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전설의 문제가 하나 있다. 2019년 대입 수능 국어의 비문학 영역 31번 문제다. 문제를 이미 접한 이들도 많겠지만 50대 ‘아재’ 세대인 필자는 처음 접하게 된 문제다. 옛날 과학 시간에 보았을 법한 그림과 영어 기호, 어휘들이 마구 등장하는 이 문제를 처음 접하고는 이 문제가 국어 영역에서 나왔다는 게 놀라울 뿐이었다. 아무튼 전문가들이 국어의 비문학 영역이라고 출제한 문제라고 하니 한 번 풀어보기로 했다. 국어 영역이니 매일 글 다루는 입장에서 그래도 문제를 이해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한참을 읽어도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순전히 글만으로 논리를 구성해 이해를 해 보려 해도 부피와 밀도, 질량, 거리 등의 관계를 기본적으로 알지 않고서 저 문제를 푼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저런 분야에 관심을 갖고 기본지식이 있는 이과생에게 훨씬 유리한 문제이므로 국어 영역 평가 대상으로 부적절하지 않나 싶다. 아니나 다를까 그해 이 문제는 킬러문항으로 꼽혔고 지나치게 난해한 출제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자 수능 출제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원장이 직접 송구스럽다며 사과를 했다는 기사가 있었다.
그로부터 7년이 흘렀다. 그 사이 윤석열 전 대통령이 2023년 고교 교과과정을 벗어난 킬러문항 배제 등을 내세우자 수능을 손봐야 한다는 여론이 불붙은 적이 있다. 그해 말 있었던 수능에서 킬러문항이 사라지고 준킬러문항으로 대체됐다는 식의 소식이 전해졌다. 교육 당국은 이 같은 변화를 두고 그동안 출제를 놓고 온갖 시비에 휩싸였던 수능이 정상 궤도에 올랐다고 자평했다. 과연 그렇게 됐을까.
이달 초 마무리된 조기대선은 그 치열함과는 대조적으로 수능을 비롯한 대입 수험생들의 진학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논의가 나오지 않았다. 수시와 정시로 굳어진 대입체계가 해를 거듭해 완전히 자리를 잡은 것으로 봤거나 고등학생이나 수험생들의 현실까지 들여다 볼 여유가 없거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학생들은 수시를 위한 각종 준비에서 과도한 스펙 쌓기에 시달리는 와중에 내신을 위한 교내 시험 준비에다 고교 교과서와는 별개 시험에 가까운 수능을 준비하느라 살인적인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도대체 이 모든 일들을 학생 스스로 다 해낼 수 있어야 한다는 당위론은 어떻게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졌는지가 궁금할 정도다. 자신들도 수험생 시절이 있었다면서 학생들에게 마냥 공부하기만 강요하는 기성세대들은 학생들이 치르는 모의평가라도 한 번 들여다 본 적이 있는지를 묻고 싶다. 그래서 지난 4일 치러진 6월 모의평가를 한 번 직접 들여다 보기로 했다.
■50대 논설위원이 풀어본 국어
수험생들에게 '1교시의 악몽'으로 불린다는 국어에서부터 글을 주로 다루어 온 필자에게도 좌절감을 듬뿍 안기는 문제들이 즐비했다. 출제자가 교과서 내용 암기를 벗어나 상식선의 언어 능력을 평가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짐작되는 국어 10~14번 문제를 상식선의 언어 능력으로 풀어보기로 했다.
일단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지문이 길어 읽고 이해하는 데에만 한참 걸렸다. 그리고 곧장 좌절감이 몰려왔다. 청정 에너지인 수소의 운송 과정 장단점을 암모니아와 비교하고 수소연료전지의 친환경성을 강조하는 게 주요 내용이지만 상세한 화학적 원리 부분은 화학 공부를 손 놓은 지 오래돼 전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고교 과정에서는 이와 관련한 학습이 이뤄지는지 몰라도 글 내용만 가지고 완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니나 다를까 문제는 화학적 원리에 대한 이해를 묻기 시작했다. 다시 지문과 보기를 오가며 읽어봤지만 결국 완전한 이해는 불가능했고 한 지문에 딸린 4개의 문제를 푼 결과 2개나 틀리고 말았다. 화학 원리를 빼고 글만으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인 10번과 어휘를 묻는 13번은 맞췄다는 걸로 위안을 삼기엔 이런 문제를 풀어야 하는 수험생들이 너무 안쓰러웠다.
