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미술 시간. 당시 단골처럼 주어진 그리기 주제는 ‘산불 예방 포스터’였다. 크레파스나 물감으로 산을 초록빛으로 칠하고, 때론 라이터나 담배, 때론 성냥개비나 부탄가스를 그려 넣으며 강력한 산불 예방 메시지를 담으려 고심했다. 토끼, 다람쥐가 뛰어놀고 새들이 지저귀는 평화로운 풍경이 빨갛게 번지는 산불로 지옥으로 변하는 장면을 담은 한 친구의 포스터는 아직도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달 초 가족의 주말 출장에 동행해 경북 안동으로 향했다. 안동은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돼 있는 하회마을과 도산서원이 있는, 조선 시대 유교 문화의 중심지로 잘 알려진 곳이다. 중앙고속도로를 따라 안동에 접어들자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차 안에 있던 아이들은 코를 막고 인상을 찌푸렸다. 차창 밖 풍경은 더욱 처참했다. 1년 중 가장 아름답다는 5월의 신록을 준비하고 있던 산림은 불에 타 숯덩이로 변해 있었다. 산자락엔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집과 농막, 비닐하우스들이 눈에 띄었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스산한 날씨까지 더해지며 마치 디스토피아를 연상케 했다.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에서 만난 관계자는 “산불로 수련원에 이어지던 이용 예약이 취소됐고 문의도 끊겼다. 지역 경제도 모두 무너질 판”이라며 말했다. 수련원 주변 나무들이 모두 잘려 나가 그 이유를 물었더니, 산불이 유구한 역사가 켜켜이 쌓인 안동 곳곳의 문화유산과 관련 시설을 위협해, 불이 옮겨붙을까 산 중턱부터 나무들을 죄다 베어버렸다고 했다.
2023년 초에도 취재 차 찾은 경북 울진에서 대형 산불이 남긴 상흔을 경험한 적이 있다. 2022년 3월 발생한 대형 산불로 검게 탄 나무들은 산불이 꺼진 지 1년이 가까이 됐지만, 생채기가 온전히 남아 있었다. 산불을 직접 겪은 이들의 경험과 아픔에는 비할 바가 안 되지만, 화마로 까맣게 타버린 자연과 송두리째 사라진 주민들의 일상을 눈으로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대형 산불 이후, 우거진 산림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고 야생 동물들이 다시 터전에서 뛰어놀 수 있는 날이 오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 지 예상하기 힘들다. 2000년 발생한 동해안 산불 피해 지역은 20여 년이 지났지만 인공 조림 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예전의 모습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지난달 말 발생한 대형 산불의 피해는 최근 산림청 조사 결과, 기존 발표치의 배 이상인 10만 4000ha(축구장 145만 개 면적)로 집계됐다. 역대급 인명 피해뿐만 아니라 피해 면적에서 종전 역대 최대였던 2000년 동해안 산불과, 다음으로 피해가 컸던 2022년 울진·삼척 산불의 5배를 넘어섰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봄 날씨는 이동성 저기압의 영향으로 흐린 날과 비가 잦았다. 겨울 날씨는 춥고 습했다. 그랬던 봄은 건조하고 강풍이 부는 날이 빈번해졌고, 겨울은 따뜻하고 건조해졌다. 인간이 주도한 기후 변화로 수십일씩 이어지는 대형 산불이 어느새 우리의 일상이 됐고, 어느 특정 지역에 한정된 재난이 아닌 국가적 재난이 됐다. 부산의 경우에도 지난달 경남과 경북 지역 산불이 강한 바람을 타고 부산 금정산과 기장군 경계까지 접근하면서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 역대 최악의 산불을 경험한 지금도 전국 곳곳에서 크고 작은 산불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번 산불을 두고, 우리나라 토종·대표 수종인 소나무가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며 소나무를 책망하는 분위기도 있지만, 우리나라 생육 환경에 맞게 자연 발생적으로 자라고 있는 소나무까지 소환해 유무죄를 따질 필요가 있을까 싶다. 결국 산불을 내는 것도 사람이고, 기후 위기를 가속화시킨 것도 사람이다.
산불로 소실된 산림의 가치는 단순히 나무의 경제적 가치로만 평가할 수 없다. 산림은 건강한 생태계 유지, 집중 호우 시 토사 유출 방지, 대기 정화 등의 다양한 공익적 기능을 수행한다. 산불 피해 지역은 당장 올여름 집중 호우가 걱정이다. 산불은 앞으로 더욱더 우리 삶을 위협하겠지만, 우리 주변의 경각심은 너무 낮은 듯하다.
그러고 보니 어릴 적 학교마다 열렸던 산불 예방 포스터 그리기 대회가 이제는 산림청이나 산지가 많은 소방서, 학교에서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아 아쉽다. 1980년대~90년대에 흔했던 산불 예방 포스터 그리기 대회는 산불에 대한 국민들의 경각심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 역대 산불 피해 순위(1~10위)에서 2000년 이전 산불이 한 건도 없었던 것만으로도 그 효과는 충분히 입증된다. 대형 산불이 일상화된 지금, 과거 산불 예방 포스터 그리기와 같이 산불 안전 의식을 높일 수 있는 범국민적인 캠페인이 다시 필요한 시점이다.
이대성 사회부 차장 nmaker@busan.com
이대성 기자 nmaker@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