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이 세계 1위 자리를 꿰차는 동안 인천·서울은 12위에 그친 역량.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서울보다 10년, 20년은 뒤처진다는 소리를 들으며 늘 서울 뒤꽁무니를 쫓아가기 바빴던 부산에 서울은 물론 세계 모든 도시를 제치고 세계 1위의 영광을 안겨준 것이 있다면 이를 무기로 한번은 제대로 승부를 걸어봐야 하지 않을까.
노르웨이 메논 이코노믹스(Menon Economics)가 격년으로 발간하는 메논 보고서 〈2024 세계 주요 해양 도시〉는 부산을 해양기술 부문 세계 1위, 해양도시 종합순위 10위로 평가했다. 종합순위로는 세계 1위 싱가포르, 4위 상하이, 7위 도쿄에 이어 아시아에서는 4번째로 높은 수준인데, 다른 영역에서는 받아보지 못한 성적표다. 서울·인천은 해양도시 종합순위 26위, 해양기술에서는 12위를 차지했다. 지역의 한 전문가는 서울과 인천을 다 합쳐도 부산을 못 이기는 유일한 분야가 해양이라고 내심 기뻐했다.
부산은 한국 조선 클러스터의 중심지로서 고부가가치 메가선박과 저탄소 선박 건조, 조선소 선대 규모, 해양기술 기업의 높은 이익, 신조선의 높은 시장 가치, 해양기업의 특허권 수 등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해양기술 1위 자리를 꿰찼다.
해양수산부 이전을 계기로 부산의 산업 전반이 ‘해양’에 초점을 맞춰 발빠르게 체질을 바꿔가고 있다. 부산시는 아예 해양수도 부산의 의제를 발굴하고 선도할 컨트롤타워를 만들기로 했다. 잊혔던 ‘해양 DNA’가 되살아난 듯 ‘아 맞아, 우리가 제일 잘하는 게 이거였지’ 라며 제자리를 찾아오는 느낌이다. 국제문화도시, 블록체인특구, 글로벌금융허브 등 멋져 보이는 키워드가 많지만 다른 도시는 흉내낼 수 없는, 부산만이 가질 수 있는 대표 타이틀은 해양도시다.
해양은 그 확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점에서 더욱 매력적이다. 전통 주력 산업인 수산, 조선, 항만물류는 물론이고, 해양금융, 해양에너지, 해양바이오, 해양기후 등 넓혀갈 수 있는 영역들이 다각도로 많다. ‘노인과 바다’라는 비아냥에나 쓰였던 바다가 부산에 새로운 기회를 가져다줄 ‘내 안의 보물’이란 걸 새삼 깨닫고 있는 듯 하다.
이 중 금융은 특히 해양산업 확장의 핵심 동력이다. 조선업과 해운업, 항만물류 등 굵직한 해양의 영역들은 모두 대규모 자본이 오랫동안 묶여 있어야 해 선뜻 돈을 넣기가 쉽지 않은 구조인데, 그 사이사이에 개입해 자금이 원활하게 돌 수 있게 하는 것이 해양금융의 역할이다. 자금에 숨통이 트이면, 산업에도 활기가 돈다. 예컨대 최근 부산은행이 지역 중형조선사인 HJ중공업에 1만 6000달러에 이르는 대규모 선수금환급보증(RG)를 발급해주면서 선박 건조 계약이 원활히 진행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금융 분야에서는 해양금융을 마중물 삼아 부산을 세계적 해양도시로 키워보자는 고무적인 분위기가 감지된다. 물 들어올 때 배를 저어야 한다는 것이다. BNK부산은행은 조직개편을 통해 선박금융팀을 해양금융부로 격상시키고 본격적인 해양금융 시대 채비를 하고 있다. 부산은행은 그전부터 산업은행에 있던 선박금융 전문가를 스카웃 하는가 하면, 민간은행 중 유일하게 선박금융팀을 꾸린 곳이기도 하다. 공공 영역에서는 한국해양진흥공사가 해양금융을 이끌고 있고, 최근 동남권을 해양금융과 물류의 전진기지로 키우겠다며 북극항로 종합지원센터를 신설했다.
해운사, 조선사들이 부침을 겪는 동안 우리나라 해양금융도 많이 위축이 됐는데 그나마 부산에 전문가들이 포진해 있고, 꾸준히 양성되고 있다. 부산국제금융진흥원의 해양금융센터는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과 협약을 맺고 해양금융 산업 발전을 위한 정책개발에 힘을 합치기로 했다.
금융업계에서는 특히 HMM 부산 이전에 기대를 크게 걸고 있다. 해운, 조선, 선박금융기관, 화주 등 해양금융의 주역들이 모두 부산에 모이게 되는 건 물론이고, 해양법률과 서비스 등 관련 산업들도 부산으로 와 산업 전반이 확대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전문가는 해수부 이전보다 부산에 더 좋은 것이 HMM 이전이라며, 한마디로 “거대 자본 덩어리가 내려오는 것”에 비유하기도 했다.
싱가포르는 국가 정체성을 포트 시티(Port City)로 밀어붙인 덕분에 굳건한 해양도시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노르웨이도 해양기술과 조선업을 바탕으로 재생에너지 강국의 길을 걷고 있다. 부산이 조선, 해운, 해양에너지 기업의 자금 조달 허브가 된다면 한국은 물론 글로벌 투자자들도 너도나도 부산을 찾게 될 것이다. HMM 유치를 위한 적극적인 노력과 함께 해양금융을 위한 조례와 예산 마련, 직제 개편 등 부산시의 더욱 적극적인 행정을 기대한다. 노인과 바다라지만, 부산의 힘은 언제나 노익장 같은 바다에서 나온다.
이현정 경제부 차장 yourfoot@busan.com
이현정 기자 yourfoot@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