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의 섬세함을 설명할 만한 적절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웰스 감독만의 서정적이고 감각적인 연출은 실로 독창적입니다. 영화 속 소피와 캘럼의 유대 관계는 두터우면서도 복잡합니다. 여행사의 실수 탓에 숙소에 침대는 하나뿐이지만 소피는 개의치 않습니다. 말없이 지루하게 시간을 보내기도 하지만, 침묵도 어색하지 않은 편안한 사이입니다. 그러나 둘은 때때로 사소한 이유로 서로의 신경을 건드리고 감정이 상해 어긋납니다. 미세하고 빠르게 감정이 변하지만, 둘의 유대감은 커집니다. 이 사소함을 세심한 촬영과 연출기법을 통해 영화로 묘사한 것이 웰스 감독의 위대한 업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독특하고 신선한 연출 기법도 인상적입니다. 영화는 마냥 플래시백(과거 회상)으로 구성된 것이 아닙니다. 비현실적인 조명이 번쩍이는 클럽에서 춤을 추는 캘럼의 모습이 맥락 없이 등장하곤 합니다. 혹자는 이 끔찍하고 기괴해 보이는 환상을 꿈이라고 해석하지만, 그보다는 20년이 지나 애인과 아기도 있는 서른 살 소피가 기억의 파편을 수집해 재구성한 아빠의 자아로 풀이됩니다.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환상 속 소피와 캘럼의 모습이 영화의 핵심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선곡 역시 훌륭합니다. 특히 종반부에 삽입된 노래는 너무나 유명하고 익숙한 명곡인데도 가사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놀라운 호소력을 선보입니다. 영화가 끝난 뒤 극장에서 차마 못 먹었던 간식과 함께 노래를 감상하니 여운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노래를 들으며 다른 관객들이 쓴 실관람평을 살펴보니 아쉽다는 반응도 꽤 있습니다. 특별한 감동이나 직접적인 메시지를 기대한 관객에게는 다소 밋밋하거나 친절하지 않다고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 상업영화의 빠른 호흡을 선호한다면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뭘 이야기하려는 건지 모르겠다”는 반응에 공감하는 관객이 적지는 않습니다.
사실 애프터썬은 무척 사적인 영화입니다. 소피처럼 비교적 젊은 부모를 뒀던 웰스 감독이 어렸을 때 아빠와 함께 튀르키예에서 보냈던 휴가를 떠올리며 만든 자전적인 작품입니다. 그래서 관객 각자의 경험과 기억에 따라 감상 포인트가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유년 시절 소피와 조금이라도 비슷한 지점이 있었던 사람이라면 크게 와닿는 지점이 있을 겁니다. 햇볕에 탄 피부를 진정시키는 크림인 ‘애프터썬’처럼,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따끔한 상처를 치유하는 영화가 될 수 있습니다.
웰스 감독은 “저는 영화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말하고 싶진 않다”며 “인내심과 열린 마음을 갖고 영화를 경험하는 것이 가장 좋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기억은 까다로운 것이다. 디테일은 흐릿하고 변덕스럽다. 기억하려 애쓸수록 더 적게 보인다”며 “튀르키예어인 ‘hasret’은 그리움, 사랑, 상실의 조합을 뜻한다. 이 영화의 맥락에 특히 적절한 것 같다”고 설명합니다.
영화는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돼 프렌치터치상을 수상한 것을 시작으로 호평 세례를 받았습니다. 지난해 영국 가디언지를 비롯해 인디와이어, 메타크리틱 등 6개 해외 매체와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올해 최고의 영화’로 꼽았습니다. 뉴욕타임즈(NYT)는 올해 최고의 영화 2위로 선정했고, 제22회 영국독립영화상에선 7개 부문에서 수상했습니다.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당시 월드시네마에 초청돼 관객의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배우들의 호연 역시 세계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800대 1의 경쟁을 뚫고 소피 역을 맡은 천재 신인배우 프랭키 코리오는 주요 외신으로부터 극찬을 받았고, 캘럼을 연기한 스물일곱 살의 폴 메스칼은 생애 처음으로 오스카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전 세계 영화계의 관심이 쏠린 명작인데, 정작 상영관은 많지 않습니다. 그린나래미디어에 따르면 부산 소재 대형 멀티플렉스 중 개봉 첫 주에 애프터썬을 상영한 곳은 CGV서면점, 롯데시네마 센텀시티점이 전부입니다. 그 밖엔 영화의 전당, 부산 모퉁이극장, 오르페오 해운대 등에서 애프터썬을 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