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 왕래가 올해 400주년을 맞았습니다. '믿음으로 통한다'는 뜻의 '통신(通信)'은 어감마저 시원합니다. 조선통신사의 의미는 무엇인지, 그 흔적은 어떻게 오늘에 남아 있으며 복원되고 있는지를 톺아보는 글을 네 차례에 걸쳐 싣습니다.
"겹겹이 쌓이고 놀란 물결 속에 목숨이 털끝 같으니, 신(神)의 은혜가 아니면 어찌 무사히 건너겠습니까. 감히 몸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임금의 명령을 받는 일이 급하기 때문입니다. 부디 풍백(風伯)에게 명을 내려 사나운 풍파를 물리치고, 고래를 엎드리게 하며 이무기와 악어가 도망가게 하소서…."(해신제문·海神祭文)
국서를 품고 일본으로 가는 조선통신사 일행에게 가장 무서운 존재는 뭐니 뭐니 해도 쉴 새 없이 일렁이는 바다였다. 그래서 공을 들여 올린 것이 해신제(海神祭)였다. 조선통신사 길은 당시 조선인이 가는 길 중에서 가장 먼, 세상의 끝에 이르는 길이었다. 그 길이 부산에서 비로소 본격적으로 시작됐으며 해신제는 그 길을 여는 장엄한 최초의 의식이었던 것이다.
국조오례의에 준해 치러
해신제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따라 열렸다. 국가의 기강이 되는 최고 규범인 다섯 가지 예를 규정한 것이 국조오례의. 그만큼 중요하게 여겼다는 뜻이다. 해신제는 길례(吉禮)에 속했다. 이런 내용은 1719년 제술관(제문 등 글과 관련한 일을 맡은 직)으로 조선통신사 일원이 돼 일본에 다녀온 신유한의 '해유록(海遊錄)'에 기록돼 있다.
부산에서 재연되고 있는 해신제가 제 모습을 갖춘 것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 두 번째이다. 그 전까지 일반적인 제사상 수준으로 차렸다. 위패도 없이 바나나나 멜론 등 조선시대에 없었던 것까지 올랐는데 조선통신사학회 등의 지적으로 지난해 본격적으로 복원 작업이 시작됐다.
원칙은 '방산시물'(方産時物)
해신제 제사상을 준비하는 원칙은 방산시물이다. 해당 지역에서 나는 그때 재료로 상을 차린다는 뜻. 자연히 부산과 근교의 재료들이 많이 오를 수밖에 없다. 제사상은 크게 좌우로 나뉘어 차려졌다. 오른쪽에는 마른 음식이 '변'(邊·대나무 그릇)에 담기고, 왼쪽은 젖은 음식이 '두'(豆·목기)에 올려졌다. 음양의 조화를 배려한 것.
마른 음식으로는 어숙(대구포), 진자(잣 혹은 개암), 녹포(사슴포), 율황(밤), 검인(가시연밥), 형염(소금), 건조(대추), 능인(마름) 등 8가지가 올랐다. 젖은 음식으로는 어해(물고기젓), 근저(미나리묶음), 탐해(소고기 장조림), 순저(생죽순 묶음), 녹혜(노루고기젓), 토해(토끼고기젓), 청저(생무우 묶음), 구저(생부추 묶음) 등 8가지가 올랐다.
'8변 8두' 차림이다. 황제에게 바치는 가장 큰 제사상 차림인 '12변 12두' 다음이다. 문제는 이 음식을 복원하는 일. '해유록'에는 이름 정도만 소개돼 있고, 전통 조리서에도 조리법이 잘 나와 있지 않다.
▲ 조선통신사는 뭍이 끝나고 물이 시작되는 부산에서 해신제를 열어 새로운 조·일 관계의 복원을 빌었다. 사진은 지난해 처음 복원된 해신제 모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