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2017 다시 민주주의] 1. 민의와 함께 성장한 정치인

입력 : 2017-01-01 19:53:54 수정 : 2017-01-03 11: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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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에 항거한 '민의', 광장서 민주주의 꽃 되어 피어나다

지난달 27일 부산민주공원에서 문정수 부산민주항쟁기념회 이사장(왼쪽)과 김해영 국회의원이 1987년 '6월 항쟁' 때 부산에서의 투쟁 사진을 바라보며 기억을 나누고 있다. 문 이사장은 당시 부산 북구에서 당선된 초선 국회의원이었고 김 의원은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강원태 기자 wkang@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지난해 가을부터 전국에서 울려퍼진 '헌법송'의 가사다. 광장에 알알이 박힌 촛불들은 헌법이 말하는 '주권재민'의 정신으로 대한민국이 통치됐는지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잠시 잊고 살았던 민주주의를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최근에서야 다시 한 번 더 목격했다. 민주주의의 부재가 강자의 기득권을 견고하게 하고, 서민들의 삶을 더욱 황폐하게 만든다는 것을. 30년 전 6월. 군부 독재에 맞서 뜨거웠던 거리의 함성은 대통령 직선제를 담고 있는 민주 헌법을 낳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6월 항쟁' 이후 민주주의가 후퇴해버린 참담함 속에 살고 있다. 때마침 촛불은 6월의 함성을 다시 불러내면서 민주주의라는 화두를 다시 던지고 있다. 이에 본보는 정치와 사회, 문화, 경제 분야에서 우리 민주주의가 걸어온 길을 다시 한 번 짚어보고자 한다.

문정수 부산민주항쟁기념회 이사장

6월 항쟁 '민주헌법 쟁취' 큰 성과
정치 민주화 속 경제 양극화 '봉착'
촛불집회서 성숙한 시민의식 엿봐

김해영 국회의원
1987년에서야 민주사회로 진입
정경유착이 '흙수저·금수저' 낳아
정치인, 특권 내려놓고 희망 줘야


1987년 6월 부산 동구 자성고가로. 방패로 무장한 전경 앞에서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던 40대의 초선 야당 국회의원은 어느덧 주름살이 가득한 70대가 됐다. 지난해 12월 서울 광화문 광장. 또 다른 젊은 초선 야당 국회의원은 촛불을 들고 성난 민심을 경청했다.

초대 민선 부산시장이기도 한 부산민주항쟁기념회 문정수 이사장과 김해영 국회의원 사이에는 현격한 세대차가 존재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6월 항쟁'과 '촛불 집회'로 표출된 민심의 홍수 속에 몸을 던진 정치인이라는 점에서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6월 항쟁의 기억

문정수 부산민주항쟁기념회 이사장(빨간 점선 안) 등 당시 국회의원과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재야 인사들이 1987년 3월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에 반발해 침묵행진을 벌였다. 부산지역 유월항쟁 자료발간위원회 제공
지난달 28일 오후 문정수 이사장과 김해영 의원은 민주공원에서 만나 6월 항쟁 당시 기억들을 하나하나 펼쳐놨다. 특히 문 이사장은 거리에서 자신이 찍힌 사진들을 가져와 김 의원에게 설명하며 6월 항쟁의 배경도 언급했다. 6월 항쟁을 말하려면 유신 체제 하의 '부마항쟁'과 신군부 쿠데타로 촉발된 '5·18 광주민주화운동'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때부터 쌓이고 쌓인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1987년 6월 항쟁에서 폭발했다는 것.

문 이사장은 "그해 4월 13일 전두환 전 대통령이 직선제 개헌을 하지 않겠다는 호헌을 선언하자 6월 10일부터 본격적인 투쟁이 시작된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나는 부산 북구에서 당선된 신민당 국회의원이었고 신민당 사무처장에 부산시당 위원장을 맡고 있었다"고 말했다.

