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뉴스] 약탈과 습격, 동아시아를 공포에 몰아넣은 왜구들

입력 : 2011-08-01 15:40:00 수정 : 2011-08-01 16: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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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노마드8 /

12세기와 16세기에 걸쳐서 동아시아의 바다를 제집 안방 드나들 듯 휘저으면서 공포의 해역으로 만든 해상 무력 집단 왜구. 한국 사람들에게 왜구는 일본의 대마도에 근거를 둔 해적으로, 일찍부터 해안 지방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한 해상의 떼도둑 일당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북한 쪽에서도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 동남아시아 여러 해안들에 싸다니면서 로략질을 일삼던 일본 해적의 무리”로 인식하고 중국 쪽에서도 “원조 말기와 명조 초기에 중국의 연해지구를 침략한 일본의 사무라이, 상인과 해적들”로 보고 있다.
반면에 일본에서는 “왜구가 일본인 이외에 조선인도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심지어 14세기 중반 이후 구성원의 대부분이 중국인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왜구를 “외교와 무역 관계에서 무역이 순조롭지 않을 경우 일어난 경제해적”으로 취급하거나 심지어 “고려의 피차별민과 중국인들도 참여한 반국가적인 집단이었다”는 둥 마치 해적이 아니고 봉건국가의 억압에 저항한 세력인 것처럼 내세우는 연구들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갑자기 바다를 건너와서 민가를 약탈하고 부녀자를 겁탈, 납치해 인신매매할 뿐 아니라 거기다가 힘들게 지어놓은 농사를 해마다 추수 때만 되면 탈취해 가버려 백성들의 겨울나기를 더욱 고통스럽게 했으니 우리나 중국 쪽이나 철천지원수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우리가 왜구를 부를 수 있는 가장 낮은 호칭인 도둑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존재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이 때문에 한국에선 현재까지도 ‘왜구’라는 명칭은 일본인을 폄하하는 명칭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판사판 내몰린 왜인들

규모가 크지 않았지만 신라시대부터 있었던 왜구. 이미 7세기 이전에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일본을 가리키는 말로 왜倭를 사용하였는데 노략질을 일삼는 도적떼라는 뜻 구寇를 붙여서 왜구倭寇라 부르게 된 것.
일본열도에 근거를 둔 해상도적떼 왜구가 동아시아의 역사 속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3세기부터 16세기경이다. 이 시기는 고려와 원나라의 연합군이 일본 열도 침략에 실패한 이후였으며 이로 인해 중국에서는 원과 명나라, 한반도에서는 고려와 조선의 정권이 교체되는 시기였고 일본에서도 분열과 혼란으로 유민이 대량으로 발생하고 식량기근이 극심한 때였다. 국제정치질서 붕괴, 자국 내 기근, 분열이 왜구 등장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당시의 일본열도는 국내적으로 막부가 실권을 잃고 수십 년 계속된 사회적 혼란과 불안 속에서 백성들은 기근에 시달렸다. 더욱이 원과 고려의 정벌로 일본 내 무사들과 백성들의 생활은 경제적인 파국에 빠지게 된다. 특히 막부의 통제력이 약하고 정벌의 가장 전면에 위치했던 일본 서부지방 구주九州와 인근의 섬 지역 사람들이 더 많은 피해를 입게 되었는데 전쟁에 동원된 중소 무사나 물자를 대던 농민들과 어민들이 주로 살았던 대마도對馬島와 송포松浦 등 연안 일대의 생활이 더 어려웠다. 이후에 ‘삼도왜구三島倭寇’라는 이름에 나타나 있듯 일기壹岐ㆍ대마도對馬島ㆍ송포松浦 출신 어부와 농민들은 어업과 농사를 할 수 없게 되거나 양식이 떨어지면, 부대를 조직하고 해적이 되었다. 적게는 1~3척, 10인 정도의 집단에서 크게는 약 400척, 3000인의 대집단이 꾸려져 약탈의 항해를 떠났다.
일본의 고전문학 ‘태평기太平記’는 왜구의 발흥 원인에 대해서 “40여 년 간 본조(일본)는 크게 혼란하였고 외국(원과 고려)도 잠시도 조용하지 않았다”면서 일본과 원나라 고려의 정치적 혼란 상황에서 원인을 찾은 뒤 “일본도 남북조의 동란으로 산적과 해적이 급증하였고 결국 이 도적들 일당이 수천 척의 배를 모아 원나라와 고려의 해안가를 습격하고 중국의 명주와 복주의 재물을 탈취하고 관청과 사원을 불태웠다”고 기록한다. 태평기는 “구주의 해적들 때문에 원과 3한의 관리와 백성들은 이를 막기 힘들어서 포구 가까운 나라 수십 개국에 거주하는 사람도 없이 황폐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아무튼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하여 바다 건너 바깥으로 눈을 돌리게 된 왜인들의 눈길이 꽂힌 곳이 바로 엎어지면 코 닿는다는 한반도 연안이고 중국의 연안이었다.
‘이판사판’ 고기를 잡던 배들은 곧바로 노략선으로 둔갑을 하고 어부와 농민들은 몰락한 중소 무사계급의 조련하에 잔인한 무력집단으로 변신하였다. 배와 무기를 갖춘 아귀와 같은 배고픈 집단의 습격은 주변국 입장에서는 재앙이었다.
왜구는 초기에는 연안 국가의 식량창고를 습격하여 약탈하였지만 경비가 강화되고 반격이 거세지자 민가를 습격하고 문화재도 마구잡이로 약탈했다. 노약자와 늙은 여자들은 죽이고 젊은 여성들과 건강한 남자들을 닥치는대로 납치해서 농업노동력으로 충당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끌고 가서 노예로 팔기까지 하였다. 그들은 서구의 바이킹보다 훨씬 잔인했다. 

