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시장, 봉지면 삼킨 용기면 [비즈앤피플]

입력 : 2026-07-12 08: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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컵라면 5년새 30% ‘가속 성장’
봉지라면 2023년부터 ‘제자리’
마트→편의점 유통 채널 변화
1인 가구 설거지 없는 삶 실현
업계도 신제품 ‘용기면 선출시’

시장 성장세가 꺾이고 있는 봉지라면. 유승호 기자 peter90@ 시장 성장세가 꺾이고 있는 봉지라면. 유승호 기자 peter90@
인구 구조와 유통 패러다임 변화로 성장 중인 컵라면(용기면). 유승호 기자 peter90@ 인구 구조와 유통 패러다임 변화로 성장 중인 컵라면(용기면). 유승호 기자 peter90@

한국 라면 시장의 중심축이 ‘봉지’에서 ‘용기’로 이동하고 있다. 국내 라면 시장이 약 3조 원 규모로 추산되는 가운데 컵라면(용기면)의 성장세가 봉지라면을 압도하며 시장의 명실상부한 주연으로 우뚝 섰다. 단기간의 유행을 넘어 한국 사회의 인구 구조 변화와 유통 패러다임의 전환이 맞물린 결과다.

9일 시장조사기관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국내 인스턴트 라면 시장 규모는 3조 544억 원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국내 컵라면 시장 규모는 1조 668억 원으로 전년 대비 1.5% 신장했다. 2020년 8000억 원대였던 시장이 5년 새 약 30% 성장한 셈이다. 유로모니터는 이 시장 규모가 2030년 1조 1300억 원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반면 지난해 봉지라면 시장은 전년 대비 0.3% 신장한 1조 9876억 원으로 집계됐다. 봉지라면 시장은 2023년부터 지난해까지 1조 9000억 원대에 머무르고 있다. 유로모니터는 봉지라면 시장의 성장세가 꺾여 2030년 1조 8000억 원대로 내려앉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컵라면 시장이 우상향 곡선을 그리는 가장 밑바탕에는 가파른 ‘인구 구조의 변화’가 자리 잡고 있다.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지난해 1인 가구는 804만 5000 가구로 사상 첫 800만 명을 넘어섰다. 전체 가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6.1%로 40% 고지를 향해 가고 있다.

1인 가구의 식문화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단연 ‘간편성’과 ‘효율성’이다. 봉지라면을 먹기 위해서는 냄비, 가스레인지나 인덕션, 앞접시 등 조리 도구가 필수적이며 식후에는 반드시 설거지라는 노동이 뒤따른다. 반면 컵라면은 뜨거운 물을 붓고 젓가락만 있으면 조리가 끝날 뿐만 아니라, 용기째 쓰레기통에 버리면 된다. 최근 배달 음식과 가정간편식(HMR)에 익숙해진 1인 가구 중에는 아예 집에 조리 기구를 제대로 갖추지 않는 경우가 많아 컵라면은 이들의 ‘설거지 없는 삶’을 실현해 주는 완벽한 대안이 됐다는 분석이다.

여기에 수 년째 이어지고 있는 고물가 기조와 런치플레이션(점심+인플레이션) 역시 컵라면 성장에 불을 붙였다. 서울 시내 주요 직장인 밀집 지역의 평균 외식 가격이 만 원 안팎을 기록하면서 직장인과 학생들에게 편의점에서 1000~2000원대로 해결할 수 있는 컵라면은 훌륭한 경제적 대체재가 됐다는 평가다.

소비자들의 컵라면에 대한 인식이 간식에서 ‘확실한 한 끼 식사’로 바뀐 점도 주목할 만하다. 제조사들이 기존 용량의 한계를 극복한 대용량 컵라면과 빅사이즈 제품들을 잇달아 쏟아내면서 컵라면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포만감을 느낄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전자레인지 겸용 용기의 대중화도 컵라면 성장을 가속화시켰다. 컵라면의 치명적인 약점인 ‘봉지라면보다 면발이 덜 익고 국물 맛이 겉돈다’는 문제를 해결한 일등 공신으로 꼽힌다.

