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는 올해 넷플릭스에서 글로벌 비영어권 콘텐츠 순위에서 4위를 기록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공개 3주 차에 글로벌 비영어 부문 1위를 차지했고, 42개국에서 TOP 10에 진입하며 6개국에선 1위를 기록했다. 특히 지금까지 넷플릭스 인기 시리즈는 2030세대가 주요 시청자였던 것에 반해 이 드라마는 2030뿐만 아니라 4050세대까지 큰 사랑을 받아 ‘국민드라마’라고 불리기도 했다.
넷플릭스는 ‘폭싹 속았수다’의 인기에 보답하기 위해 지난 3월 말 팬들과 ‘잘도! 폭싹 속았수다 금은동 마을잔치' 행사를 열었다. 시청자 백일장 대회와 출연 배우들과의 만남, 실제 제주 할망이 드라마를 보고 그린 그림도 전시했다. 주인공 아이유와 박보검은 현장에서 그림을 본 후 정식 전시회를 열면 꼭 가겠다는 약속을 했고, 실제로 제주 작은 마을 선흘리에서 열린 전시회에 참석해 화제가 되었다.
<살다 살다 봄이 된 것은>은 아이유가 응원했던 그 전시 ‘폭싹 속았수다, 똘도, 어멍도, 할망도’에 전시된 제주 조천읍 선흘리 할머니들의 그림과 시, 그들을 지도했던 최소연 예술감독의 사연을 담은 책이다.
미술작가이자 공동체와 예술을 잇는 활동을 해온 최소연 예술감독은 2021년 제주 선흘마을로 이사온다. 마을을 산책하던 중 할망들의 창고를 보게 되는데, 밭을 일구는 온갖 도구가 진열된 그 공간이 마치 예술가의 작업실처럼 느껴졌다. 거기서 영감을 받은 최 감독은 마을 창고에서 대안학교 학생들의 미술 수업을 시작했다.
그날은 홍태옥 삼춘(제주 방언으로 어르신을 뜻하는 말)의 창고에서 수업을 진행하는데, 삼촌이 미술 도구인 목탄을 가리키며 “무시기(이게 뭐야)?”라고 물었다. 최 감독이 도구를 설명해 주자 삼춘은 “나도 기려보까(그려볼까)”라더니 이후 그림 수업의 학생이 된다. 최 감독과 홍태옥 삼촌의 일대일 그림 야학은 순조롭게 이어졌고, <37년생 홍태옥>이라는 그림책까지 탄생한다. 책을 본 후 선흘마을 다른 할망들도 그림 수업에 관심을 가졌고 2022년부터 할망은 인생 처음으로 각자의 화실(창고)를 마련한다.
그렇게 2022년부터 할망들은 꾸준히 그림을 그렸고, 매해 전시를 열었다. ‘폭싹 속았수다’의 애순이 삶보다 더 눈물 나고 고달팠던 ‘찐 애순이’ 선흘마을 할망의 그림은 많은 이들을 감동하게 했다. 우연히 전시회를 보러 왔던 관객들이 도슨트를 자처해 전시장을 지켜주기도 했고, 외국에서 제주로 여행 온 교포 커플은 엄마 생각이 나는 그림을 사기도 했다. 자신의 그림이 비행기 타고 미국으로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림을 그린 할망은 마치 자신이 외국 여행을 가는 것처럼 기뻐한다.
책에는 9명의 할망이 그린 그림과 시가 가득하다. 사실 할망은 그림을 배운 적도 없고, 그림 수업을 진행한 최 감독도 할망에게 그림 그리는 방법을 가르친 건 아니다. 그저 누구나 그림을 그릴 수 있고, 모든 그림은 아름답다는 응원과 칭찬을 했을 뿐이다.
평생 밭을 일구거나 물질하던 거친 손으로 그린 그림들은 대부분 삐뚤빼뚤하고 제주 방언을 그대로 쓴 시는 문법이나 문장 구성이 어색하기도 하다. 그러나 색채의 마술사, 마티스보다 강한 색감과 아이같이 순수한 그림에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매력이 넘친다.
할망의 그림과 시에는 삶은 살아가는 게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라는 메시지가 강하다. 강희선 삼춘의 그림은 물 밖으로 나온 해녀가 정면을 응시한 채로 숨을 헐떡이고 있다. 그 옆에는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의지하는 부표, 붉은 테왁이 떠 있다. 그림 속 바다에는 삼촌이 직접 쓴 시가 있다. ‘물에 들어갈땐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숨이 또깍 또까/숨차도 자식 공부시키려고’. 자식 공부시키기 위해 물 아래에서 숨을 참으며 ‘이어도사나’ 노동요를 생각하는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푸른 치마를 입은 임신한 여자가 평상에 앉아 바구니 속 음식을 열심히 먹고 있는 그림에 ‘학교 못 다녀도, 아기만 이시면(있으면) 살주’라는 문장이 있다. 김인자 삼춘의 이 그림에는 어떻게든 아이를 먹여 살리겠다는 엄마의 지극한 사랑이 느껴진다. 다른 할망의 그림에는 소녀 시절 모습을 표현하거나 하고 싶었던 걸 포기해야 했던 마음이 드러난다. 할망의 그림을 보면 감수성이 살아난다.
책에서 만나는 제주 할망의 그림과 시는 삶의 고단함에 지친 이들에게 전하는 따뜻한 응원으로 다가온다. 최소연 지음·제주 그림할망 그림/김영사/172쪽/1만 6800원.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