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조위의 누아르 첩보물.’ 지난 26일 국내 개봉한 청얼 감독 작품 ‘무명’의 가장 큰 매력입니다. ‘무명’의 시대적 배경은 중일전쟁입니다.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고 상하이를 점령한 1941년, 상하이에서 결성된 비밀 결사는 일본 조직에 첩보원들을 심어놓습니다. 그러나 적과 아군을 구분할 수 없는 혼란이 이어지고, 이름 없는 스파이들의 암투가 벌어집니다. 영화는 중일전쟁 역사를 알고 보는게 좋습니다. 1937년 일본의 침략으로 시작된 중일전쟁 당시 중국은 격동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사실상 중국 대륙을 장악했던 장제스의 국민당은 1927년부터 공산당 토벌에 나섰고, 공산당은 격렬히 저항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이 중국 땅을 넘보자 국민당과 공산당은 내전을 멈추고 손을 맞잡습니다. 고육지책으로 연합한 양측은 여전히 갈등을 벌이면서도 각자의 방식대로 항일전쟁을 이어갑니다. 중일전쟁 중 일본은 난징대학살을 비롯해 용서받을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르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1945년 패망합니다. 극중 허 주임(양조위)은 일본 측에 침투한 상하이 비밀 조직 요원입니다. ‘스포일링’이 아니라, 공식 포스터에서도 소개하고 있는 설정입니다. 허 주임 밑에서 일하는 예 선생(왕이보)은 어느 편에 섰는지 알 수 없는 미묘한 인물입니다. 누아르 영화 팬들이 중요시하는 것 중 하나는 영상미입니다. 첩보물은 일단 소위 ‘때깔’이 좋아야 보는 맛이 나기 때문입니다. 주연 배우들의 연기력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긴장하고, 의심하고, 고뇌하는 스파이 연기를 완벽히 소화할 수 있는 배우는 흔치 않습니다. 여기에 감독의 역량으로 무겁고 진중하면서도 긴장되는 분위기를 잘 연출한다면 금상첨화입니다. 기자가 최근 본 근대 첩보물 중에선 ‘더 스파이’와 ‘공작’이 이러한 조건을 모두 충족했습니다. ‘무명’ 역시 이 조건들을 갖춘 영화라는 점에서 고평가를 받을 수 있겠습니다. 양조위와 왕이보가 멋드러진 수트를 차려입고 펼치는 호연은 흠잡을 데 없습니다. 냉혹하면서도 따뜻한 스파이 양조위를 감상할 수 있다는 건 이 영화가 시네필에게 소구할 수 있는 강점입니다. 대세배우로 떠오르는 왕이보도 강렬한 감정연기로 제역할은 해냈습니다. 양조위와 왕이보가 맨손으로 혈투를 벌이는 클라이맥스 액션신은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로 치열하고 실감납니다. 비밀스러운 정보책 ‘미스 천’(저우쉰)과 예 선생의 약혼녀 ‘미스 방’(장정의)은 갈등 구조를 심화시킵니다. 긴장감이 흐르는 서스펜스 연출도 어색하거나 허술하지 않았습니다. 영화는 묵직한 저음역대의 배경음악을 아주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영화관에서 이 작품을 감상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서라운드 고출력 스피커에서 내뿜는 무거운 음악이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킵니다. 다만 조금 과한 측면도 있습니다. 몇몇 장면에선 ‘음악을 빼는게 나았겠다’ 싶기도 합니다. 아쉬운 점도 남습니다. ‘무명’은 친절한 영화는 아닙니다. 안 그래도 복잡한 중일전쟁을 배경으로 하는데, 흐름이 뒤죽박죽이라 스토리를 한 번에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플래시백의 과용으로 머리가 복잡합니다. 덕분에 단조롭게 느껴지지는 않고, 나름의 반전 효과를 배가한다는 순기능은 있습니다. 비슷한 느낌의 한국 영화를 찾자면 두 남자의 대결구도를 그린 ‘헌트’(2022)가 있습니다. 두 작품 모두 극중 흐름을 한 번 놓치면 스토리를 이해하기 힘들지만, 재관람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불친절함을 갖췄습니다. 항일 스파이 영화라는 배경 설정만 놓고 보면 올해 개봉한 ‘유령’과도 유사합니다. ‘무명’의 또 다른 불호 요소는 중국식 ‘국뽕’입니다. 국민당은 배제한 채 공산당의 항일투쟁을 중점적으로 다룬 점은 다소 편향적입니다. 하지만 외국 관객들이 보기에 불편할 정도로 노골적이진 않습니다. 사실 그보다는 “100년 전 일”에 대해 100년째 사과하지 않고 있는 전범국 일본을 겨냥한 권선징악이라는 메시지가 뚜렷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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