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에 강두 같은 아이가 실제로 살고 있을 것 같아요. 쉽게 잊을 수 없겠지만 자연스럽게 강두를 놔줄 생각이에요."
지난달 30일 종영된 JTBC 드라마 '그냥 사랑하는 사이'에서 이강두 역을 맡은 2PM 이준호(28)는 사실감 있는 연기로 시청자들의 호평을 받았다.
강두는 쇼핑몰 붕괴 사고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았지만 후유증과 트라우마로 괴로워하는 인물. 이준호는 강두의 상처와 어두운 내면을 표현하기 위해 모든 것을 그와 동일시했다. 극중 강두가 시한부를 선고 받았을 때는 자기도 실제로 몸이 아파올 정도로 작품에 몰입했다. 첫 주연의 무게감에 주눅 들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의 흐름을 유지했다.
그 결과 이준호는 '그냥 사랑하는 사이'를 통해 '믿고 보는 배우'라는 수식어로 불릴 만큼 한 단계 성장했다. 최근 서울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이준호를 만나 강두로 살아온 수개월의 삶을 들어봤다.
■ "종영 아직도 실감 안나, 강두는 너무 소중한 캐릭터"
이준호는 2PM의 일본 투어 스케줄 때문에 다른 출연진들보다 열흘 가량 촬영을 일찍 마쳤지만, 한국에 돌아가면 다시 현장에 달려가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만큼 '그냥 사랑하는 사이'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그에게 있어 강두는 그동안 연기했던 어떤 캐릭터보다 여운이 길게 남는 인물이다.
"홀가분한 기분은 별로 없었고, 실감이 잘 나질 않았어요. 한동안 머리스타일도 못 바꾸고 있었으니까요. 강두의 캐릭터에 저를 최적화 시키다 보니까 굉장히 어두워졌어요. 늘 예민했고 사람들하고 이야기도 잘 안했죠. 이제 조금씩 원래의 저로 돌아오고 있어요. 가끔 집에서 '끝났구나, 끝난건가?'라며 실실 웃기도 해요. 매번 다음 회 반응을 기다리는 맛이 있었는데 이제 그렇지 못하니까 먹먹하고 아쉽네요."
그는 "분명히 강두 같은 사람이 현실에 있다고 본다. 내가 만들어놓은 캐릭터라 그런지 너무 소중하고 애착이 간다"며 "강두는 사고로 인해 삶의 무게를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강두와 같은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는 분들에게 결례가 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욱 집중하고 몰입했다"고 말했다.
또 "힘을 엄청나게 쏟다 보니까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다. 나중에 탈모가 오고 하얀 콧털도 났다"며 "강두가 간이 안 좋아서 시한부 선고를 받을 때는 나까지 덩달아 아프고 살도 빠졌다. 어떤 신을 찍어도 눈물이 나곤 했다"고 떠올렸다.
■ "첫 주연 부담감? 신선한 효과 기대했다"
이준호와 원진아가 '그냥 사랑하는 사이'의 남녀 주연으로 확정 됐을 때 다소 반신반의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이준호는 자신이 중심으로 흘러가는 주연을 처음 맡는 것이었고, 원진아는 이전까지 영화 세편에만 출연한 신예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준호는 신선한 얼굴들 간의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고 있었다.
이준호는 "10년 동안 활동하면서 주목을 받았던 적은 많았지만, 그건 언제까지나 2PM이었을 때였지 않나. 늘 그룹으로 하다가 혼자서 이끌어 가야하는 상황에 놓이니까 처음에는 부담도 됐다"고 털어놨다.
이어 "상대역으로 누가 캐스팅될지 걱정 반, 기대 반 같은 감정이 있었다. 원진아가 출연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도 첫 주연이고 드라마에서는 비교적 신인이니까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내지 않을까 싶어서 좋았다"며 "캐스팅도 그렇고 JTBC 첫 월화드라마는 편성 자체도 파격적이어서 신선하게 다가올 거란 기대를 했었다"고 밝혔다.
"진아와 비슷한 또래라서 그런지 별 다른 말을 안 해도 편하고 통하는 부분이 있었어요. 굉장히 예의 바르고 성실한 친구예요. 워낙 털털하고 싹싹한 성격이라서 인사를 할 때도 군대처럼 '다나까' 말투를 쓰길래 그걸 보고 스태프들과 놀리기도 했어요."
그는 "강두가 하문수(원진아)와 사랑에 빠지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차안에서 달달한 음악을 자주 들었다"며 "이전까지 늘 피곤해하거나 짜증이 나 있는 상태였는데 문수와의 멜로 연기에 들어가자 자연스레 강두의 감정 변화를 따라갔고, 웃음도 점점 많아졌다"고 이야기했다.
■ "한 듯 안한 듯 자연스러운 연기, 어려웠지만 버티자는 생각"
'그냥 사랑하는 사이'의 전작인 드라마 '김과장'에서 표현한 서율은 감정 변화가 확실히 드러나고 매우 활동적인 캐릭터였다. 반면 '그냥 사랑하는 사이'의 강두는 무심한 듯 툭툭 내뱉는 말투가 주를 이뤘고, 자신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방어적인 성격의 소유자다. 강두의 인물 소개란에는 '여기서 더 나빠질 게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 그냥 견딜만해'라는 문구가 있다. 사고 후유증 때문에 삶의 기대를 접어두고 무덤덤하게 살아가는 강두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힘을 한껏 뺄 필요가 있었다.
