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에 이어 이번에도 필자에게 짜릿한 추억을 남겨준 두 편의 영화 '유령'과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 편집한 두 작품 동시개봉 '불상사'
먼저 두 작품이 정면충돌하게 된 1999년 7월을 되짚어 본다.
`유령'은 일신창업투자사에서 투자했다. 이 회사는 한국영화 투자분야에서 당대 최고였다. 그런데 `유령'의 투자 이후 무슨 이유인지 영화사업을 접는 바람에 일이 꼬이게 됐다. 결국 일신창투는 '유령' 배급을 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급변했다.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자 제작사인 우노필름 대표는 최고의 배급망을 가진 시네마서비스의 문을 두드렸다. 그해 7월 `유령'은 완성되자 배급을 의뢰한 것. 우노필름과 시네마서비스는 충무로에서 선의의 경쟁자이기에 이런 분위기는 어쩌면 '적과의 동침'처럼 다가왔다.
비슷한 시기, 태원엔터테인먼트가 제작중인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한창 편집중이었다. 이 영화 투자사인 시네마서비스는 진행상황이 궁금한 듯 필자에게 "가편집본이라도 보여 달라"고 요구해 편집실에서 기술시사를 했다. 그런데 이게 왠일. 내부적으로 반응이 좋게 나오자 일단 항간에 떠돌던 부정적 소문이 확 사라졌다.
최고의 배급망을 가진 시네마서비스는 주저할 것이 없었다. 7월31일 개봉일을 확정한 것. 이로 인해 필자가 편집한 두편의 한국영화가 같은 날 개봉하는 '대형사고'가 터지게 된 것이다.
■ 예기치 않은 '탈주범' 신창원 효과
"흥행은 아무도 모른다."
충무로에서 이런 말을 쉽게 들을 수 있다. 한마디로 '뚜껑 열어 봐야 안다'는 것. 이런 격언처럼 자식과 같은 영화 두 편이 같은 날 개봉하자 필자는 아침부터 극장을 기웃거렸다.
영화 흥행의 가늠자 격인 서울에서 두 작품의 개봉관 수는 비슷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당대 최고인 종로3가 서울극장을 비롯한 20여개 극장에서 개봉됐고, '유령'도 지금은 없어진 시네코아를 비롯한 20여개 극장에 내걸렸다. 당시 멀티플렉스 극장 시스템이 도입되기 직전이라 대부분의 영화는 이렇듯 여러 단관 극장에서 개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개봉에 앞서 흥행 분위기는 '유령'이 좀 앞섰다. 예비 관객들에게 더 관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변수가 생겼다. 당시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 하나가 두 작품의 흥행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 사건은 바로 탈옥범 신창원을 두고 하는 말이다. 1997년 1월 20일 부산교도소의 화장실 창살을 쇠톱날로 절단하고 탈출한 그는 검거에 나선 경찰을 조롱하듯 무려 2년 반동안 신출귀몰하며 전국을 누볐다.결국 1999년 7월 16일 그가 숨어있던 전남 순천의 아파트에서 가스관 수리를 의뢰받은 수리공의 제보를 받은 경찰에게 검거 되었고 기나긴 탈옥 생활은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신창원이 신출귀몰하는 와중에 그의 은신을 도운 미모의 다방종업원들이 있었는데 공교롭게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안성기과 최지우의 역할과 닮은 점이 많았다. 특히 신창원이 좁혀오는 수사망을 피해 서울을 빠져나갈 때나 대중교통이 아닌 자전거로 서울에서 천안까지 탈출한 것이 화젯거리였는데 극중 안성기가 자전거로 도피한다는 설정을 빼닮았다.
이런 도피 방법과 영화적 상황이 맞물리자 지상파 방송 9시뉴스에 소개됐고 영화는 예기치 않은 두둑한 홍보효과를 볼 수 있었다. 당시 개봉을 앞둔 영화가 방송사 메인 뉴스에 소개된다는 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홍보였다.
물론 신창원의 탈옥을 보고 영화를 만든 건 아니다. 이 사건이 발생하기 전 영화의 시나리오가 완성됐고 제작 또한 범인 체포 보다 먼저 이루어졌다. 그리고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백미는 박중훈의 코믹하면서 맛갈스러운 연기,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그만의 장기가 뿜어져 나오면서 관객들이 호감을 갖게됐다.
또한 영화 도입부인 부산 중앙동 49계단 격투는 `홀리데이' 음악과 어울어지면서 명장면이 됐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마지막 액션 장면 역시 할리우드 오마주할 정도였으며 영화 팬들 사이에선 최고의 장면으로 꼽을 정도로 적지 않은 화제를 낳기도 했다.
결국 흥행에선 `인정사정 볼 것 없다'가 `유령'을 앞지렀다. 박중훈은 이 영화 이후 충무로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연기활동을 했고, 다른 배우들도 달라진 몸값을 실감하기도 했다. 메가폰을 잡은 이명세 감독은 흥행감독 반열에 올라 할리우드 진출에 대한 야망도 드러냈다. 투자와 배급을 맡았던 시네마서비스 또한 엄청난 부를 거머쥐는 동시에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부동의 1위'임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 흥행 고배 마셨지만 대종상 품에 안은 '유령'
그렇다면 `유령'은 어땠을까. 이 작품은 한국영화계에 기술적 발전에 엄청 기여한 영화다. 지금도 많은 영화인들은 이를 인정한다. 허나 기술적으로는 좋아졌지만 지나친 이데올로기와 극단주의로 인한 관객의 관심을 끄는데는 실패했다. 나아가 내용이 무겁다는 평으로 인한 팬들의 발길도 많지 않았다.
또 빼놓을 수 없는 에피소드도 있다. `유령'을 연출한 민병천 감독이 영화 개봉에 앞서 안방극장으로 건너가 TV드라마 `고스트'를 흥행시킨 것. 드라마 주인공인 장동건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 했다.스타 반열에 오른 장동건의 팬심도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흥행에 어느 정도 작용한 듯 하다. 그렇다면 속된 말로 민 감독은 이적행위를 한 것인가.
필자가 편집한 영화가 같은 날 정면대결을 펼쳐 흥행에선 `인정사정 볼 것 없다'가 승리했다. 반면 대종상 시상식에서 '유령'이 웃었다. 개봉 이듬해인 2000년 4월 개최된 제37회 대종상 시상식에서 두 편 모두 편집상 후보에 올랐다. 결국 '유령'이 편집상을 수상했는데 필자에게는 정말 더 없이 고맙고 소중한 상이다.
그런데 적지 않은 충무로 사람들은 `인정사정 볼 것 없다'로 필자가 대종상 편집상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왜 그럴까. 아마도 두 영화의 개봉일이 같았고, 똑같이 후보로 올랐기 때문이 아닐까 나름 생각해 본다.
아무튼 흥행이나 수상 여부를 떠나 `유령'과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필자의 영화인생에 큰 보탬이 된, 뜻 깊은 작품으로 지금도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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