6월 항쟁 당시 서울과 부산을 정신없이 다니며 시민들과 함께 투쟁에 동참했던 기억이 아직도 문 이사장에게 생생하다. "그때는 국회의원도 거리에서 최루탄에 눈물을 흘리면서 전경들에 쫓기던 시절이기도 하죠. 김 의원은 당시 몇 살이었나요?"

김 의원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그때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고 대답했다. 그럼에도 김 의원은 당시 살고 있던 곳이 시위의 중심지인 서면 일대인지라 그때의 기억이 비교적 선명하다고 한다. 그는 "가장 강력한 기억은 매케한 최루탄 냄새와 시위대에게 떡과 물을 돌리던 아주머니들의 모습"이라고 회고했다. 김 의원은 6월 항쟁 때 친구들과 겪은 일화도 기억해냈다. "한번은 영광도서 근처에 있는 친구 집에서 장기를 두면서 놀고 있는데, 집안으로 20대로 보이는 형 한 명이 뛰어 들어와 집안 장롱 안에 숨겨줬던 기억도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 그 형은 경찰에 쫓기던 대학생이었던 것 같습니다."

■6월 항쟁의 정치적 성과와 한계
1만 5000여 명의 시위대가 서면에서 '6월 항쟁'을 벌이고 있는 모습.
1987년 6월 부산 곳곳에서 날마다 최루탄이 터지고 돌과 화염병이 날아다녔다. 그러더니 어느날 거짓말처럼 승리가 찾아왔다. 군부 정권은 호헌을 철회하겠다는 '6·29 선언'을 발표한다. 문 전 이사장이 꼽은 6월 항쟁의 가장 큰 성과는 무엇일까.

문 이사장은 "박정희, 전두환 독재 정치를 끝장내고 민주 헌법을 쟁취한 게 가장 큰 성과다. 그전까지만 하더라도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뽑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버젓이 벌어졌다"며 "이것을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 바로 잡은 것이다"고 말했다. 김 의원도 "문 이사장의 말씀에 동의한다"고 운을 뗀 뒤 민주 헌법의 우수성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특히 헌법을 놓고 보자면 대통령 직선제뿐만 아니라 국민의 기본권까지 포괄적으로 잘 규정된 진보적 헌법이에요. 1987년에서야 비로서 민주주의의 큰 틀을 만들었고, 이후 민주적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민주주의의 기반을 다진 게 큰 성과로 볼 수 있습니다."

문 이사장에게 6월 항쟁 이후 민주진영이 김영삼과 김대중 세력으로 분리된 게 군부정권의 수명을 늘려줬다는 말을 던져봤다. 그러자 문 이사장도 그 점이 가장 아쉬운 대목이라고 털어놨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이 단일화하지 못 하고 분리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때 노태우 정권이 아닌 민주정부가 탄생했다면 지금 보다 훨씬 더 민주적인 사회가 이뤄지고 오늘의 '최순실 국정농단'도 벌어지지 않았을 거에요."

문 이사장은 또 김영삼 대통령이 선택한 '삼당합당'에 대해서는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는 "일각에서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삼당합당'으로 군부 세력과 야합했다고 비판한다"면서도 "문민정부가 하나회를 척결하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재조명한 업적은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시도였다"고 옹호했다. 그러자 김 의원의 날카로운 지적이 들어왔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문민정부가 민주화에 큰 공헌을 한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이 군부와 손을 잡은 것은 끝내 아쉬움으로 남는 지점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삼당합당으로 지역주의가 고착화됐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불완전한 정치 '흙수저' '금수저'를 낳다

문 이사장과 김 의원 모두 6월 항쟁 이후 문민정부, 국민의정부, 참여정부가 집권하면서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진보적인 정책들이 많이 시행됐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또 우리 정치가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점도 이구동성으로 지적했다.

김 의원은 "6월 항쟁으로 민주적인 정치 토대를 마련했어도, 우리 정치가 근로자의 희생을 강요하고 양극화가 벌어지는 문제까지 바로 잡지는 못 했다"며 "이번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드러났지만, 군부 독재 때부터 시작된 '정경유착'이 아직까지 이어져 국민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히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자신이 정치를 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설명했다. "부모의 빈부에 따라 자식까지 영향을 받는 사회를 고치는 게 저의 사명으로 생각합니다. 6월 항쟁 때만 하더라도 '흙수저' '금수저'가 있었나요?"

