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희는 올해 서른여덟 살(타블로), 서른일곱 살(투컷), 서른여섯 살(미쓰라) 멤버들로 이루어진 힙합 그룹 에픽하이입니다" 자신들을 대놓고 '아재'로 소개한 타블로의 말처럼 에픽하이는 더 이상 패기로 무장한 이십대가 아니다. 그 대신 음악에 대한 깊이와 여유로움은 더욱 짙어졌다. 점점 나이를 먹으며 한 물간 팀으로 비춰졌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디스전'과 센 척만이 힙합의 전부인 것 마냥 여기는 일부 래퍼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에픽하이 만의 감성은 여전히 주효했다.
올해 데뷔 14년차에 접어든 에픽하이가 2014년 10월 이후 3년 만에 정규 9집 앨범 'WE'VE DONE SOMETHING WONDERFUL'로 돌아왔다. 지난 24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한 한 스튜디오에서 에픽하이가 꿈꾸는 음악과 삶을 들어봤다.
■ 더블 타이틀곡 '연애소설','빈차' 음원차트 석권…'에픽하이표' 감성 힙합 통했다
에픽하이는 힙합 그룹 치고는 상당한 대중성을 지닌 팀이다. 그동안 힙합 음악 특유의 거칠고 무거운 분위기 보다는 부드럽고 서사가 뚜렷한 멜로디로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새 앨범 타이틀곡 '연애소설(feat. 아이유)'은 이별 후 지우고 싶은 기억들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이들을 위로하기 위한 곡이다. '빈차(feat. 오혁)'는 이루지 못할 것 같은 꿈으로 인해 가슴이 아픈 사람들의 기분을 어루만져주는 노래다. 두 곡 모두 힘을 최대한 빼고 툭툭 던지는 듯한 느낌으로 듣는 이들에게 편안하고 아련한 기분을 준다. '연애소설'과 '빈차'는 지난 23일 발매된 이후 각종 음원사이트 1위를 석권하며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있다.
미쓰라는 "사실 별다른 기대가 없었다"며 "1위를 못하면 마음이 아플까봐 애초에 기대를 안했는데 생각보다 성적이 너무 잘 나와서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다. 타블로는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동안 방송 활동도 거의 안했고 팬들 눈에 보이는 자리가 별로 없어서 잊혀 지지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음원사이트 1위에 우리 노래가 올라온 것을 보니까 괜히 눈물이 나더라"고 감격에 젖었다.
그는 "모든 곡에 애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노래가 타이틀곡으로 선정될지는 중요하지 않았다"면서 "지금 우리 나이 때 가장 깊게 느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가 사랑과 꿈이 아닐까 싶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행복한 삶을 꿈꾸지 않나"고 덧붙였다.
'연애소설','빈차' 외에 수록곡 '노땡큐'는 때 아닌 여성 혐오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피처링에 참여한 위너 송민호의 랩 가사 중 'Motherfucker만 써도 이젠 혐이라 하는 시대, shit'이라는 가사가 발단이 된 것이다. 이 부분을 두고 지나친 확대해석이 아니냐는 의견과 조심했어야 한다는 반응이 엇갈렸다.
"여혐 의도는 전혀 없었어요. 노래의 전체 맥락을 살펴보면 주관적인 잣대만으로 어떤 현상을 무분별하게 판단하는 모습을 꼬집고, 그러면서 자아를 찾는 과정을 담아내려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거에요. 물론 가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의견들이 나올 수는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별다른 연관성은 없다고 생각해요"(타블로)

■ 아이유부터 오혁까지, 화려한 피처링 라인업 눈길
앨범에 수록된 총 열 한곡 중 'BLEED'와 '어른 즈음에'를 제외한 아홉 곡이 피처링으로 구성됐다. 메인 보컬이 따로 없는 팀이라는 것을 감안해도 제법 많은 수치다. 탄탄한 음악적 역량을 보유한 스물다섯 동갑내기 아이유와 혁오 밴드 오혁의 가세는 3년 만에 컴백하는 에픽하이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었다.
