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천마도 앞에서

입력 : 2023-06-19 18: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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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혁 유라시아교육원 이사장 부산외국어대 명예교수

경주박물관 ‘천마’ 주제 특별전
북방 대평원 말 달리며 호령한
고대 한민족 기상 떠올리게 해
천마도 문화 우리만의 것 아냐
몽골·카자흐 등에서도 발견돼
문화는 혼융·습합 때 풍성해져

천마도 앞입니다. 다음 달 16일까지 열리는 ‘천마, 다시 만나다’ 특별전을 보기 위해 모처럼 국립경주박물관을 찾았습니다. 주차장이 가득 찰 만큼 차가 많고, 젊은 부부들과 어린아이들이 눈에 많이 띄네요. 일본어와 중국어도 간간이 들립니다. 1500년의 세월을 뛰어넘은 신령스러운 말 한 필이 북방의 자작나무 껍질 위에서 하얗게 하늘을 날고 있군요. 자세히 들여다보니, 자작나무 껍질을 붙여 직사각형을 먼저 만들고, 기원전 1000년 경에 서부 이란의 루리스탄 청동기 문화권에서 시작되었다는 신마(神馬)를 멋진 솜씨로 그렸군요. 장니라고도 하는 이 다래는 말안장의 부속구로서, 말이 달릴 때 진흙과 물이 말 탄 사람 쪽으로 튀는 걸 막아 주었다고 합니다. 과학 기술자들과 문화재 복원 전문가들의 피땀 어린 노력으로 생생하기가 마치 어제 그린 듯합니다.

길이는 가로 76cm, 세로 45cm로 작은 담요만 합니다. 바람에 날리는 말상투 쪽 갈기가 10개, 꼬리 쪽 하얀 털 뭉치가 7개이군요. 하늘을 달리는 다리, 입 주변에서 느껴지는 힘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중동이나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사원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추상의 당초무늬가 그림 테두리에 채색되어 있어요. 당초문은 이집트, 헬레니즘, 당나라, 조선 청화자기의 무늬이기도 합니다. 현장 해설가의 얘기로는 무용총, 쌍영총과 같은 고구려의 고분벽화나 금령총의 기마인물형 토기 등에도 장니를 장착한 모습이 보이긴 한답니다. 그러나 천마도가 그려진 장니가 이렇게 거의 온전한 모습으로 발견된 예는 이 작품 말고는 아직 확인된 예가 없다고 하네요. 이번 특별전에는 대나무살을 엮어 만든 바탕판 위에 금동판을 덧댄 금동천마도도 같이 전시되고 있고, 일제강점기 때 출토된 금령총과 금관총의 다른 천마도도 나란히 선보이고 있습니다. 50년 만에 말 네 마리가 한자리에 모인 겁니다.


혼자 너무 오래 보면 다른 관람객들에게 방해가 될까 봐 멀찍이 떨어져서 봅니다. 그러나 발길을 돌릴 수 없어 다시 가서 보고 또다시 다가갑니다.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 옆에서 울고 있었다는 나정의 그 백마이고, 시베리아 스키타이, 카자흐스탄 사키족 용사의 그 말입니다. 예맥, 흉노, 돌궐, 고구려, 발해의 대평원을 호령하던 그 발굽입니다. 시인 백석이 일제강점기에 만주를 여행하며 화가인 친구 정현웅에게 보낸 시 ‘북방에서’가 생각납니다. 그 시에서 백석이 읊은 것처럼, ‘우리가 아득한 옛날에 부여와 숙신을, 요와 금과 오로촌을, 아무르와 숭가리의 범과 사슴과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떠났을 때’ 멀리서 우리를 배웅하며 목 놓아 울어 주던 바로 그 야생마도 저런 모습이었겠지요.

지금도 내몽골의 오로촌에선 자작나무 껍질을 인두로 지져 그림을 그리는 공예가 유명하다고 합니다. 자작나무 내피는 멀리 러시아 노브고라드와 인근 10개 도시에서도 문서 뭉치로 많이 발견되곤 합니다. 지금까지 찾은 것만 무려 1113개입니다. 11~15세기 자료인데, 이는 중세 일상사와 사회 연구, 동슬라브 언어 변천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14~15세기의 러시아 남부 초원과 서부 시베리아 평원에 있던 몽골의 킵차크칸국에서도 사람들이 저런 자작나무 껍질에 그림도 그리고 색칠을 하며 살았습니다. 1930년대 이미 볼가강 유역에서 몽골어로 된 자작나무 문서가 두루마리로 쏟아져 나왔거든요.

천마도 옆방에서는 4~5세기 신라 마립간 시절 경주의 상층계급이 누렸던 화려한 금관, 금 장신구, 로마의 코발트 유리잔, 페르시아 사자상, 서역의 석주와 십이지신상 등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경주의 천마도와 황금문화는 처음부터 완전히 우리만의 독창적인 것이었을까요. 그럴 수 없을 겁니다. 신라의 천마도와 황금문화는 내몽골과 시베리아의 자작나무, 내피 문서, 동부 카자흐스탄 언덕에서 나오는 사키족의 황금 말장신구, 황금 사슴뿔, 금화와 금 장신구, 황금갑옷 무사 등과 연관이 없을 수 없을 겁니다. 경주 근방에는 이런 천마도를 그릴 만한 질 좋고 두꺼운 자작나무 껍질이 아예 없어서 북방에서 수입해야 하고, 금을 캐는 광산도 신라엔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카자흐스탄의 황금문화가 우리보다 1000~1500년 정도나 앞섭니다.

문화란 주고받으며 섞인 것이지요. 문화란 섞일 때 빛나고 새롭게 창조되며, 혼융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습합될 적에 아름다워집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인구위기 시대를 맞으면서 외국인 노동자, 가사도우미, 직업계고 입학생 등 사회 각 방면에서 외국인이 늘고 있습니다. 빠른 속도로 다민족·다중문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천마가 당부합니다. “민족과 문화란 원래부터 고정되어 있지 않다. 북방의 옛 뿌리는 잊지 말되, 세계를 향해 더 개방적으로 살아가라. 의식이 먼저 열려야 제도가 열린다!”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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