동아시아 바다의 무법자

왜구의 규모는 몇 척 배로 이루어진 소규모부터 수백 척을 거느린 대선단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이들은 3~5월경 규슈를 출발, 오키나와를 거쳐 중국 연안으로 쳐들어가거나 한반도 남부 지역을 약탈하는 패턴을 반복한 직업적 무법자들이었다.
동아시아 연안 가운데 한반도에서는 연안지역과 조세를 거두어 개성과 한성으로 올라가는 공선 등이 피해를 가장 많이 입었다. 그리고 중국에서 피해가 컸던 곳은 주로 산동반도와 연안 일대였으며, 여기서도 미곡을 약탈하고 사람을 납치했다.
불시에 한반도 어느 지역에 소규모로 때로는 대규모로 침략해 추격해오면 배를 타고 바다로 도망가는 왜구에 대해서 속수무책이었다. 또한 100척에서 500척까지 이르는 선단으로 한꺼번에 밀려와 배에서 내린 뒤 말을 타고 기습적으로 연안 마을을 휩쓸고 내륙 깊숙이 기동성 있게 이동하면서 보병과 기병의 합동 작전을 펼친 이들의 전술은 고도의 훈련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들은 도적떼가 아닌 ‘정예병’들이었다. 김천에서 상주로 가는 왜유령, 왜넘이재는 고려 말 왜구가 넘었다하여 생긴 지명으로 왜구들이 내륙지역에 거점을 삼고 아예 정주하는 형태가 남긴 씁쓸한 유산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 말 우왕 3년의 왜구 침입 때는 왜구들이 강화로부터 바닷가 고을을 모두 점령하고, 우리 전함 50여 척을 빼앗고 수원, 경양(현 직산), 양성, 안성까지 이르러 이 일대를 싹쓸이했다고 한다. 이때 수원부사 박승직은 왜구 침입의 소식을 듣고 곧바로 적을 쫓아 안성까지 왔으나, 오히려 왜구들에게 포위당하는 바람에 군사들은 대부분 살해되거나 포로로 잡히고 박 부사는 단기로 겨우 포위망을 뚫고 몸만 빠져 나와 목숨을 건졌다. 또한 같은 해에 왜적 1백여 기가 남양?안성?종덕을 침범하고, 또 강화를 침범하여 부사 김인귀가 살해되고, 군사 1천여 명이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왜구의 전력과 세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알게 하는 대목이다.


