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한국어를 일상에서 쓰는 곳이 있다. 도모다치(友達·친구) 대신 한국어 발음 그대로 ‘チング(친구)’로 쓰고, 친구끼리 놀자고 부를 때도 ‘(같이) ノラ(노라)’라고 한다. 바지는 ‘팟치(パッチ)’로, 밥과 배(선박), 아가씨는 아예 발음까지 같다. ‘도망갔다’를 통째로 음차한 ‘도망캇다’(トーマンカッタ)는 야반도주를 의미한다. 부산에서 50㎞ 떨어진 쓰시마(対馬), 여기서 30㎞ 남쪽에 위치한 이키(壱岐) 이야기다.
■ 한반도 교류 영향 ‘친구’ 상표 소주까지
이키는 일본 보리소주의 발상지로 독특한 맛과 향으로 인기가 높아 일본 전역으로 유통된다. 특이한 소주가 있는데, 상표가 ‘친구(ちんぐ)’다. 이 술을 만든 오모야(重家)주조는 ‘친구’를 상표로 등록한 이유를 한일 교류의 상징성과 지역 정체성을 담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다. 외래어 표기 때는 가타가나(チング)를 쓰는 게 원칙인데, 자국어와 같은 히라가나로 쓴 점에서 이 지역 사람들이 ‘한국 친구’를 대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키섬은 경남 거제도의 3분의 1 크기에 인구 2만 5000명에 불과하다. 그런데 보리소주 양조장은 7곳이나 되고, 양조장 투어까지 인기다. 이 보리소주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증류 기술에서 유래했다고 일본 국세청은 공식 문서로 인정하고 있다. 한국에서 증류 소주의 자리를 희석식 소주가 대체하며 주류로 떠오른 사이 일본은 우리에게서 배운 증류 문화를 발전시켜 오늘날 위스키 선진국 반열에까지 올랐다.
부산에서 이키섬으로 가는 뱃길이 코로나19 때 끊긴 여파가 길어지다 올봄 연결 배편이 취항하면서 다시 문호가 열렸다. 갓 볶은 보리에서 나는 구수함에다 왠지 낯선 산미까지 갖춘 이키 보리소주를 들이켜면서 조선의 ‘스피릿(spirit·증류주)’이 남긴 길고 긴 잔향을 음미했다.
■ 한국 소주(燒酒) vs. 일본 소주(燒酎)
맥주, 와인, 청주 등 발효주에 열을 가해 기화가 빠른 알코올만 추출한 뒤 향미를 더해 숙성한 것이 스피릿, 즉 증류주다. 보리 농사가 잘 된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보리 발효주(즉, 맥주)를 즐기다 증류 기술을 알게 되면서 탄생한 것이 위스키(즉, 스카치)다. 벼 재배 지역에서 청주(한국), 사케(일본)를 즐겼고 이 발효주가 증류 소주로 발전한 것도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니혼슈(日本酒)로 부르는 사케는 쌀 발효주인데, 어원이 우리말 ‘삭히다’라는 설이 있을 정도로 술은 문명 교류와 얽혀 있다. 몽고의 침략을 받은 고려는 몽고군이 갖고 온 소줏고리(증류기)를 통해 스피릿 제조술을 배웠다. 조선 왕조가 무역과 외교 목적으로 쓰시마와 이키에 소주를 하사하면서 증류 기술이 대한해협을 넘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조선 시대의 소주는 귀하디 귀한 존재였다. 쌀 1㎏으로 45도 안동소주 기준 720mL 1병을 겨우 얻을 수 있다. 단순한 음용 목적으로 쓸 수는 없고 제의나 외교에 쓰인 이유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의 임금은 쓰시마에 한 번에 많게는 몇십 병씩 하사했다. 식량 부족으로 수시로 금주령이 내려지던 시절이었으니 지나친 감이 든다. 국경 관리와 무역 경유지로 중요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데, 산지가 많고 농지가 부족한 쓰시마는 곡물이 부족해 소주가 뿌리내리지 못한 반면 이키는 쌀과 보리 농사가 적합한 평야라 증류 문화가 꽃피게 된다.
소주는 ‘불사를 소(燒)’와 ‘술 주(酒)’로 쓴다. ‘끓여 만든 술’이라는 의미다. 일본에서는 증류 소주가 심화 발전하면서 표기까지 달라졌다. ‘술 주(酒)’ 대신 ‘진한 술’, 즉 ‘주(酎)’를 써서 알코올 도수가 높은 술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발효주에는 ‘酒’, 소주는 ‘燒酎’로 써서 구분한다.
■ 구연산 가득한 보리소주
조선 시대에도 맥주가 있었다. 15세기 어의 전순의가 저술한 ‘산가요록’에는 ‘맥주’ 레시피가 서술되어 있다. 멥쌀 한 말로 밑술을 만든 뒤 곱게 찧은 보리쌀 네 말로 덧술을 하라고 되어 있다. 곡물 비율로 보면 쌀 20%, 보리 80%다. 보리로 만든 술이지만, 오늘날의 맥주와는 다르고 ‘보리 막걸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에서는 한때 보리술 명맥이 끊겼지만, 최근 전남 강진, 제주도 등 보리 재배지에서 과거의 보리소주를 재현한 상품이 속속 나오고 있다.
