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철의 사리 분별] 그들은 서럽고 막막할 뿐이다

입력 : 2025-06-12 17:5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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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노인·청년층 고단한 삶 표심으로 분출
계엄 불구 변함없는 보수 지지 이면엔
불행한 현실에 대한 분한 감정 도사려
사회적 무관심·구조적 모순 개선 시급
'세대 프레임' 선동 정치도 퇴출 시켜야
공감·혁신적 정책으로 눈물 닦아주길

이재명 대통령은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우리 사회는 현재 거의 모든 부문에서 극심한 분열 양상을 보인다. 이번 대선에서도 입증됐듯이 선거 표심은 이런 안타까운 현실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다. 따라서 대선 표심에 숨어있는 각 계층 민심의 핵심을 정확하게 읽어내는 것이 ‘모두의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전제 조건일 것이다.


지상파 3사의 21대 대선 출구 조사에 따르면 70대 이상 유권자 64%가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를, 1.5%가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를 지지했다. 더불어민주당 이 대통령을 지지한 비율은 34%로 집계됐다. 19대 대선 출구 조사에서 70대 이상 22.3%가 민주당 문재인 전 대통령을 지지한 것보다 11% 포인트 높지만 노년층의 보수 지지 성향은 별반 달라지지 않은 느낌이다. 이번 대선이 윤석열 전 대통령의 불법 계엄에 대한 심판 성격을 띤 점을 감안하면 노년층의 ‘요지부동 표심’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더욱이 대선 최종 지지율은 이 대통령 49.42%, 김문수 41.15%, 이준석 8.34%로 범 보수 후보 두 명을 합하면 거의 50%에 육박한다. 70대 이상 유권자의 응집력이 상당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 응집력과 표심의 원천은 무엇일까. 한국 유권자들은 통상적으로 합리적 판단보다는 개인이나 세대적 불만에 기인한 분노 감정을 기반으로 투표하는 성향이 강하다. 그렇다면 노년층 표심 원인을 분석하기 전에 그들이 무엇에 분노하고 있는가를 우선적으로 살펴야 한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노인 자살률과 빈곤율이 가장 높다. 여기에 사회적 고립과 노인 우울 문제 등을 감안하면 노년층의 상당수는 불행한 현실을 감내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런 상황을 직시할 때 노년층은 궁극적으로 자신들의 서럽고 분하고 막막한 감정을 투표로 분출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생각이다.

물론 산업 발전 주역인 자신들에 대한 평가 절하로 인한 자긍심 훼손, 이 대통령에 대한 반감, 비상계엄에 대한 견해 차이 등도 표심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세대 갈등, 진영 논리, 보수 정당의 전략적 부추김 등도 이유로 꼽힌다. 심지어 인지부조화와 확증편향 등 낙인성 잣대를 들이대는 시각도 존재한다. 그러나 최근 연구 결과 등에 따르면 이런 해석은 결국 곁가지에 불과하다. 사회적 무관심과 구조적 모순 속에 개선 여지없는 고단한 현실을 계속 버텨내야 한다는 것이 기저에 도사린 가장 핵심 원인이라는 것이다. 즉, 모두의 대통령은 다른 모든 것에 앞서 노인들의 고단한 삶을 개선하고 서러운 눈물을 닦아주는 데 정책 초점을 맞춰야 한다. 노인들의 분노를 이용해 ‘세대 프레임’ 선동을 일삼는 퇴행적 정치 관행도 퇴출시켜야 한다.

청년 표심 문제도 노년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정확한 대선 통계는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선거관리위원회의 선거 전 유권자 의식 조사에 따르면 만 18∼29세 이하 청년 가운데 ‘반드시 투표하겠다’는 응답이 75.3%로 집계됐다. 20대 대선 당시 66.4%보다 8.9% 포인트 높았다. 그들이 적극적으로 투표에 나선 것은 이 세대가 처한 현재 환경이 그만큼 좋지 않다는 방증으로 봐야 한다. 청년들은 기회조차 주지 않는 왜곡된 사회 구조 속에서 ‘연애·결혼·출산 포기’를 강요 당하고 있다. 노년층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서럽고 막막한 현실이 초래한 분노적 감정을 이번 대선에 적극 투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자유주의 시대 기업들은 정규직 고용을 최소화하고 있다. 번듯한 정규직으로 취업하는 것은 이제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상당수 청년에게 취업이란 파견직, 단기 계약직, 무기 계약직, 아르바이트직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에게 사회생활은 ‘빈곤의 굴레’에 뛰어드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더욱이 비정규직의 상당수는 상시적 박탈감과 불안감, 자기 비하와 분노 등 부정적 감정에 시달린다. 결국 이번에 청년 표심이 성별에 따라 엇갈리고 20대 남성이 점점 보수화 경향을 보인 것도 모두 팍팍한 삶의 문제로 귀결된다는 분석이다. 가장 본질적 원인인 좋은 일자리 부족, 고용 불안, 저임금 일자리 만연화에 대한 직접적 처방이 시급하다. 비정규직 문제와 관련해 직접 고용, 동일 노동 동일 임금, 정규직과의 차별 해소 등 혁신적인 청년 노동 대책이 시급하다.

모두의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국민의 아픔을 보듬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인생은 어차피 날 때부터 불공정·불공평하다’라거나 ‘서러움은 각자의 몫’이라는 등 책임을 개인과 해당 세대에게 떠넘기는 행태는 이제 중단되어야 한다. 지금, 서러워 울먹이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분열 책임을 묻는 날 선 질책이 아니라 공감과 정책적 개선이다.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 때문에 갈수록 모질어지는 세상을 조금 더 따뜻한 공동체로 만드는 사람, 모두의 대통령을 기대한다.

천영철 논설위원 cyc@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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