노략질하는 왜구들
 

김해 안동을 거점 삼아 노략질 

이 땅에 들어와 살다시피한 왜구들은 대담하게도 아예 김해, 안동을 거점으로 삼을 정도였다. 남해 해운의 중심 김해, 거제도는 왜가 한반도로 들어오는 통로였고, 안동은 한양으로 입성하는 주요 거점이었다. 고려 관군은 이들을 당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왜구들의 등쌀이 얼마나 심했던지 고려 조정에서는 “개경의 안전이 위협받으므로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자”는 논의가 일기도 했다.
왜구의 한반도 침입 횟수에 관하여는 약간씩의 차이가 있지만 1223년부터 1392년까지 169년간 총 529회의 침입이 있었고, 1392년부터 1443년 세종 25년까지 총 155회나 되며 조선 건국 직후 10년간은 연 10회가 넘은 해도 여러 번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왜구침구 기사를 312번이나 언급하고 있다. 한반도를 제 안방 드나들 듯이 마음대로 유린했던 왜구들은 조선의 국력이 강해지고 일본 국내 사정이 안정되면서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조선도 이들을 달래고 조공과 무역관계로 점차 순화시켜갔다.
한편, 왜구의 노략질에는 중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중국에서 피해가 컸던 곳은 주로 산동반도와 연안 일대였으며, 미곡을 약탈하고 사람을 납치했는데 14세기 중엽 원말명초의 혼란기나 명조 중기 해안방어가 늦추어진 틈을 타 왜구들의 강탈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15세기에는 일단 주춤했지만 16세기에 다시 활발해졌다. 이 당시엔 명나라가 무역을 제한, 단속이 엄했으므로 왜구는 중국인과 결탁하여 무장을 하고 밀무역을 하기도 했다. 
1553년 8월 왜구가 중국 절강성에 대거 상륙하여 벌인 참극은 처참했다. 이들은 무자비한 살육을 감행했고, 항주에서 절강 서쪽을 지나 안휘성 남쪽을 짓밟은 다음 남경에 육박했다. 그 후 또다시 표양·무석·소주 등지에 상륙해 절강·안휘·강소의 3성을 짓밟으면서 80여 일에 걸쳐 4천 명 이상을 무자비하게 죽였다. 그런데 만행을 저지른 왜구의 병력은 겨우 100명 미만이었다니 놀랄 일이다.
1559년 명 정부에서는 젊은 장수 척계광을 절강 동부에 파견하여 왜구 토벌에 나섰다. 척계광은 왜구와 싸울 군대를 엄격한 훈련을 거쳐 편성한다. 이들은 척계광의 군대 ‘척가군’이라고 불렸으며 싸움에 용감하였고 규율이 엄하였다고 전해진다. 1561년 척가군은 태주에서 왜구와 싸워 연전연승함으로써 절강의 왜구를 몰아내는 데 큰 공을 세운다. 뒤이어 척계광은 복건, 광동에 가서 또 다른 장수 유대유와 연합으로 왜구를 물리쳤다. 그리하여 1565년에는 중국의 동남연해에 왜구는 거의 소멸되다시피 했다.
왜구가 미치지 않는 동아시아의 바다는 거의 없었다. 왜구들은 베트남과 태국까지 진출하여 약탈하기도 하고 정착하기도 했다. 일설에는 샴(태국)에선 이 왜구들을 샴왕의 근위병으로까지 고용했다고 하니 사실여부를 떠나서 그들의 진출경로와 토착성에 새삼 놀라게 된다. 먼 바다를 항해해간 그들을 볼 때 배가 약하고 또 항해술이 없고선 상상 못할 부분이다.
 
