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생애 책한권] 쇼펜하우어 수상록 / 쇼펜하우어

입력 : 2005-09-05 09:00:00 수정 : 2009-01-12 00:4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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씹을수록 단맛이 나는 책

"소설에는 두 가지가 있다. 재미있는 것과 재미없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소설 '설국(雪國)'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와바다 야스나리(川端康成)와 시대를 같이한 소설가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의 말이다.

'수학 교과서라도 재미가 없으면,즉 읽히지가 않으면 책으로서의 가치가 없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철학자들 자신을 위한' 궤변으로 가득 차 있는 철학 서적들이다. 김수영 시인이 돌아가시기 전 일어판 헤겔 철학서를 전질(全帙)로 구입하고는 아이처럼 좋아하셨다지만,나는 헤겔 같은 형이상학적 철학자보다는 쇼펜하우어처럼 글을 쉽게 쓰는 철학자를 좋아한다.

여기서 쉽다는 말은,씌어진 글이 수학처럼 논리가 정연하고,독자의 머리를 어지럽히지 않는다는 말이다. 쇼펜하우어의 책들을 읽어보면 어느 것 하나 글에 복선이 깔려 있거나 위장이나 현학적인 표현으로 글이 꽈배기처럼 꼬여 있는 일을 발견할 수가 없다. 그가 쓴 글은 대부분 명문으로 알려져 있는데,얼마나 그 글들이 훌륭했으면 니체까지 그를 '이 사람이 가르친 것은 이미 소임을 다했다/이 사람이 산 것은 언제까지나 남으리라/…이 사람을 잘 보라/이 사람은 아무에게도 종속되지 않는다'라며 격찬했을까 싶다.

'쇼펜하우어의 수상록'은 어렵지 않기 때문에 읽혀지고,읽혀지는 속에 재미가 있으며,재미를 느끼는 가운데서 삶에 대해 새로운 것을 많이 배우게 한다. '…그러므로 책을 읽을 때는 생각하는 일이 거의 없다. 우리가 스스로 사색하지 않고 독서로 옮겨 갈 때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처럼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머리는 독서를 하고 있는 한,실은 타인의 사상의 운동장에 불과하다. 종이 위에 씌어진 사상은 일반적으로 모래 위에 남은 보행자의 발자국과 같은 것으로서,물론 그 사람이 걸어간 길은 알 수 있지만,그 사람이 그 길을 걸으며 무엇을 보았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눈을 사용해야 한다.'

이 인용문 속에는,'사람은 언제나 개성 있는 자기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살아나가야 한다'는 간명한 실존적 가르침이 담겨 있다.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형이상학적인 현상이나 형이하학적인 존재의 의미를 깊이 천착(穿鑿)하여 스스로 완벽하게 파악한 후 지성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한 필치로 독자에게 알려 준다고 할 수 있는 '쇼펜하우어 수상록'은 씹으면 씹을수록 단맛이 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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