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소희’는 콜센터로 현장실습을 나간 특성화고 학생 소희(김시은 분)의 죽음과 이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 유진(배두나 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2016년 전북 전주에서 발생한 실제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특성화고 애견미용학과 학생인 소희는 “어렵게 뚫은 대기업”이라는 담임교사의 말에 콜센터 실습생으로 일하기 시작합니다. 평소 할 말은 하는 당당한 성격인 소희의 불행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첫 실습부터 고객의 폭언이 쏟아지고, 쾌활하던 고등학생 소희의 눈에는 눈물이 팽 돕니다.
소희가 맡은 ‘방어팀’은 해지·해약을 요구하는 통신사 고객을 회유하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애초에 해지하려고 전화했는데 해지를 못하도록 시간을 끄니 짜증 섞인 반응이 돌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온갖 욕설을 퍼붓는 안하무인, 성희롱하는 변태까지 상대하면서 소희는 점점 지쳐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희는 ‘죄송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녀야 합니다. 고객이라는 이름으로 갑질을 일삼는 민원인, 직장 상사와 동료, 특성화고 담임교사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는 처지가 됩니다.
그러나 고강도 감정 노동의 대가는 최저임금에도 한참 못 미치는 월급입니다. 실적이 낮다, 아직 실습생이지 않느냐 등 온갖 핑계를 대더니 약속한 인센티브 지급도 미룹니다.
압박과 책임감에 시달려 일을 그만두지도 못하던 소희는 결국 극단적 선택으로 목숨을 끊고, 강력계 형사 유진은 사건을 수사하면서 한국 사회의 썩어빠진 폐단을 목도합니다.
보기만 해도 우울해지는 줄거리지만, 모두 현실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2016년 당시 콜센터에서 일하던 고(故) 홍수현 양은 전주의 한 저수지에서 숨진 채 발견됐고, 고용노동부 조사에서 회사의 위법행위가 적발됐습니다. 수시로 야근을 하던 수현 양은 생전 부모에게 ‘나 오늘도 콜 수 못 채웠어’라고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등 어려움을 호소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실화 바탕의 사회 고발성 영화지만 뻔한 신파를 배제하려 노력했습니다. 2014년 ‘도희야’ 이후 9년 만에 두 번째 장편을 연출한 정주리 감독의 많은 고민이 담겼습니다.
두 주연배우의 호연도 돋보입니다. 배두나는 겉보기엔 차갑지만 심장은 뜨거운 형사 캐릭터를 자연스럽게 소화해 24년 차 배우의 노련함을 보여줬습니다. 감정 변화 폭이 큰 캐릭터인 소희 역을 맡은 김시은도 이번이 첫 장편 데뷔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칩니다.
영화는 해외에서 먼저 호평을 받았습니다. 제75회 칸영화제(Cannes Film Festival)에서 비평가주간 폐막작으로 선정돼 “충격적이면서도 눈을 뗄 수 없는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캐나다 판타지아 국제영화제에선 감독상·아시아 영화 부문 관객상, 도쿄필맥스영화제에선 특별심사위원상을 받았습니다. 이 밖에도 제12회 암스테르담영화제,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등 10여 개 국제영화제에 초청돼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지난 8일 국내에서 개봉한 뒤에도 영화 팬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모순적인 사회 구조를 잘 꼬집어냈다는 평가와 함께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는 후기가 많습니다. ‘현실이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공분을 이끌어내는 데에도 어느 정도 성공했습니다.
‘다음 소희’에는 여러 형태의 하청업체 노동자와 비정규직도 등장합니다. 그래서인지 실제로 일어났던 다른 사건들도 떠오릅니다. 영화는 7년 전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데, 엇비슷한 사건들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습니다. 동료가 숨진 현장에서 곧바로 일하도록 한 제빵공장, 위험한 환경에서 일하던 코레일 직원이 결국 열차에 치여 사망한 사건…영화 곳곳에서 기시감이 듭니다.
영화는 현실이 달라지지 않는 이유도 조명합니다. “힘든 일을 하면 존중받아야 하는데, 그럴수록 더 무시해.” 가상의 인물인 형사 유진의 입에서 나오는 주옥 같은 대사들은 정주리 감독이 관객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입니다. 유진이 수사를 하며 만난 못난 어른들은 하나같이 책임을 회피합니다. 어린 학생이 죽었는데 ‘잘못했다’고 사과하는 어른은 한 명도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소희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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