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대륙을 가다] 볼리비아 라파즈

입력 : 2018-11-21 19:10:44 수정 : 2018-11-21 22:3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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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혁명'만큼이나 뜨겁지만 아름다운 도시

볼리비아 라파즈는 거대한 분지 모양의 지형 때문에 대중교통 확충에 어려움이 많다. 이 난관을 타계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 텔레페리코라 불리는 케이블카. 요즘은 관광용으로도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여행 13일째. 버스를 타고 페루의 국경도시 푸노를 떠나 볼리비아의 실질적 수도인 라파즈(La Paz, 헌법상은 수크레)로 향했다.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국경을 넘는다. 경계를 넘는 것은 두렵지만 설레는 일이다. 버스가 3시간쯤 달리자 국경이 나타났다. 한 공간에 페루와 볼리비아 출입국관리소가 나란히 붙어 있다. 볼리비아는 남미에서 유일하게 비자를 요구하는 나라다. 남미의 최빈국인 볼리비아. 외부 세계에 무엇을 숨기고 빼앗길 게 있다고 별난 입국 절차를 두고 있는 걸까? 없는 자의 자존심 같은 것일까? 통관 절차는 비교적 간단하게 끝났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도시
고지대 '서민의 발' 케이블카 인기
케이블카 아래 펼쳐진 풍경 일품

도시 외곽 '달의 계곡'도 추천 코스
빗물 침식된 울퉁불퉁 지형 이색적

게바라, 혁명 실패 후 살해된 나라
지금껏 정치·경제적 혼란 여전해도
웃음 넘치는 사람들 속 '희망' 엿봐

■원주민이 가장 많은 나라

볼리비아로 넘어오면서 가장 눈에 띄는 광경은 거리의 사람들 모습이다. 작은 키에 까무잡잡한 얼굴, 굵고 짧은 목덜미, 매부리코…. 인디오 원주민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볼리비아는 남미에서 원주민 비율이 가장 높은 국가다. 케추아족, 과라니족, 아이마리족 등 인디오 비율이 60%에 달한다. 백인과 원주민의 혼혈인 메스티조도 30%가 넘는다. 백인의 비율은 10% 남짓. 알록달록한 보자기를 등에 지고 중절모를 머리에 얹은 할머니들도 자주 눈에 띈다.

300년의 스페인 통치로부터 남미를 해방시킨 영웅 시몬 볼리바르의 이름을 딴 나라, 볼리비아. 볼리비아는 체 게바라라는 혁명가의 이름 탓에 더욱 강렬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쿠바를 해방시킨 체 게바라는 다시 혁명을 꿈꾸며 볼리비아의 밀림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는 정부군에 체포돼 7명의 동지들과 함께 무참하게 살해됐다.

볼리비아의 역사는 쿠데타와 독재로 점철돼 있다. 1825년 독립 이후 반복되는 군사 쿠데타로 정부가 200번 가까이 바뀌었고 어느 대통령은 취임 엿새 만에 하야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어느 해엔 연 3만 5000%의 인플레이션을 겪는 등 경제적 혼란이 끊이지 않았다.

볼리비아는 지금 또 다시 혼돈의 역사를 쓰고 있다. 2006년 남미 최초로 원주민 대통령이 된 에보 모랄레스의 4선 도전을 놓고 극심한 내홍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도착한 날에도 시내 중심가에서 모랄레스 연임 저지를 위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무질서 속 질서

버스가 라파즈 외곽 앨 알토 지역을 지나 라파즈 시내로 들어서는 순간 기이한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시내를 둘러싸고 있는 사방의 산꼭대기까지 빼곡하게 들어선 적벽돌의 집들이다. 철골이 다 드러나거나 미장도 제대로 되지 않은 집들을 보면 마치 무허가 판자촌을 연상시킨다. 안데스산맥의 고봉들 사이 분지에 들어선 도시의 지정학적 한계 탓에 라파즈는 평지가 별로 없다. 가난할수록 산 정상 가까이로 밀려나야 하는 게 생존의 법칙이다. 해발고도 3600m의 도시에서 걷는 것만으로도 숨이 찬데 날마다 고지대를 오르락내리락해야 하는 서민들의 일상은 고단할 수밖에 없겠다.

여기다 수많은 중고 자동차들의 질주로 매연이 심각하다. 금방 목이 따끔거린다. 교통질서도 엉망이다. 한 국가의 수도가 이처럼 흉한 모습이어도 되는가?

라파즈에 입성하는 순간 또 하나 눈에 띄는 풍경은 계곡과 계곡을 오가는 케이블카다. 정식 이름은 텔레페리코. 노란색, 주황색, 초록색, 붉은색 등 7가지 색상의 케이블카가 도심과 달동네 위를 분주하게 오간다. 거대한 분지 모양의 지형 때문에 지하철이나 새로운 도로를 낼 수 없기에 볼리비아 정부가 생각해 낸 케이블카는 '서민의 발'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했다.