문 이사장은 김 의원의 질문에 서글픈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런 말 자체가 아예 없었죠." 그는 "민주 정부가 들어섰어도 부의 세습이 대물림 되는 것을 보고 국민들이 정치에 큰 실망을 느낀 것 같다"며 "촛불 민심을 잘 받아들여 '경제 민주주의' '지방 분권' 등 양극화를 극복할 수 있는 수단을 강화하는 새 헌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실 현행 헌법이 진보적인 헌법이라고 하지만, 충분한 여론 수렴을 하진 못했습니다. 이제 개헌을 위해 사회 각층의 여론 수렴을 시작해야할 시간이 온 거죠."

■촛불로 희망의 정치를

문 이사장과 김 의원은 대화 장소를 촛불 집회가 열리는 서면으로 옮겼다. 서면은 또 30년 전 6월 항쟁 때 부산에서 격렬한 투쟁이 벌어진 장소이기도 하다. 문 이사장은 "6월 항쟁 당시 남포동과 광복동, 부산대 앞에서 시위가 집중적으로 발생했다가 규모가 커지면서 이곳 서면까지 확산됐다"며 "당시는 시위대들이 서면에서 집회를 한 뒤 동구 초량의 KBS 방송국까지 행진하곤 했다"며 회상했다. 문 이사장은 최근 촛불 집회에 참가한 뒤 큰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지난해 12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촛불 집회에 두 차례 참가한 적이 있어요. 30년 전 6월 항쟁 때의 최루탄과 화염병은 아예 자취를 감춰버렸고, 문화행사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해학과 유쾌함이 넘치더군요. 김 의원은 촛불 현장에서 무엇을 느꼈나요?"
두 사람은 같은 날 오후 부산민주공원에서 서면으로 자리를 옮겨 함께 걸으면서 '최순실 게이트'로 촉발된 '촛불 집회'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강원태 기자
"저는 지난해 서울 광화문광장은 물론 부산 서면에서도 몇 차례 촛불 집회에 참가했습니다. 정치에 몸담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묵직한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정치인들이 우왕좌왕할 때 촛불이 국회를 다잡아 대통령 탄핵안 가결까지 가게 만든거죠. 이사장님이 보시기에 앞으로 우리 정치는 어떤 모습으로 바뀌어야 할까요?"

문 이사장은 "희망을 주는 정치를 위해 정치인들이 특권을 내려놓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특권이라는 '꿀단지'가 있으니 자신들의 이권을 챙기려는 사람들이 정치권을 기웃거리는 겁니다. 이제는 정말 봉사할 수 있는 사람이 정치권에 입문해야 한다고 봅니다."

김 의원도 문 이사장의 말에 동의했다. 그는 "또 특권 내려놓기 차원에서라도 정치인들이 국민들의 눈높이에 맞춘 정치를 해야한다. 민도는 계속 올라가고 있지만 일부 정치인들이 30년 전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현실이다"고 덧붙였다.

민주공원과 서면에서 3시간가량 이어진 정치 선·후배의 대화는 쥬디스태화 옆 촛불집회 장소를 걷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좁은 도로에서는 칼바람이 스쳤지만, 두 사람의 가슴 속에 6월 항쟁과 촛불 집회의 열기, 새 정치를 향한 열망이 피어 올랐다. 황석하 기자 hsh03@busan.com

문/정/수

1939년 부산 출생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1968년 국회의원 김영삼 비서관으로 정계입문
1985~1992년 12·13·14대 국회의원 (부산 북구갑)
1995년 초대 민선 부산시장 당선
2014년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사장










김/해/영

1977년 부산 출생 /부산대 법학과 졸업
2009년 제51회 사법시험 합격
2012년~ 변호사
2014년 새정치민주연합 부산시당 연제구 지역위원장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당선 (더불어민주당, 부산 연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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