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비운의 '중동 집시'

입력 : 2026-03-09 18: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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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드족은 한 번도 독립 국가를 세우지 못한 비운의 민족이다. ‘세계 최대의 나라 없는 민족’인 이들은 튀르키예 남동부, 이라크의 북부, 시리아 북동부, 이란 북서부 등 네 나라 국경이 맞닿은 산악 지대에 흩어져 거주해 왔다. 이런 특성 때문에 ‘중동의 집시’로 불린다. 약 4000만 명에 이르는 이들은 고유 언어인 쿠르드어를 쓰며, 대다수가 수니파 무슬림이다. 나라를 이루지 못한 것은 지형이 험한 산악 지역에 살다 보니 정치적 공동체를 이루기 쉽지 않았고, 쿠르드족이 사는 네 나라 모두 독립을 반대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중세 십자군 전쟁의 영웅 ‘살라딘’이다. 그는 12세기 이슬람 군대를 이끌고 십자군에게 빼앗겼던 예루살렘을 탈환한 지도자다. 이슬람권과 서양에서 모두 존경받는 살라딘은 쿠르드족에겐 역사적 자부심이다.

하지만 이 민족의 역사는 ‘독립의 꿈’과 좌절의 반복이었다. 쿠르드족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의 편에 서서 자신들의 지배국이었던 오스만 제국 공격에 참여했다. 1920년 연합국은 패전국인 오스만 제국과의 세브르조약에 쿠르드 국가 건설을 포함시켰지만, 1923년 로잔조약에서 해당 조항이 삭제됐다. 쿠르드족 거주 지역에서 대규모 유전이 발견되자 영국이 약속을 저버린 탓이다.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 때도 두 나라는 상대 국가에 있는 쿠르드족을 이용한 뒤 냉정하게 외면했다. 1991년 미국은 사담 후세인 정권 타도를 위해 이라크 쿠르드족의 내부 봉기를 촉구했다. 쿠르드족이 호응해 무장 투쟁에 나섰지만, 미국은 군사 지원을 하지 않았다. 2010년대 이슬람국가(IS)가 중동에서 맹위를 떨치자 쿠르드족은 미국과 서방을 도와 IS 격퇴에 앞장섰다. 그러나 2019년 트럼프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시리아 철군을 선언했고, 미국 묵인 아래 튀르키예의 공습은 받은 쿠르드족은 큰 피해를 봤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7일(현지시간) 대이란 군사작전에 쿠르드족 개입을 원하지 않는다며 찬성 입장에서 선회했다. 쿠르드족이 참전하면 이란전은 공습이 아닌 지상전 양상으로 치닫게 되고, 전선이 중동 전체로 확장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미국이 남의 힘을 빌려 적을 제거하는 ‘차도살인’(借刀殺人) 전략을 접은 것은 다행이다. 용맹한 쿠르드족이 다른 나라 전쟁에 자꾸 휘말리는 모습이 안타깝다. ‘산 말고는 친구가 없다’는 쿠르드의 오래된 격언이 비애를 느끼게 한다. ‘나라 없는 민족’의 설움과 박해로 점철된 이들의 기구한 운명은 언제 끝날까. 김상훈 논설위원 neato@busan.com

김상훈 논설위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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