이에 대해 EBS 측은 수능특강 독서 249~252쪽 지문과 연계돼 있으므로 별 어려움 없이 풀 수 있는 문제였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그 지문조차도 그게 왜 국어의 독서 분야에 나와야 하는 것인지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EBS 측은 수능 연계교재 지문 내용을 학습한 수험생이라면 저 문제 푸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하지만 왜 국어 공부를 하면서 저런 지문의 내용까지 학습을 해야 하는지도 이해할 수가 없다. 저런 지문은 당연히 기존의 문과생에겐 화학 공부를 별도로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텐데 말이다. 국어는 그야말로 언어 이해를 다뤄야 하는 영역이 아니던가.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건 아닌지 헷갈릴 정도다.
수학이나 탐구 영역은 공부를 놓은 지도 오래된 데다 별도의 학습이 필요하므로 관련 분야에 조예가 깊은 분들에게 분석을 맡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수학이 문이과 통합으로 바뀐 뒤 많은 영역이 교과과정에서 빠지고 이에 따라 미분과 극한을 극도로 꼬아 만든 문제들만 새로운 경향이라고 출제되면서 그런 경향을 익히지 못한 수험생들을 수포자로 내몬다는 얘기들이 있으나 개인적인 능력으로는 확인이 어려운 듯해서다.
■공교육을 누가 망치고 있나
아무튼 모의평가를 일부나마 들여다 본 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저런 시험이 공교육을 망치는 주범이 아닐까’였다. 학교 수업과의 상관 관계보다는 차라리 지능검사나 적성검사에 가까운 시험이라는 게 개인적인 인상비평이다. 수능이 처음 등장할 때에도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과목들에 대한 시험이 아니라 그야말로 대학에서 수학하는 데 필요한 적성을 검사해 대학이 참고하도록 하겠다던 게 첫 설계자들의 포부였다. 그런 포부에 비춰 본다면 교과 과정을 벗어나 온갖 적성과 지능을 검사한다고 해도 상관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자신의 아들 딸들이 그런 지능검사 같은 평가를 통해 진학할 대학이 달라진다고 한다면 거기에 동의할 학부모는 과연 얼마나 될까. 많은 학부모들은 지금도 학교에서 공부만 열심히 하면 자신의 아들 딸들이 수능 시험 잘 볼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대입 체계가 완전히 바뀌지 않는 이상 수능은 끝내 지금처럼 교과서와 교과과정을 벗어난 길을 계속 갈 것이다. 그렇게 그 해 수험생들만 해마다 고통을 짊어지고 나면 끝나는 폭탄 돌림이 계속되는 사이 공교육 정상화의 길은 점점 더 멀어질 가능성이 높다. 수능 점수 기반으로 뽑는 정시 모집이 전체의 30%가 되지 않는다는 말만으로 자위하기엔 비루하다. 어차피 대학별 최저 등급을 맞추기 위해서라도 저런 류의 시험에 정력을 쏟아야 하는 건 학생들에게 변하지 않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학부모들이 모르는 사이 수능은 창의력과 응용력, 융합적 사고 따위 화려한 미사여구를 앞세우며 학교 교육과 점점 멀어지면서 국어 영역에서 화학 공부를 해야 하는 식이 돼 버렸다. 담당 과목 교사들도 풀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사교육 없이 학생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돼 버린 이 수능을 정상화하지 않고서는 공교육 정상화는 영원한 구두선으로만 남을 것이라 확신한다.
이상윤 논설위원 nurumi@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