이키의 보리소주도 쌀로 1차 담금하고 2차 발효 때 보리를 추가한다. 곡물 비중은 쌀 3분의 1, 보리 3분의 2. 조선 맥주와 주재료의 비중은 엇비슷하다. 완성된 발효주는 증류를 거쳐 탱크나 오크통에 1년 이상 숙성한다. 숙성 기간과 용기에 따라 풍미가 달라지는 것은 당연지사. 한데, 이키 보리소주의 맛과 향은 특별한 비법 덕분에 다른 지역 소주와 확연히 구별된다.
한국은 산업화 과정에서 타피오카로 발효한 주정(알코올 100%)에 물을 섞어 도수를 낮춘 희석식 소주가 각광을 받았다. 저렴한 데다 무색, 무취, 무미의 특성이 한국의 맵고 짠 음식과 궁합이 맞았다. 일본 소주는 쌀, 보리, 고구마, 메밀 4종류 곡물로 만드는데 제각각 원재료의 풍미가 개성적으로 드러나는 게 특징이다. 고구마소주를 머금으면 고구마 빼때기의 향이 생기발랄해서 강렬한 인상이 남는다. 쌀소주는 은은하고 부드러운 단맛이 강점이다. 메밀소주는 메밀 특유의 고소하고 담백한 향을 느낄 수 있다.
이키 보리소주 맛을 보기 위해 양조장을 찾아 나섰는데, 이키노쿠라(壱岐の蔵)주조, 켄카이(玄海)주조는 무료 견학 프로그램, 자료관, 시음장을 갖추고 있어 친철한 설명과 함께 비교 음미할 수 있었다. 한데, 통상의 구수한 맛을 넘어서는 청량함과 신맛이 도드라진 점은 낯설었다. 익숙치 않은 소주 맛의 비결은 백국균이었다. 사케 제조 때 쓰이는 당화제 역할의 백국균을 이곳 이키에서만 전통적으로 사용한 결과, 맛의 차별화가 이뤄진 것이다. 백국균은 사케 맛의 특징인 구연산을 다량 생성하는데, 그 때문에 소주에서 경쾌한 산미를 느끼는 대목은 신선한 경험이었다.
‘친구’ 소주와의 만남은 행운이었다. 오모야(重家)주조는 코로나19 이후 견학 프로그램을 중단한 상태라 5월말 방문 당시 관람객을 받고 있지 않았다. 코로나19의 시간을 기다려 멀리 부산에서 ‘친구’가 찾아왔다고 하자 흔쾌히 방문을 허락했다. 이키를 떠나며 한일 양국의 친교를 상징하는 ‘친구’ 양조장 견학이 재개되기를 기원했다.
■ 지리적 표시 인증으로 전통 보존
전통주는 지역의 토양과 기후 조건이라는 테루아(terroir)와 함께 지역의 문화가 어우러진 결과다. 프랑스 샹파뉴(Champagne) 지역에서 생산된 특정 방식의 발포성 와인만을 ‘샴페인’으로 부르는 이유다. 세계무역기구(WTO) 협정에 의한 ‘지리적 표시(Geographical Indication, GI)’ 인증제는 지역의 전통을 보존하기 위한 제도다. 그 조건은 해당 지역의 농산물로, 지역 고유의 제법으로 빚은 술에 한정되고 인증을 받으면 저작권으로 인정돼 법적 보호를 받는다.
일본은 소주의 향토성을 보호하기 위해 일찌기 GI 인증을 통해 보호, 육성하고 있다. ‘이키 소주’라는 명칭은 이키에서 생산된 쌀과 보리, 물을 사용하고, 백국균 투입 등 전통적인 제조법을 고수할 때만 사용할 수 있다. 고구마소주로 유명한 가고시마 지역도 ‘사츠마 소주’라는 GI 인증으로 보호받고 있다. 지역의 주력 산업인 농업과 직접 연계되는데다, 향토성과 지역 문화를 대표한다는 점에서 지역 사회의 자부심을 이룬다.
일본의 소주 기술이 한반도에서 전래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증류주 문화가 단절을 겪으면서 지체된 건 아쉬운 대목이다. 하지만 최근 전국 각지에서 증류주 신제품이 도전장을 내고 있는 상황은 반갑다. 쌀소주가 먼저 포문을 열었고, 그 뒤를 잇는 보리소주의 기세도 만만치 않다. 병영, 황금보리소주, 백제보리소주, 가파도 청보리, 진한 블랙, 모리, 번트보리25, 사락, 애 등 전국적으로 다수의 보리소주가 출시되고 있다. 또 고창 복분자주, 진도 홍주, 서천 한산소곡주 등은 GI 인증을 받았다.
이키를 떠나오면서 ‘부산의 향토성’이라는 화두가 머리를 맴돌았다. 고구마 시배지였던 데에 착안한 ‘영도 고구마소주’나, 낙동강 하류 평야 논농사 지역인 점을 살린 ‘강서 쌀소주’는 가능하지 않을까? 지역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데 술만큼 흡입력이 강한 관광 자원은 없다. 금정산성막걸리가 있지만, 지역 특산물과 향토성이 어우러져 스토리텔링까지 가능한 지역의 명품은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고민이 필요한 대목이다.
※ 이키 가는 길 = 대아고속해운의 씨플라워호가 3월 쓰시마 항로에 본격 재취항하면서 부산항~이즈하라항 뱃길이 열렸다. 편도 2시간 30분. 온라인 예약 가능. 이즈하라항에서 이키 아시베항까지는 고속선 비너스호를 타야 한다. 편도 1시간 5분. ‘규슈 유센(九州郵船)’ 한글 사이트에서 예약 가능.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