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안보 정세가 요동치고 있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의 대만 유사시 집단자위권 행사 발언으로 중일이 격돌하고 있다. 총리 참수론 따위의 말 폭탄에 이어 무역 보복 조치로까지 번지며 확전하는 모양새다. 양국의 강 대 강 충돌은 미중 갈등을 배경으로 장기화할 가능성이 높다. 대만해협을 둘러싼 안보 지형 변화에 한반도가 무풍지대일 수 없다는 점에서 한국이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국면이다.
미국은 한미 정상회담 결과를 담아 13일 발표된 공동 팩트시트와 한미안보협의회(SCM) 공동성명에서 콕 집어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대만을 침공하려는 중국을 겨냥한 구도를 명확히 했다. 대만해협의 평화·안정 유지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strategic flexibility) 증대가 합의문에 포함된 것은 중국의 팽창을 막는데 주한미군을 앞장세우겠다는 의도다. ‘돈 잘 버는(money machine) 부자 나라를 왜 지켜 주느냐’라며 주둔 비용 인상을 압박하던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모습이 어색하게 겹치는 대목이다.
지난 8월 27일 경기도 여주시 연양동 남한강에서 열린 제병 협동 도하 훈련에서 주한미군 스트라이커 장갑차와 한국군 K200 장갑차가 부교 도하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주한미군을 한반도 방위군이 아닌 동북아 기동군으로 쓰겠다는 구상은 20년 넘게 한미 양국에 뜨거운 감자였다. 도널드 럼즈펠드 전 미 국방부 장관은 2004년 글로벌 방위 태세 검토(Global Defense Posture Review, GDPR)를 발표하고 주한미군의 역외 기동 능력 강화와 더불어 한미연합군의 통합적 작전 능력을 강조했다. 주한미군만의 독자적 작전이 아니라, 한국군과 함께 동북아 및 역내 여러 지역에서 동반 작전 수행을 전제한 것이다. 미군이 역외 분쟁 지역에 한국군을 데리고 다니겠다는 구상을 당시 노무현 정부가 받아들일 리 없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5년 3월 공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동북아시아의 분쟁에 휘말리는 일은 없다”는 폭탄 발언으로 미국에 경고장을 날렸다.
우여곡절 끝에 2006년 1월 한미 외교장관 공동성명으로 사태는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 ‘The ROK respects the necessity for strategic flexibility of the U.S. forces in the ROK. The U.S. respects the ROK position that it shall not be involved in a regional conflict in Northeast Asia against the will of the Korean people.’ 영문을 앞세운 이유는, 애당초 이 합의문이 영문으로만 발표됐고, 백악관 홈페이지에만 원문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 외교부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의 필요성을 존중한다. 미국은 한국 국민의 의사에 반하는 동북아 지역 분쟁에 한국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한국의 입장을 존중한다.’
이 성명에 대한 미국의 해석은 일관됐다. 주한미군은 더 이상 대북 억지력으로서의 붙박이가 아니라 동북아 정세에 따라 한반도를 넘나드는 동북아 신속기동군을 자처했다. 하지만 당시 한국 정부의 인식은 전혀 달랐다. 2006년 11월 송민순 외교부 장관 후보자는 분쟁에 휘말리지 않는 주체, 즉 대명사 ‘it’이 한국군이 아닌 주한미군이라고 국회에서 대답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한국 정부가 동의하지 않는 한 주한미군은 움직이지 못한다”며 같은 맥락의 주장을 폈다. 한국인의 의사에 반해 주한미군이 역외 분쟁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합의문 해석의 논란은 한국 외교사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2006년 이래의 관련 양해를 확인한다.’ 2025년 한미 공동 팩트시트에서 2006년 합의문은 중요한 전거로서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다. 미국은 2006년 합의를 발전시켜 한국군이 북한에 대한 재래식 전력 방어에 집중하는 대신 주한미군이 한반도를 넘나들며 동북아의 기동군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한미동맹을 손질하고 싶어 한다. 중국의 팽창에 주한미군이 직접 대응할 수 있으려면 이른바 동맹의 현대화가 필요하다는 논리다.
