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사교육시장의 규모는 대단하다. 외국계 투자회사와 펀드들이 줄줄이 국내 사교육업체에 돈을 대고, 조바심에 찬 부모들은 하나 아니면 둘밖에 안 되는 자녀를 공부 잘하게 하려고 사교육에 기대를 걸어본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사교육이 정말 공부를 잘하게 하는 해답이 될까. 이번 주에 소개하려는 사례가 이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있겠다. 이번 주에는 금곡중학교 2학년 백진언(14) 군 이야기를 취재했다. 백 군은 어려운 가정에서 사교육 없이 혼자 공부해 올해 한국과학영재학교에 합격했다. 백 군을 통해 최상위권 아이들의 공부 습관을 알아봤다.
"집안 형편이 공부에 방해되는 건 아냐"
백진언 군은 5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집안 형편이 기울어 지금 살고 있는 영구 임대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평소 건강이 좋지 않았던 백 군의 어머니는 취업을 하려 애썼지만, 경제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하지만 백 군에게서 그런 어려움을 느끼기는 힘들었다. 잘 웃고, 선한 인상에 어리지만 제법 당당하고 의젓한 모습이 배어 있었다. 백 군이 기자에게 건넨 자기소개서에는 "힘든 현실이었지만 절망하지 않고 그 속에서 할 수 있는 만큼 열심히 살았다"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백 군의 어머니는 학원은 보낼 수 없었지만 참고서와 문제집, 책은 여유가 생기는 대로 사 주었고, 절망하거나 슬퍼하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학원의 도움 없이도 학교 공부를 잘 해내고, 특히 수학과 과학에는 영재성을 보였던 백 군이었기에 점점 주변에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선생님들은 경시대회에 나가보라며 권유했고, 부산대 영재교육원에서 공부하는 것도 추천했다. 중1 때는 학교에서 비용을 대신해 주고 영어학원을 수강해주기도 했지만 하루 수업을 듣고 돌아온 백 군은 이내 "저와는 잘 안 맞아요. 혼자 공부하는 게 낫겠어요"라며 수강권을 반납하기도 했다. 실험·실습을 해 볼 기회가 많지 않았던 백 군을 위해 학교 선생님은 과학영재학교 3단계 시험(필기, 실험, 면접 등으로 이루어짐)을 앞두고, 실험을 할 수 있는 학원 특강을 3주가량 듣게 해 준 일도 있었다.
공부는 재밌다
"공부는 그냥 제가 재밌어서 하는 거예요. 재미없이 하는 공부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잘하기 힘들 것 같아요." 사실 이런 말을 털어놓는 학생들은 쉽게 찾아볼 수 없다. 공부가 그저 의무에 가까운 것으로 여겨지는 탓이다. 그런데 백 군은 공부가 재밌고, 특히 수학이 재밌다고 말했다.
백 군이 수학을 좋아하게 된 데 특별한 계기나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취학 이전에 많은 책을 읽다보니 오히려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고, 학교 수업을 지루해했던 백 군이 초등 2학년부터 수학에 흥미를 보이며 집착한 것이 이유라면 이유다. 어머니 백정애(41·여)씨는 "서너살 때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책을 보며 글을 읽기 시작했다"며 "그때부터 혼자 책을 보거나 블록, 색종이를 갖고 놀았는데 책을 너무 많이 본 건지, 학교에 입학하고 한동안은 수업을 심심해하고 학교 가기도 싫어했다"고 전했다.
백 군의 남다른 면이 드러난 것도 이즈음이다. 수학 책을 보고 문제를 푸는 것을 너무 재밌어 하는 백 군에게 어머니는 한 학년 앞선 초등 3학년의 참고서와 문제집을 사줬고 백 군은 꼼짝 않고 3일 만에 문제집을 다 풀어냈다. 신기한 마음에 다시 사다 준 초등 4학년 문제집은 일주일 만에 모두 풀었다. 잘 몰라 물어보는 부분은 어머니가 아는 만큼 설명해 주었지만 점점 혼자 힘으로 자료를 찾고 문제와 씨름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백 군은 "한 번에 쉽게 안 풀리는 수학문제라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끈기를 갖고 풀려고 한다"며 "일주일이 됐든 한 달이 됐든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끝까지 풀어낸다"고 말했다. 다른 공부를 하거나 문제를 풀 때도 풀지 못한 문제가 떠올라 여러 가지 방향으로 풀이법을 머릿속에서 적용해 보면 푸는 방법을 알아낼 수 있다고 한다. 수학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과학영재교육원을 알게 됐고 초등 5학년 때 부산대 과학영재교육원에 합격했다. 과학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배우면서 관심분야가 넓어졌다. 과학동아 같은 잡지도 틈틈이 챙겨봤다. 난이도를 높여가며 수학 문제를 계속 파고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인터넷 도움 톡톡히
공부는 일단 수업시간에 졸지 않고 절대 집중한다. 학교에서는 비교적 자유롭게 수업을 듣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수학, 과학 책을 읽는다. 이런 방식으로 백 군은 자신의 호기심을 채워가고, 배경지식을 얻는다. 수업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면,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진 뒤 책상 앞에 앉는다. 매일 전 과목을 예습, 복습하는 것은 아니지만, 수학과 과학은 꼭 공부하게 된다. 초등 2학년 때부터 매일 한 시간이라도 이런 식으로 혼자 공부해왔다. 물론 처음에는 어머니가 곁에서 챙겨주며 도움도 주셨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공부에 돌입하면서 먼저 교과서와 참고서를 통해 개념을 정리하고 문제들을 차근차근 풀어나간다. 어느 정도 됐다 싶으면 선행, 심화 문제를 풀고, 관련 전문서적을 참고해 읽은 다음 인터넷에서 수준 높은 자료와 문제들을 찾아본다. 참고서와 문제집, 책을 넉넉히 살 수 있는 형편이 되지 않자 무한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인터넷으로 눈을 돌린 것이다.
백 군은 초등 6학년 때부터 KAIST(한국과학기술원) 사이버 영재교육원 사이트에 들어가 평소 잘 보지 못했던 문제들과 과제를 풀어내면서 실력을 쌓아갔다. 해외 사이트에 접속해 각 국가의 독특한 경시대회 문제를 풀어보기도 하고, 최근에는 수학경시대회를 준비하는 상급생 형들이 회원인 인터넷 카페에 가입해 채팅도 하고 수록된 문제들과 정리된 테크닉, 노하우 등을 배우기도 한다.
학교 내신성적도 전교 10등 이내로 훌륭하다. 백 군은 "중1 때는 전 과목 만점을 받는 일도 더러 있었는데, 수학과 과학에 몰두하다 보니 다른 과목들은 대부분 시험기간을 앞두고 한꺼번에 공부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김경희 기자 edu@busa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