마이크로파가 용기를 통과해 면과 국물을 동시에 가열하는 이 조리 방식은 섭씨 100도 이상에서 면을 펄펄 끓이는 효과를 내 봉지라면 특유의 쫄깃한 면발과 깊고 진한 국물 맛을 그대로 재현했다. 편의점마다 전자레인지가 있는 만큼 소비자들은 집 밖에서도 높은 퀄리티의 라면을 맛볼 수 있게 된 셈이다.

더불어 건면을 활용한 저칼로리 제품, 영양 성분을 강화한 프리미엄 라인업이 확충되면서 과거 건강을 이유로 컵라면을 외면하던 중장년층과 건강 지향형 소비자들까지 새로운 고객으로 빠르게 흡수되고 있다.

오프라인 유통 채널의 중심이 대형마트에서 편의점으로 이동한 점도 호재다. 뛰어난 접근성과 취식 인프라를 갖춘 편의점은 컵라면의 거대한 실험실이자 소비 허브가 됐다. 편의점업계에 따르면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봉지라면 매출 비중은 8대 2 수준이다.

특히 1020세대를 중심으로 편의점 내에서 컵라면에 삼각김밥, 스트링 치즈, 핫바 등을 조합해 자신만의 레시피를 만드는 모디슈머(Modisumer) 트렌드가 확고한 놀이 문화로 정착하면서 연쇄적인 소비를 유도하고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컵라면 성장세에 국내 주요 라면 제조사들의 마케팅과 신제품 출시 전략도 완전히 뒤집혔다.

과거에는 봉지라면을 먼저 출시해 메가 히트를 기록하면 이를 컵라면으로 축소 출시하는 것이 정석이었으나 이제는 트렌드에 민감한 젊은 층의 반응을 빠르게 살피기 위해 ‘용기면 선출시’를 선택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용기면에서 먼저 대박이 난 뒤 역으로 봉지라면이 출시되는 구조적 역전 현상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이유다.

농심은 올해 신라면 로제 컵라면을 봉지면보다 한 달 먼저 출시했다. 이에 앞서 올해 1월에는 라볶이에 너구리의 얼큰하고 시원한 해물맛을 결합한 라뽁구리를 컵라면 전용으로 내놨다.

오뚜기는 ‘진라면 약간매운맛’을 최근 대형과 작은 컵 두 가지 규격의 용기면으로 전격 출시했다. 이로써 오뚜기는 진라면 순한맛, 매운맛에 이어 약간매운맛까지 컵라면 라인업의 ‘삼총사 체제’를 최종 완성했다.

삼양식품은 메가 히트작 불닭볶음면 시리즈의 수많은 파생 신제품과 이색 콜라보 제품을 기획할 때 편의점 접근성이 높은 컵라면 형태를 최우선으로 내세우며 볶음 컵라면 문화를 주도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국내 컵라면 시장의 전망을 매우 밝게 보고 있다. 사회적 구조 변화와 소비자의 라이프스타일 지향점이 변하지 않는 한 컵라면의 독주는 계속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1인 가구 비율이 2030년까지 36~39%대 수준을 유지할 전망이고, HMR과 편의점 채널 확대가 수요를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인구 고령화 역시 가속화되면서 불이나 인덕션을 켜고 복잡하게 조리해야 하는 봉지라면보다 안전하고 간편하게 전기포트나 전자레인지로 끝낼 수 있는 용기면을 찾는 시니어 가구의 유입도 무시할 수 없는 성장 동력으로 꼽힌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현재의 컵라면은 단순히 봉지라면의 대용품이 아니라 한국의 주거 형태, 경기 흐름, 편의점이라는 독특한 공간 문화가 결합해 만들어낸 독자적인 식문화 카테고리”라며 “제조사들이 다양한 제품들을 지속해서 쏟아내고 있는 만큼 컵라면이 전체 라면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지속적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말했다.

유승호 기자 peter90@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