그런데 출퇴근용으로 만들어진 케이블카가 예상치 못한 변화를 가져왔다. 관광객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는 것. 라파즈에 오는 관광객은 누구나 한 번쯤 케이블카에 몸을 싣는다. 재미도 재미거니와 케이블카가 보여주는 탁월한 조망 덕분이다. 산꼭대기에서 산꼭대기로 이어지는 케이블카를 타고 있으면 라파즈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라파즈를 감싸고 있는 안데스산맥의 설산 일리마니산.
우리도 이튿날 노란색 케이블카를 타고 서쪽 산동네로 올라갔다. 일몰 직전이었다. 시내 반대쪽을 에워싸고 있는 안데스산맥 정상에는 허연 눈이 쌓여 절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원주민들이 '큰형'이라고 부르는 설산 일리마니산(6437m)과 자카타야산(5380m)이 멀리 우뚝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곧 어둠이 내리자 도심은 주황색 불빛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어둠은 아름다움도 추함도 다 가려준다. 낮엔 그토록 무질서하고 볼썽사납던 도시의 풍경이 한순간 사라지고 불의 바다가 도시를 뒤덮는다. 빈부도 귀천도 하나로 수렴되는 순간이다. 어느 생계 터전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산꼭대기로 막 올라온 사람들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가족들이 기다리는 가정으로 돌아가는 발걸음, 발걸음들. 그 발걸음에는 생계에 대한 고단함이 묻어 있으며 휴식에 대한 간절함이 배어난다. 비로소 라파즈는 가난한 이들의 불빛으로 살아나기 시작한다.

어둠이 내리고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오면서, 달동네가 많은 부산에도 이런 케이블카를 도입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박한 사람들
시민들의 휴식처인 무리요광장은 많은 비둘기로 유명하다.
이튿날 우리는 본격적으로 라파즈 시내 투어에 나섰다. 가장 먼저 간 곳은 무리요(Murillo)광장. 코레르시오 거리 끝에 나타나는 광장으로, 라파즈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휴식 장소다. 광장 주변으로 대성당, 대통령궁, 국회의사당 등 정부 주요 시설들이 있고 식당가와 상가도 밀집해 있다. 대통령궁에선 경비요원들이 관광객들을 상대로 함께 사진을 찍는 등 매우 자유분방한 모습을 보여 놀랐다. 수만 마리는 될 듯한 비둘기의 무리 속에 다채로운 행사도 벌어지고 있었다.
라파즈의 명물 마녀시장.
다음으로 라파즈의 명물 '마녀시장'으로 간다. 산타크루즈 거리와 이얌푸 거리의 교차로에서부터 리나네스 거리까지 이어지는 시장으로, 우리 눈에는 신기하기도 하고 무시무시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물건들을 팔고 있다. 토산품과 함께 라마의 미라, 각종 말린 곤충, 약초, 주술품 등이 보인다. 원주민들은 미신에 대한 믿음이 강해 병을 치료하거나 행운을 부르기 위해 이러한 것을 사용한다고 한다. 
라파즈 외곽의 앨 알토 광장에 설치돼 있는 체게바라 상.
시장을 가보면 그 지역 사람들의 나날살이가 드러난다. 비록 가난할지언정 이곳 사람들은 인정이 많고 입가에 웃음기를 잃지 않는다. 길을 물어보면 내 일처럼 나서 끝까지 가르쳐준다. 상인들의 인심도 후하다. 
황량한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달의 계곡.
라파즈 외곽의 '달의 계곡'에도 갔다 왔다. 달의 계곡은 갈색 모래 지형에 빗물이 침식되어 울퉁불퉁한 지형을 형성한 것인데, 달의 표면을 닮았다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 칠레의 아타카마에 있는 달의 계곡에 비하면 규모가 훨씬 작지만 풍광은 그에 못지 않다. 아름답다기보다 쓸쓸하고 황량한 풍경. 이런 풍경이 때로 삭막해진 마음에는 큰 위로가 된다. 무리요광장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에 가면 인디오 원주민의 생활상을 잘 보여주는 모형물들을 볼 수 있으며 현란한 색상의 직물도 볼 수 있다.

라파즈(볼리비아)/글·사진=윤현주 선임기자

hohoy@busan.com

■ 여행팁|케이블카, 출퇴근 시간 피해야

라파즈의 명물 케이블카(텔레페리코)를 이용하면 복잡한 도심 교통난을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시내 조망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출퇴근 시간에는 길게 줄을 서야 하므로 될 수 있는 한 낮에 이용하는 게 좋다. 이용료는 편도 3볼(1볼은 약 170원)이며 환승 시에는 2볼로 할인된다. 케이블카를 탑승할 수 있는 곳은 여러 곳이고, 환승시설도 잘 돼 있다. 라파즈의 야경이나 전경을 조망하기에는 붉은색의 16 de Julio/Jach'a Qhathu역과 노란색의 Mirador/Qhana Pata역이 적당하다. 윤현주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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