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상지건축 본사에서 <부산일보>와 인터뷰를 가진 오철호(왼쪽) 대표이사 회장과 허동윤 전임 회장이 손을 맞잡고 신구(新舊)의 조화로운 동행을 약속하며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상지건축 제공
부산 건축계에서 보기 드문 승계 장면이 펼쳐졌다. 1대 창업주가 세운 회사를 2대가 이어받고, 다시 3대가 물려받는 과정이 혈연이 아니라 회사 내부의 실력과 신뢰를 바탕으로 이뤄진 것이다. 지난달 24일 (주)상지건축이 허동윤 회장에서 오철호 대표이사 회장으로 경영의 바통을 넘기며 지역 산업계에 조용하지만 묵직한 울림을 남겼다. 이취임식은 오는 24일 열린다.
허 회장은 10년 전인 2016년 8월 선대 김동회 창업주로부터 회사를 넘겨받아 2대 회장이 됐고, 이번에는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춰온 오 회장에게 ‘총괄’하는 회장 자리를 넘겼다. 허 회장은 (주)상지엔지니어링건축사사무소 대표이사로 남는다. 1974년 창립 이후 이어진 상지건축의 승계는 흔히 말하는 세습과는 거리가 멀다. 혈연보다 내부 검증, 직함보다 실적, 관계보다 역할이 앞선 구조였다.
오 회장은 1999년 상지건축에 합류했다. 서울대에서 수학하고, 건설업계 경력을 쌓은 뒤 부산으로 온 그는, 외부에서 들어온 엘리트라기보다 회사 안에서 신뢰를 쌓아온 실무형 리더에 가까웠다. 당시 허동윤 전무가 직접 그를 불러들였고, 잠시 함께 프로젝트를 해 본 뒤 “손발을 맞춰 보자”는 말이 입사의 계기가 됐다.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한 선후배나 임원 사이를 넘어섰다. 허 회장은 주로 바깥을 맡고 오 회장은 안을 지키는 ‘투 톱’ 체제가 오래 유지됐고, 서로에 대한 신뢰는 회사의 성장과 함께 더 단단해졌다. 허 회장이 “오 회장만큼 회사의 내실과 실력을 다질 사람은 없다”고 했고, 오 회장 역시 “허 회장이 외부 지원 역할을 해 주는 것이 회사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답했다.
이번 승계가 더 의미 있는 것은, 허 회장이 “학연·지연·혈연에 의존하지 않고 사내 구성원 가운데 다음 회장을 세우는 전통”이야말로 상지의 힘이라고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방식이 직원들에게도 “나도 열심히 하면 회장이 될 수 있다”는 동기를 준다고 봤다. 그는 자신이 오래 자리를 지켜왔고, 이제는 “박수 칠 때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반면 오 회장은 이번 자리를 당연한 보상으로 받아들이기보다, 회사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서는 시점에 맡게 된 책임으로 받아들였다. 건축 시장의 환경이 급변하고, 기술과 제도, 시장 패러다임이 모두 바뀌는 상황에서 그는 상지의 전통 위에 새로운 시스템과 미래 전략을 얹어야 한다는 과제를 짊어졌다. 기술자 중심 회사의 장점을 살리면서도, 경영 구조와 의사결정 체계를 현실에 맞게 손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기업 환경”을 만들겠다고 밝히며, 투자나 M&A 같은 확장 가능성도 열어 두었다.
상지건축의 이력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지역성과 공공성이다. 부산항 북항2단계 재개발 사업화 전략 아이디어 개념구상 국제공모, 금샘도서관, 구덕전통문화체험관, 부산영화체험박물관, UN평화기념관, 문화콘텐츠콤플렉스, 부산시 들락날락 기본 조사와 용역 같은 프로젝트는 회사가 부산을 넘어 도시의 표정을 바꾸는 데 기여해 왔음을 보여준다.
상지건축은 또 종합 건축사사무소로서의 역량뿐 아니라 임직원과 시민을 위한 ‘상지인문학아카데미’와 ‘열린부산·도시건축포럼’ 등을 운영하고, 건축 전문 인문 무크지인 <아크(ARCH)>를 발간하는 등 건축 문화 저변 확대에 힘쓰고 있다.
오 회장은 상지가 ‘인간의 삶을 담는 건축’을 지향해 왔다며, 인문학적 토양과 디자인 철학이 회사의 근간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13일 상지건축 본사에서 <부산일보>와 인터뷰를 가진 오철호(왼쪽) 대표이사 회장과 허동윤 회장이 나란히 서서 기업의 빛나는 전통을 계승하고, 새로운 도약을 다짐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은영 기자 key66@
결국 상지건축의 이번 승계는 단순한 경영 뉴스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적 장면으로 읽힌다. 창업주의 철학은 권력의 대물림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키우는 방식으로 이어졌고, 2대 회장은 이를 실무와 조직 운영으로 증명했으며, 3대 회장은 그것을 미래형 시스템으로 바꾸려 한다.
부산 지역 경제계에서 상지건축의 사례가 유난히 긍정적으로 읽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업의 다음 세대를 세우는 방식 자체가 조직의 품격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허 회장은 후임 오 회장에게 마지막 당부도 남겼다. “회장이 해야 할 중요한 덕목은 회사를 잘 이끄는 것만이 아니라, 다음 회장을 잘 ‘점지’하는 일입니다.” 상지건축의 다음 10년은, 바로 그 문장을 어떻게 현실로 증명하느냐에 달려 있다.
김은영 기자 key66@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