이에 대해 역대 한국 정부는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원칙적으로 이해와 공감을 표명하지만, 주한미군의 대북 억지력이 약화하는 방향에 동의하지 않았고, 또 한국군이 한국 국민의 의지에 반하여 동북아 등 역외 분쟁에 자동 개입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강조해 왔다. 대명사 ‘it’이 한국군이건, 주한미군이건 한국의 역외 분쟁 개입 가능성 차단이 역대 한국 정부의 기준이 된 것이다.
미국은 주한미군이 동북아의 리베로가 된 것을 기정사실로 여기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대니얼 드리스콜 미국 육군장관이 최근 방한해 주한미군이 중국과 북한의 위협에 모두 대응해야 한다고 언급한 대목이다. 논란이 커지자, 안규백 국방부 장관은 13일 국정감사에 출석해 “그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라고 선을 그었다. 이어 “주한미군의 전력 증강은 한반도 대북 억지력에 목적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노무현 전 정부의 인식과 연결돼 있다.
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사령관은 17일 지도를 뒤집으면 한반도가 중국·러시아·북한을 견제하는 ‘전략적 중심축’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연합뉴스
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사령관이 최근 사령부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한반도의 지정학적 가치를 중국·러시아·북한을 견제하는 ‘전략적 중심축’으로 규정한 것도 한국인의 시선에서 마뜩잖다. 경기도 평택과 오산의 미군기지가 대북 방어가 아닌 대중, 대러 견제를 위한 불침 항모처럼 역할이 전환되는 것에 한국은 합의한 적이 없다. 최근 미 국방부(전쟁부)의 존 노 인도·태평양 차관보 후보자가 한국이 미국과 함께 중국의 군사적 위협에 맞설 수 있어야 한다는 취지로 주장한 것도 동맹 간 공식 입장을 벗어난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 거론된 지 오래됐지만, 실제 실행된 적은 없다. 최근 중일 간의 충돌이 격화되는 양상을 보면 주한미군의 한반도 밖 출동이 언제 이뤄져도 이상하지 않게 됐다. 미국은 대만 유사시에 주한미군의 군사적 개입을 당연시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한국은 시험대에 오른다. 한국군의 동반 개입 혹은 지원을 요구할 경우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2006년과 2025년 한미의 합의 문서에 따르면 주한미군이 유연화되더라도, 한국은 원치 않는 분쟁에 휩쓸리지 않아야 하는데, 두 조건의 양립 가능성에는 물음표가 붙을 수밖에 없다.
서울 용산 합동참모본부에서 3일 존 대니얼 케인 미국 합참의장이 탑승한 주한미군 F-16 전투기가 이륙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 대목에서 70년 된 동맹의 가치를 되돌아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미동맹은 출발부터 비대칭적 구조였지만, 내용적으로 시혜 동맹이 아닌 호혜 동맹이었다. 미국이 일방적으로 한국에 베푸는 동맹이 아니라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동맹이라는 의미다. 미국은 자신들의 세계 전략에 비춰 동맹의 이해득실을 끊임없이 따져 왔다. 70년간 한미동맹이 유지된 데는 미국에도 그만한 쓸모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물론 한미동맹을 통해 한국이 얻은 안전보장의 가치는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
동맹도 시대의 부침을 겪는다. 미국이 먼저 동맹의 성격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의존형 동맹에서 부담 분담형 동맹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한국 스스로가 방위력을 키우라는 의미다. 왜냐하면 주한미군에는 변화된 세계 전략 변화에 따라 새 역할이 부여되기 때문이다. 주한미군은 중국의 팽창을 견제해야 하고, 따라서 북한 방어를 넘어 인도·태평양 안보의 핵심축으로 격상시키려는 정책 기조가 분명해졌다. 70년 된 한미동맹의 실상은 합의된 문구와 현장 사이의 간극이 점점 커지는 형국이다.
한미동맹의 성격이 변해야 한다면, 그 변화는 정부 간의 협의로만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 국민의 삶과 직결되는 안보 정책일수록 공개된 논의와 합의가 필요하다. ‘국민의 의사에 반하지 않는’이라는 단서가 구두선에 그치지 않으려면, 달라진 안보 환경에 걸맞은 동맹의 틀을 국민과 함께 재설계해야 할 시점이다. 민주주의 국가의 동맹은 국민의 동의 위에서만 작동할 수 있다.
김승일 부산일보 논설위원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