것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가장 엄중하게 다뤄야 할 사안은 따로 있다. 새 대통령과 정부는 최우선 과제로 12·3 사태로 드러난 우리 사회의 병증을 정밀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집권했으니 실익이 없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특히 내란 수사가 진행 중인 만큼 검찰과 법원에 맡겨두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시급한 것은 12·3 사태와 이후 일련의 사안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우리 사회에 던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답을 찾기 위해 머리를 맞대는 것이다.

과거는 현재를 만들고 현재는 미래를 만든다. 우연한 현재는 없다. 12·3 사태를 두고 윤 전 대통령 개인과 그 주변인들의 자의적인 판단에 의한 사건일 뿐이라고 여기면 안 된다. 그 사태에 도사린 수많은 과거와 과거의 연결점, 그 과거와 현재·미래의 연관성에 주목해야 한다. 헌법재판소는 윤 전 대통령 파면 선고에서 ‘국가긴급권 남용의 역사를 재현하여 사회·경제·정치·외교 전 분야에 혼란을 야기했다’라고 했다. 우리는 ‘역사 재현’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 그렇다면 가장 본질적 질문은 윤 전 대통령 등이 대체 어떤 내면 작동 프로그램에 따라 ‘나쁜 역사’를 재현할 결심에 이르렀는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질문은 이어진다. 최고 엘리트 과정을 밟은 국정 지도자가 어떻게 망상적 결단을 내릴 수 있었는가. 구속 취소 뒤 환한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인 윤 전 대통령의 행동과 생각을 지배한 내면 가치관은 어떻게 구축되었는가. 국민 기본권을 침해하는 비상계엄을 되레 지지한 일단의 국민과 정치인들은 어떤 연유로 그런 가치관을 형성한 것인가. 12·3 사태가 잉태한 이번 대선을 앞두고도 비상식적 일들은 계속되고 있다. 이재명 후보를 위한 민주당의 ‘방탄 입법’이 대표적이다. 파기환송을 선고한 사법부를 조롱하고 대법원장 탄핵도 거론했다. 국민의힘은 내란 원죄에 대한 반성도 없이 ‘반이재명’ 기치 아래 정치공학적 셈법에만 몰두하고 있다. 내부 권력 쟁취를 위한 ‘무조건 단일화’를 둘러싼 진흙탕 싸움은 이들이 12·3 사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보여준다. 원하는 것을 위해 어떤 행위라도 불사하는 행태는 맥락적으로 12·3 사태와 다르지 않다. 우리 사회는 정상적 판단과 정치를 기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인가. 상시적인 비상식, 반지성과 보편적 가치에 반하는 행태들을 보면서 이런 현상은 특정 개인과 집단의 문제가 아닌 사회 구조적 문제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에 이른다.

한국 현대사는 식민 지배와 민족 분단, 6·25 전쟁, 반복적 내란으로 인한 장기간의 군사 독재, 외환 위기와 경제 파탄 등 세계사에 유래를 찾기 힘들 만큼 다양한 비극으로 점철됐다. 방임된 신자유주의로 인한 불평등도 극심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적 가치관과 집단 지성의 질이 개인 내면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다. 특히 부조리한 과거와 현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할 경우 사회 가치관은 어긋난 방향으로 질주한다. 그런 사회에서 성장한 개인이 온전한 민주 시민의 가치관을 체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 사회가 권위주의와 엘리트주의, 카르텔에 의한 비민주적 조직 운영, 경쟁 일변도 교육 환경, 승자 독식, 극단적 흑백 논리, 반지성주의, 약자 혐오, 잠재된 고도의 폭력성, 이기주의 등 후진적 병폐로 몸살을 앓는 것은 사회 구조적인 가치관 왜곡 현상이 심각하다는 방증으로 봐야 한다. 더욱이 내면적 성숙과 비판적 성찰을 이루지 못한 후유증들이 지금 거대한 부메랑으로 돌아온다는 생각이다.

우리 사회의 재앙적 병증을 치료하려면 근원적 원인을 면밀히 분석해야 한다. 새 대통령 당선자는 초장기적 관점에 근거한 제도적 혁명을 통해 왜곡된 가치관을 바로잡고 참담한 역사의 악순환을 근절해야 한다. 국민들의 자발적인 학습과 성장 의지도 절실하다. 더 나은 민주 시민이 되려는 지속적 노력으로 과거와 다른 미래를 만들어야 한다. 병든 사회는 인간을 병들게 한다. 우리 사회 내면적 병증의 근원을 향한 끊임없는 질문과 해답 모색만이 나쁜 역사의 반복을 막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천영철 논설위원 cyc@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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