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곧 삶이다. 갈림길이라는 선택의 기로에서 우리는 포기를 배우고 또한 이별을 한다. 길이 막다르면 누군가는 좌절을 하고 누군가는 다시 힘을 내 새 길을 찾는다. 그렇듯 삶은 늘 길 위에 있다. 길이 모이는 곳에 사람이 모이고 우리의 삶은 새로운 등장인물과 함께 새로운 막(幕)을 올린다. 그리고 그렇게 모인 저마다의 삶들이 한 잔 술에 한데 어우러지는 무대를 일러 우리네 조상들은 '주막(酒幕)'이라 불렀다.
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에 100년이 넘도록 여전히 길손을 맞고 있는 주막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요즘 들어 사는 것이 여간 애가 쓰이는 것이 아닌지라 이참에 100년 전통의 '삼강주막'에 들러 막걸리 한 사발을 걸치며 사는 이야기나 나누고자 먼 길을 나섰다.
낙동강 오르던 소금배 … 과거 보러 가던 선비 …
길이 모이고 물이 만나던 곳 100년 酒幕이 그곳에 있더라
삼강주막의 '삼강(三江)'은 글자 그대로 세 개의 물줄기가 모이는 곳을 이른다. 강원도 황지에서 발원하는 낙동강과 경북 봉화로부터 흘러오는 내성천, 문경의 금천이 이곳에서 한 줄기로 만난다. 옛날 이 삼강나루터(지금은 사라졌지만)는 경남 김해에서 올라오는 소금배가 경북 안동 하회마을까지 가는 길목이었고, 과거 길에 나선 선비들이 문경새재를 지나 한양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었다.
추풍령과 죽령 길도 있지 않느냐고?
"옛말에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들이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낙방하고, 죽령을 넘으면 시험을 죽 쑨다고 했재. 그래서 다들 일부러라도 문경새재를 넘었다 아이가."
삼강마을 정재윤(60) 이장의 설명이다. 제법 그럴싸하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주막이 서는 것은 당연지사. 1900년 무렵 지어진 삼강주막은 주막의 마지막 주모였던 故 유옥년 '할매'께서 지난 2005년 90세의 일기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영업을 했다. 이후 주막은 2년여의 짧은 '임시휴업' 기간을 가졌고, 지난해 경북도청과 지역민들이 합심해 다시 문을 열었다. 현재 이곳은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경영하고 있다.
새롭게 문을 열면서 주막의 본채도 조금 손을 봤다. 가장 큰 변화는 기존의 슬레이트 지붕을 예전 초가지붕으로 고쳤다는 것. 그러나 지붕을 제외한 본채의 몸뚱이는 최대한 현상 그대로 보존했다.
그러다 보니 좁은 부엌에 들어가면 당시 유옥년 할매의 손길이 그대로 느껴진다. 글을 몰랐던 할매는 불쏘시개로 부엌 벽에 비스듬히 선을 그어 외상값을 표기했다고 하는데, 그런 할매의 외상장부가 기록된 벽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당시는 농사를 천하의 대본(大本)으로 삼던 시절인지라 봄 보릿고개에 마신 술값을 가을 추수 후에나 갚는 '가내기'가 흔했다고.
"생전에 몰래 술을 마시고 내빼려고 해도 할매가 귀신같이 알고 외상장부에 표시를 하데." 정재윤 이장은 "글을 몰라도 기억력만큼은 누구한테도 뒤지질 않았다"고 당시 할매를 회상했다.
삼강주막의 본채는 건축사적으로도 가치가 있다. 두 개의 방은 각 방마다 문이 셋씩 달렸고, 부엌은 드나드는 문만 무려 넷이다. 손님이 아무렇게나 드나들 수 있게 하기 위해, 그리고 어느 곳으로도 쉽게 술상을 내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든 우리네 전통 술집의 구조를 보여준다.
금강산도 식후경. 주막에 왔으면 술상을 받아야지, 설(說)만 풀다 갈 수 있나?
막걸리 한 주전자와 배추전, 도토리묵, 두부를 합해 '한 상'이라는 이름으로 차려졌다. 요즘 음식점에서 흔히들 말하는 '세트'다. 1만2천원. 어지간한 장부 두 사람이서 다 마시지 못할 정도로 막걸리가 주전자 한가득이다.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막걸리 한 사발 들이켜니 세상사 시름은 옅어지고 괜스레 호기마저 돈다. "에라이, 신선이 뭐 별거냐?"
막걸리로 배를 채우고 인근의 회룡포로 향했다. 회룡포는 내성천이 350도 휘감아 돌며 모래사장을 만들고 그 속으로 마을이 섬처럼 떠 있는 곳. 최근 국토해양부와 한국하천협회가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하천 100선'에서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회룡포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인근 전망대로 올라가야 한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회룡포의 물줄기는 태극무늬를 연상케 했다. 최근 가뭄으로 물이 많이 줄어든 것이 조금 아쉽다.
회룡포 물줄기를 가로지르는 '뿅뿅 다리'도 한 번 건너보자. 건축공사장에서 흔히 쓰는 구멍이 뚫린 비계용 철판으로 만들어졌다. '뿅뿅 다리'라는 이름의 어원은 철판 사이로 구멍이 '뿅뿅' 뚫려서라고도 하고, 다리를 건널 때마다 '뿅뿅' 소리가 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정확히는 알 수가 없다. 이름 지어진 연유야 어쨌든 옛 느낌이 물씬 풍기는 다리 위에 서면 시간이 족히 20년은 거슬러 올라가는 느낌이다.
예천에서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곳이 바로 용문사. 바로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불교 문화유산인 윤장대가 있는 곳이다. 불경을 보관하는 일종의 서고인 윤장대는 커다란 팽이 모양을 하고 있어 사람이 돌릴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이것을 돌리면 불경을 읽는 것과 같은 공덕을 쌓을 수 있다는데…. 아쉽게도 음력 3월 3일과 9월 9일에만 돌릴 수 있도록 했다니 그저 눈구경만 할 뿐이었다. 그래도 굳이 한 번 돌려보고 싶다면 용문사 유물전시관에 실물 크기로 만들어진 모형 윤장대를 돌려보면 된다. 공덕이 쌓일지는 미지수.
용문사까지 갔다면 고속도로로 빠져나오는 길에 석송령에 잠시 들러보자. 천향리 석평마을 마을회관 앞에 떡하니 서 있는 이 소나무는 특이하게도 제 이름으로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땅부자 나무. 1920년대 마을 주민이었던 이수목(李秀睦)이라는 사람이 '석송령'이란 이름을 지어주고, 심지어 그의 소유토지 6천600㎡를 유산으로 남겼다고 한다. 땅을 소유하고 있다 보니 당연 세금도 낸다. 탈세의 우려조차 없으니 모범납세자다. 지난해 조금이라도 세금을 깎으려 하신 분들이라면 나무 앞에서 잠시 반성하고 돌아오시길.
글=김종열 기자 bell10@busan.com 사진=김병집 기자 bj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