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7월 15일 닉슨 미국 대통령은 동맹국과의 아무런 사전협의나 귀띔 없이 전격적인 중국 방문 계획을 발표했다. 한 달 뒤에는 달러와 금의 태환 정지를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닉슨 쇼크' 또는 '닉슨의 더블 쇼크'라 불리는 것으로 국제정치경제 질서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했다.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은 닉슨 쇼크만큼이나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리고 있다.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시위가 미국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의 논설위원 마틴 울프는 경험, 성격, 지식 면에서 트럼프를 부적격자라고 비판했다. 선거 기간 중 트럼프가 미군 주둔 비용을 더 부담하지 않는 한 동맹국으로부터 미군을 철수할 수 있다고 시사해왔던 만큼 동맹국들의 혼란과 우려도 크다.
그러나 트럼프 정부의 대외정책이 모습을 드러내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이 공언한 대로 미국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서 탈퇴할지도 아직은 불투명하다.
TPP는 물건에 대한 관세만이 금융, 의료, 전자상거래, 지적재산권, 환경, 투자 등 원칙적으로 모든 물품과 서비스를 대상으로 관세를 철폐하고 새로운 통상 룰을 구축하고자 하는 것이다. 2005년 싱가포르, 뉴질랜드, 칠레, 브루나이가 관세와 비관세 장벽을 철폐하는 협정을 체결했던 것이 출발점이다.
2010년 미국, 호주, 페루, 베트남, 말레이시아가 참가를 표명해 9개국으로 확대됐으며 2012년 멕시코와 캐나다, 2013년에는 일본이 교섭에 정식 참가하면서 참가국은 12개 나라로 확대되었다.
12개 나라의 인구를 합하면 약 8억 명으로 세계 인구의 10%를 약간 넘을 뿐이지만 국내총생산(GDP)는 약 40%에 달한다. 일본의 GDP는 미국을 제외한 나머지 10개국 GDP를 합친 것과 같아 TPP는 사실상의 미일 FTA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한 교섭 끝에 작년 10월 포괄적인 합의가 이뤄졌고 올 2월 12개국은 협정문에 정식 서명했다. 서명 후 2년 이내에 모든 참가국에서 국내 비준절차를 마쳐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GDP 합계가 85% 이상을 차지하는 6개국 이상이 비준해야 TPP는 발효된다. 이를 위해서는 GDP 합계가 80%에 달하는 미일 두 나라의 비준이 반드시 필요하다.
비준이 되지 않는다면 협상을 주도했던 미국은 큰 타격을 입을 것이며 그 대신 중국이 주도하고 있는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교섭이 탄력을 받아 `2016년 협상 타결'이라는 목표 달성에 한 발 더 다가설 수도 있다.
미국이 참여하지 않는 RCEP에는 16개 국가가 참여하고 있는데 GDP 규모는 TPP보다 작지만 전 세계 인구의 절반을 차지한다. 일본을 비롯한 7개국이 TPP와 RCEP에 동시에 참가하고 있으며 한국,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 태국, 필리핀 등 9개국은 RCEP에만 참여하고 있다.
2012년 총선거에서 `성역 없는 관세철폐를 전제로 한 TPP 교섭 참가 반대'를 공약으로 내세웠던 일본의 자민당은 선거에서 압승하고 정권을 탈환하자 입장을 바꿨다. TPP를 국가성장전략의 핵심 축으로 설정한 아베 정권은 TPP가 13조6천억엔의 GDP 증대를 가져와 아베노믹스를 성공으로 이끌 알라딘의 램프로 여겨왔다.
아베 정권은 11월 10일 TPP 승인안과 관련 법안을 중의원에서 통과시켰으며 회기를 연장해서라도 참의원에서 성립시킬 생각이다. 아베 총리는 11월 17일 트럼프 당선자를 만나 직접 설득할 생각이지만 트럼프가 생각을 바꾸지 않는 한 TPP가 발효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래서인지 일부 참가국은 협정의 수정을 통해 미국을 제외시키거나 미국 대신 중국과 러시아 등이 참가하는 새로운 협정을 체결해야 한다는 의견조차 내놓고 있다.
TPP의 운명은 미일 두 나라 손에 달려있다. 일본의 기대에 반해 트럼프 신정권이 기존 방침을 고수한다면 경제만이 아니라 외교안보 면에서도 양국 관계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킬 것이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TPP 협정문만 150페이지에 달할 뿐만 아니라 관련한 설명문서는 6천300 페이지나 된다. 교섭내용도 조인 후 4년 간 공개하지 않기로 되어 있으며 한국이 가입하려면 12개 나라 모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박근혜 정부 들어와 그전까지 통상 업무를 총괄·조정하던 통상교섭본부는 해체되었다. 통상업무가 산업통상자원부로 이관된 현 체제로 기민한 대응을 할 수 있을지 우려스럽다. 중국 봉쇄를 위한 아시아의 경제판 NATO(북대서양조약기구)라 불리는 TPP로부터 미국이 이탈할 경우 중국 주도의 RCEP 타결을 위해 매진할지 고도의 정치적·정책적 판단도 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국민 스스로 뽑은 대통령에게 퇴진을 요구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미래의 불확실성은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적어도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는 희망만이라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조진구 고려대 글로벌일본연구원 연구교수(도쿄대학 법학박사, 국제정치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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