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조용히 조금씩 회복되는 세계

입력 : 2025-03-26 18: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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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애니메이션 '플로우' 스틸컷. 판시네마 제공 애니메이션 '플로우' 스틸컷. 판시네마 제공

언뜻 평화로워 보이는 풍경이지만 적막과 고요로 가득 차 있는 숲속은 어딘지 오묘하다. 사람이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지만 사람이 보이지 않는 세계. 눈에 보이는 건 동물뿐이다. 개들이 강에서 잡아 올린 물고기들을 서로 먹겠다며 으르렁거린다. 그때 근처에서 상황을 몰래 보고 있던 검은 고양이가 땅에 떨어진 물고기를 낚아채 달아난다. 눈앞에서 먹이를 빼앗긴 개들은 고양이를 뒤쫓기 시작한다. 한바탕 추격전이 벌어질 찰나 숲이 요동친다.

모든 것이 쓸려가고 난 후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재난이 어느 날 우리 앞에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한 번쯤 해보았을 것이다. 라트비아에서 온 영화 ‘플로우’는 대홍수가 세상을 덮친 이후 살아남은 동물들이 등장한다. 호기심은 많지만 매사 경계하는 검은 고양이, 꼬리를 흔들며 반갑게 맞아주는 골든 리트리버, 잡동사니를 쌓아두고 행복해하는 여우원숭이, 모든 일에 관심 없는 듯 보이는 카피바라, 무리에서 쫓겨난 뱀잡이수리까지 대홍수가 아니었다면 접점이 없었을 인연이 모인다.

동물들의 대홍수 생존기 '플로우'

인간의 '말' 없을 뿐 소통은 충분

'흐름'에 몸 맡기고 즐기기만 하면

이미 한 차례 모든 것이 쓸려간 듯한 숲에 다시 물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고양이는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높은 곳을 찾아 헤맨다. 고양이가 보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랐지만 물은 코끝까지 차오르고, 발을 버둥거려 보지만 점점 물속으로 가라앉을 뿐이다. 그때 낡은 배 한 척이 고양이 앞으로 다가온다. 겨우 배에 몸을 실은 고양이는 한숨 돌리지도 못한 채 항해를 시작한다. 얼마 후 비슷한 사정으로 배에 탑승하는 동물들과 만나고 그들 나름 경계하고 날을 세우지만 생사가 걸린 여정 앞에서 서로를 구해주고 또 어느 때는 작은 위로를 보낸다. 서서히 서로에게 스며든다.

하늘이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지고 땅에서는 끝없이 물이 차오를 때 어디선가 나타난 낡은 배는 노아의 방주와 닮아있다. 하지만 이 배가 나타난 이유를 지구 온난화나 종교적인 이유로 볼 수 없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물로 가득 찬 세계에 떠 있는 배 한 척과 거기 타고 있는 동물들의 이미지에는 보다 깊은 고민과 은유가 담겨 있을 뿐이다. 더불어 재난을 그리는 영화라고 해서 파괴만을 다루지 않는다. 무너지고 사라진 자리에서 조용히 조금씩 회복되는 자연의 모습도 담겨져 있다.

또한 ‘플로우’는 대사가 없는 영화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동물들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소통하고 교감(말)한다. 동물이 하는 대사를 인간이 알아듣지 못할 뿐이다. 인간의 말을 하는 동물들에 익숙해져 있었던 걸까? 영화가 시작하고 동물들이 ‘말’을 하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영화는 그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생각임을 깨닫게 만든다. 동물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동물들의 몸짓이나 표정을 통해 그들의 언어를 이해해야 한다고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 동물들의 소리를 가만히 들어보면 그들 또한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처음 만난 동물들은 서로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한다. 하지만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들은 행동과 표정만으로도 서로를 이해한다. 긴츠 질발로디스 감독은 동물이 동물답게 행동할 수 있는 연출에 공을 들였다. 이를 위해 동물들의 이야기를 공부하고, 동물들의 실제 소리를 녹음했다고 한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플로우’는 낯선 감각을 일깨울지 모른다. 낯설지만 어색하지 않다. 설명하지 않지만 이해 가능하고, 은유와 비유로 채워졌으나 어렵지 않다. 의미를 찾지 않고 그저 영화의 흐름(flow)에 몸을 맡긴다면 영화가 주는 낯선 감각이 무척 즐거울 것이다. 더불어 누구나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3D애니메이션 소프트웨어 ‘블렌더’를 사용해 만든 영화는 CG가 화려하진 않지만 사실적이다. 특히 동물들의 움직임은 사랑스럽고 자연 풍경은 신비로워서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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