"한 듯 안한 듯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인물을 표현하기가 굉장히 어렵다는 걸 알았어요. 초반에는 감독님한테 '이거 내가 연기하고 있는 거 맞아요?'라고 물어볼 정도였거든요. 매번 맡는 배역마다 최대한 다르게 접근을 하려고 하지만, 강두는 유독 그랬던 것 같아요. 목소리 톤도 낮추고, 어떤 액션을 취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먹먹하고 튀지 않는 느낌을 그려내는 데 집중했어요."
"현장에서 여러 대의 카메라가 동시에 돌아가고, 스태프들은 분주하게 움직이는데 나는 차분한 강두를 연기하니까 왠지 모르게 동떨어진 기분이 들기도 했어요. 그때 감독님이 '우리 드라마는 버텨야 된다'는 말을 해주시더라고요. 그 이야기를 들으니까 강두를 어떤 스타일로 연기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고, 차츰 적응해나갔어요."
■ "사고의 아픔, '잊지 말자'는 것이 중요"
드라마의 기본적인 설정은 쇼핑몰 붕괴 사고에서 시작된다. 생존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보다 숨진 이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고통에 시달린다. 이는 세월호 참사, 삼풍백화점 붕괴를 비롯한 우리 사회의 아픈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드라마는 사고를 겪은 사람들에게 섣부른 위로를 건네는 것 대신 ‘잊지 말자’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준호는 "그분들의 아픔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아무리 곁에서 같이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더라도 막상 겪어보지 않으면 진짜 고통은 알 수 없다고 본다"며 "그런 마음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감히 하지 못하겠더라. 그 아픔을 기억하자는 것이 우리 드라마의 가장 큰 메시지였고, 촬영할 때도 항상 그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렸다"고 했다.
그는 "이번 작품으로 인해 사고에 대해 한 번 더 경각심을 가지고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며 "작품의 본질인 '잊지 말자'는 메시지를 잘 담아낸 것 같아서 뿌듯하다. 그래서 그런지 배우들, 제작진 모두 시청률 같은 화제성에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 "작품 찍으면서 가치관 바뀌어, 일상 소중함 깨달아"
그동안 이준호는 강두처럼 자신의 아픔을 누군가에게 쉽사리 고백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이제는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하기보다 주변 사람들과 나누고, 도움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일상 속에서 오는 소소한 행복도 누릴 줄 알게 됐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내가 아프거나 힘든 것을 숨기고 살아왔어요. 아프다고 하면 그게 약점으로 비춰질까봐 더 그랬던 것 같아요. 몸이 안 좋다는 게 알려지면 오히려 일을 못하게 될 것 같아 불안해하기도 했죠. '그냥 사랑하는 사이' 촬영을 하면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든 상황을 자주 겪다 보니 아픔도 공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법을 조금씩 터득해 가는 중이에요."
"강두와 은수가 집에 함께 가던 도중 '행복 별거 없네'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게 너무 와 닿았어요. 꼭 무언가를 거창하게 하기보다 그냥 길을 지나가다가 햇살을 보고 기분이 좋아지는 감정 같은 소소한 삶의 소중함을 깨달았죠. 제가 건강하게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감사한 일인 것 같아요."
■ "가수-배우 둘 다 잘하고파, 후배들 롤모델 됐으면"
2008년 그룹 2PM으로 데뷔한 이준호는 어느덧 '10년차' 연예인이 됐다. 힘들었던 시간도 있었지만 그것을 잘 이겨내며 노래, 연기 두 가지 분야에서 뚜렷한 존재감을 나타내고 있다. 얼마 전 소속사 JYP 엔터테인먼트와 재계약을 무사히 마친 그는 후배들의 롤모델이 되기를 꿈꾸고 있다. 가수와 배우 모두 놓치지 않고 싶다고 한 이준호의 다음 행선지는 어디가 될지 궁금해진다.
"회사에서 두 번째 재계약을 한 사례는 우리가 최초인데, 생각보다 별건 없었어요.(웃음) 10년 동안 워낙 스스럼없이 지내다 보니 멤버들, 직원들 모두 그냥 가족처럼 느껴져요. 언젠가는 내 꿈을 실현해보고 싶어서 회사를 나가는 날이 올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너무 편하고 좋아요. 2PM 전담팀을 만들어달라고 요청 드렸는데 적극적으로 수용해주시니까 신뢰가 갔어요. 이제 단순히 활동만 하기 보다는 JYP 엔터테인먼트의 아이콘으로서 후배들한테 영감을 주고 모범이 되는 아티스트가 되고 싶어요. 2PM의 이준호로 살아가는 건 제 인생에 있어 정말 큰 행운이자 복이에요."
"가수와 배우로 활동할 때 얻는 행복감이 너무 정반대라서 경험하면 할수록 욕심이 계속 생겨요. 두 가지 모두 잘하고 싶고 평생 가져가고 싶어요. 곡을 만들거나 작품을 찍는 과정 자체는 너무 힘들지만 결과물이 나왔을 때의 뿌듯함과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죠. 두려움 없이 매번 새로운 것에 도전하려고요."
사진=JYP 엔터테인먼트 제공
김상록 기자 sr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