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유럽에서는 증거가 부족한 민사·형사 사건을 두 당사자 간 결투로 해결했다. 이름하여 ‘결투재판’이다. 게르만법에서 유래한 것으로 무기를 들고 싸워 승패에 따라 유무죄를 가르는 식이다. 힘의 논리에 의한 결판이 아니라 신께서 옳은 사람에게 승리를 주실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한 일종의 ‘신명재판’이었다. 대신 싸워 줄 사람을 고용할 수도 있었는데 원고의 대전사를 백기사(white knight), 피고의 대전사를 흑기사(black knight)라 했다.
백기사와 흑기사는 신화나 전설, 문학작품에 자주 등장한다. 월터 스콧의 소설 〈아이반호〉에서 영국 존 왕의 전횡에 맞서는 기사 아이반호가 흑기사다.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쾌걸 조로 역시 흑기사다. 흰색 망토에 백마를 타고 등장하는 백기사는 구세주 성격이 강하다. 동화 속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깨우는 백마 탄 왕자 이미지와 겹친다. 동화 속 백기사·흑기사는 현대 자본시장에서 경영권 분쟁의 승패를 가르는 대전사로 부활했다. 적대적 기업 인수합병(M&A)에서 경영권 탈취를 돕는 쪽이 흑기사, 경영권 방어를 돕는 쪽이 백기사로 불리게 된 것이다.
2003년 외국계 자본 소버린이 SK 경영권 인수에 나서자 신한, 하나, 산업은행이 방어에 나선 것이 국내 M&A 역사에서 대표적 백기사 사례다. 이후 M&A 시장에 숱한 백기사·흑기사가 등장했지만 정체가 모호한 경우도 많다. 2019년 한진그룹 ‘남매의 난’에서 반도건설은 백기사에서 흑기사로 변한 경우다. 2005년 신한금융지주가 삼양식품 지분을 매각해 오너 일가 경영권이 위협받자 현대산업개발이 백기사를 자처했다. 이북이 고향이었던 선대 회장들의 끈끈한 인연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은 2019년 아시아나 인수전에 나서며 삼양식품 주식을 전량 매도했다. 자본시장에서 영원한 백기사도 흑기사도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최근 영풍과 고려아연의 경영권 분쟁이 금융시장 이슈다. MBK파트너스가 영풍과 손잡고 고려아연 경영권 확보에 나서자 적대적 M&A를 둘러싸고 여론전이 격화했다. 국가 기간산업이 중국에 넘어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자 김두겸 울산시장까지 나서 향토기업 고려아연 백기사를 자처해 정치적 문제로까지 비화했다. 급기야 금융감독원이 양측의 여론전 자중을 경고하고 나섰다. ‘쩐의 전쟁’ 결론이 어떻게 날 지 모르지만 국내 산업과 개인투자자 피해로 이어져서는 안 될 일이다.
강윤경 논설위원 kyk93@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