왜구의 배와 무기

조선과 중국을 노략질하던 해적인 왜구들의 주된 무기는 칼과 창과 활이었다. 최대한 가볍게 무장을 하고 재빨리 노략질을 한 다음에 관군이 오기 전에 빠져 나가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왜구들은 흔히 보는 그림처럼 전부 아랫도리는 벗고 칼을 휘두르는 집단이었는가? 그렇지 않다. 고려사는 왜구의 장수 아기발도에 대해서 견고한 갑옷과 동으로 만든 보면대를 하고 있었다고 기록한다. 큰 쇠투구를 쓰고 손과 발까지 갑옷을 입은 왜구들의 모습에서 그들의 무장이 보통이 아니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리고 당시 우리나라 연안을 노략질하던 왜구선은 선체가 작고 날렵했다. 왜구들의 배는 임진왜란의 일본군선 ‘아다케’와 ‘세키부네’를 보면 짐작케 된다. 세키부네는 선체가 홀쪽한 쾌속선이었으며 아다케는 규모에 있어 대형함이었으므로 먼 항해를 해야 하는 왜구선은 이와 비슷한 크기와 형태를 가졌을 것이다. 세키부네를 비롯한 일본 전통 선박은 가공하기 쉬운 삼나무나 전나무로 된 매우 얇은 판재를 사용해 정밀한 구조로 만들어져 있지만 구조적으로 허약했다.
지난 1991년 진도에서 발견된 13세기경 통나무배가 왜구의 해적선일 가능성이 조심스레 점쳐졌다. 속을 파낸 반원형 통나무를 결구해서 배의 하부구조를 만든 후 상부에 돛대와 선실 등 구조물을 얹힌 형태가 일본의 12~14세기 선박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구조였고 배를 만든 재료도 일본산 녹나무였기 때문이다.
고대 일본 배가 어쩌다가 진도의 앞바다까지 와서, 약탈했을지도 모르는 다양한 유물을 간직한 채 가라앉아서 지금 발견되었는지 궁금증을 더했다. 당시 한반도에 드나들던 일본의 배는 무역선이라기보다는 왜구의 해적선일 가능성이 크다. 이런 배라면 약 3.7~5노트까지 속도가 나고 선원은 약 12명 정도, 전체 승선 가능인원은 24~30명, 혹은 많이 잡으면 40명도 가능할 것으로 추산된다. 고려 말 왜구 기록 중에 왜선의 숫자가 많은 경우 500척까지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언뜻 비정상적으로 많아 보이지만 이같은 통나무를 활용한 소형 선박이었다면 선박숫자나 3천명이 몰려왔다는 고려사의 리포트는 충분히 사실적인 숫자가 된다.



조선과 중국을 노략질하던 해적인 왜구들의 주된 무기는 칼과 창이었다. 최대한 가볍게 무장을 하고 재빨리 노략질을 한 다음에 관군이 오기 전에 빠져 나가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왜구들은 그림에서처럼 전부 아랫도리는 벗고 칼을 휘두르는 집단이었는가? 그렇지 않다. 


13세기 왜선


왜구와 바이킹 그리고 노마드

왜구와 바이킹은 시대와 장소는 다르지만 상당한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 포악하고, 악랄한 약탈자로서 양자는 거의 차이가 없다. 바이킹이나 왜구는 대부분 살기 힘들어 자신이 살던 지역을 벗어난 ‘이주자’들이었다.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단지 ‘해적질’만 한 게 아니라 노략질한 물품을 유통하고 교역하면서 때로는 혼합하면서 해양을 가로질러갔다. 이동하는 바이킹은 잠자던 유럽을 흔들었고 왜구는 ‘동아시아’라고 불리는 한반도와 중국 멀리는 베트남까지 연결하면서 때로는 노쇠한 제국들을 흔들어 ‘낙상’시켰던 바다의 노마드 집단이었던 것이다.
또한 바이킹과 왜구 모두 각 문명의 중심부와 먼 곳에 떨어진 주변부 세력으로, 배를 타고 대륙 세력을 침공했다는 점. 그와 함께 문화변방의 존재로서 선진문화 수용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바이킹은 침략한 지역의 종교와 문물을 신속하게 자기 것으로 소화했다. 마찬가지로 왜구들은 약탈품 가운데 문화재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대마도에서 확인된 불상만 130점이 있고 세계에 남아 있는 고려 불화 100여 점 가운데 90여 점이 일본에 있다. 금을 녹여 만든 고려의 금자사경도 역시 일본에 있다. 그들이 약탈해간 각종 유물들이 지금도 일본에서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을 보면 놀랍기까지 하다. 한국이나 중국에 있었으면 대부분 소실될 운명이었으나 왜구들의 약탈에 의해서 보존된 아이러니다. 
뿐만 아니라 바이킹처럼 ‘왜구’들도 이른바 ‘동아시아’를 바다를 가로지르면서 탈 국가적인 삶을 살아간 해양 유목민들이었다. 
그러나 바이킹이나 왜구 모두 끊임없이 이동해간 해양 노마드였지만 바이킹은 문화를 변혁하고 때로는 정착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간 반면 왜구는 일본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도적집단에 머물렀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SEA&강승철기자ds5bsn@busa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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