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서사는 반갑습니다. 배우 염혜란은 ‘시민덕희’ 개봉을 앞두고 언론과 인터뷰에서 “여자들이 하나로 뭉치면 뭐든 잘한다”고 했는데요. 이 말대로 극 중 4인조 여성 주조연이 의기투합해 범죄 조직에 맞서는 스토리 자체는 흥미롭습니다. ‘남탕’이라는 지적을 받아온 한국 영화계에 필요했던 내러티브입니다. 다만 여성 캐릭터들을 잘 살렸는지는 의문입니다. 장윤주는 너무나 전형적인 개그 캐릭터로 소모됐고, 안은진의 역할도 중국 현지 가이드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여성 경찰 3인조가 팀을 이뤄 범인을 잡는 ‘걸캅스’와 이미지가 겹치기도 합니다. 여성 캐릭터 비중으로 점수를 매기는 ‘벡델 테스트’야 통과하겠지만, 차별성에 대해선 좀 더 고민이 필요해 보입니다. 영화를 이끌어 가는 건 역시 라미란의 명연기입니다. 자연스러운 생활 연기가 일품이고, 염혜란과의 호흡이 돋보입니다. 가족을 위해 한없이 강해지는 엄마, 경찰의 무능에 분노하는 피해자, 범죄에 맞서는 정의로운 소시민 등 여러 면모를 소화해 입체적인 캐릭터를 탄생시켰습니다. 다만 일각에선 이미지가 너무 고착화되는 것 아니냐는 평가도 나옵니다. ‘시민덕희’의 모티프가 된 실화 사건은 영화 못지않게 극적입니다. 2016년 보이스피싱에 속아 목돈을 넘겨준 경기 화성시 주민 김 모 씨. 그는 이후 자신에게 자수한 범인의 구체적인 제보를 통해 조직을 일망타진할 수 있는 단서들을 확보했습니다. 김 씨는 이 단서를 경찰에 넘겼지만 담당 경찰관들은 시큰둥, 되레 김 씨를 비웃었습니다. 김 씨는 무능한 경찰에 의지할 게 아니라 직접 나서야겠다고 판단, 조직원을 설득해 수십 통의 전화와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총책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와 피해자들의 명부까지 입수했습니다. 이 단서 덕분에 총책은 닷새 만에 검거됐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숟가락만 얹고도 감사 인사는커녕 시치미를 뚝 뗐습니다. 부끄러운 줄은 알았는지, 김 씨의 활약은 쏙 빼놓고 경찰의 적극 수사로 검거에 성공한 것처럼 보도자료를 뿌렸습니다. 심지어 총책을 검거했다는 사실을 김 씨에게 알려주지도 않았습니다. 보이스피싱 검거에 기여한 시민에게 주겠다고 홍보했던 보상금 1억 원도 지급하지 않았습니다. 총책은 징역 3년을 선고 받았지만 김 씨는 끝까지 제대로 된 보상도 감사 인사도 받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분통 터지는 사건이지만, 영화에서는 경찰이 늦게나마 제 역할을 합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미화’라는 지적이 나오기도 합니다. 영화의 메시지는 훌륭합니다. 지난 24일 부산지방법원 동부지원 박주영 판사는 ‘전세사기’ 사건 피고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하며 피해자들을 위로해 화제가 됐는데요. 당시 박 판사는 피해자들에게 “절대로 자신을 원망하거나 자책하지 말아 달라”면서 “탐욕을 적절히 제어 못 하는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이 여러분 같은 피해자를 만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여러분 결코 무언가 부족해서 피해 본 건 아니란 걸 기억해 달라”고 당부했습니다. ‘시민덕희’ 역시 보이스피싱 피해자들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점을 러닝타임 내내 강조합니다. 연출을 맡은 박영주 감독은 지난 11일 시사회에서 “보이스피싱 피해자들이 ‘내가 어리석은 탓에 당했다’고 자책하는 게 가장 안타까웠다”며 “피해자가 자존감을 회복하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그려보려고 했다”고 설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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