타블로는 "피처링 덕분에 에픽하이가 더 주목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앨범에 참여해주시는 분들에게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며 "도움을 받은 만큼 우리도 품앗이처럼 항상 베푸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는 피처링 작업에서 중점을 두는 부분에 대해 "그 사람이 가진 능력 외에 특징이나 느낌도 생각한다"며 "노래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어울릴만한 정서를 품고 있는 캐릭터를 찾는 게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아이유가 평소에 시도하지 않았던 스타일이지만, 그래도 아이유에게 어울릴 만한 게 뭐가 있을지 고민한 끝에 탄생한 곡이 '연애소설'이에요"(타블로) '연애소설'은 아이유의 청아하면서도 슬픈 목소리와 에픽하이의 풍부한 감수성이 절묘한 조화를 이뤘다.
투컷은 "오혁은 문자를 받으면 일주일 뒤에 답장하는 스타일이다. 사회생활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나 싶다"면서도 "이번에는 피처링 제안 문자를 보낸 지 5분 만에 답장이 와서 놀랐다. 너무 고마웠고 그날 바로 녹음을 했다"고 웃었다. '빈차'는 '처진 어깨엔 오늘의 무게 잠시 내려놓고 싶어 Home is far away.'라는 서정적인 가사가 오혁의 허스키한 보이스와 어우러졌다.
■ 남편이자 아빠 VS 래퍼 에픽하이, 이제는 음악과 가정 동시에 찾을 때
2003년 데뷔 했을 때 이십대 초반이었던 멤버들은 어느덧 서른을 훌쩍 넘긴 삼십대 가장이 됐다. 이들은 각자의 가정생활과 가수로서의 삶에 모두 만족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한층 성숙해진 삼십대 에픽하이의모습이 보였다.
타블로는 "음악과 육아를 병행하는 것이 너무 재미있다"며 "나는 딸 하루와 친구처럼 지내는 편이다"고 전했다. 이어 "아직 어린 아이지만 최대한 동등한 상황에서 대해주려고 노력한다. 같이 음악 이야기도 하고 놀다가 함께 집으로 가는 따뜻한 느낌이 좋다"고 미소를 지었다.
또 "하루에게 '연애소설'이랑 '빈차'를 들려준 다음 둘 중에 어떤 노래가 더 좋냐고 물어봤더니 '둘 다 좋은데 '빈차'는 조금 슬픈 것 같아'라고 하더라"며 "그래서 '연애소설'도 슬픈 노래라고 알려줄까 말까 고민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가족과 같이 있는 시간, 그 외의 시간에는 늘 음반 작업만 해요. 집 아니면 작업실. 그게 우리 생활의 전부에요"
투컷은 "가정, 음악. 두 가지 생활을 최대한 분리하려고 하는 편"이라며 "아들과 친구처럼 편하게 지내는데, 요즘 보니까 조금 지나친 것 같아서 한 번 벼르고 있다"고 농담 섞인 진담을 던졌다.
타블로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들인데...벼르고 있다고?"라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러자 투컷은 "(아들이) 자꾸 나한테 말을 놓는다"며 현장을 폭소케 했다.

■ 방송 활동은 'NO' 콘서트로 아쉬움 달랜다
정규 9집 앨범의 수록곡 무대는 아쉽지만 음악 방송 프로그램에서 확인 할 수 없다. 점차 방송 출연 빈도를 줄이고 있는 이들은 공연에 집중하기로 했다. 다음달 3일~4일 이틀간 서울 용산구 블루스퀘어 삼성카드홀에서 열리는 컴백 콘서트에서 자신들의 모든 것을 불태우고자 한다. 임창정을 비롯한 특급 게스트도 줄줄이 대기 중이다.
타블로는 "원래 임창정 형님의 게스트 등장은 숨겨뒀다가 '짠'하고 공개하려 했는데 먼저 이야기를 하셔서 조금 당황했다"고 한 후 "무대에 나오면 시공간이 뒤틀릴 정도의 파급력을 지닌 엄청난 게스트가 있다. 그 한명은 우리가 원해도 절대 공개할 수 없다"며 궁금증을 유발했다.
타블로는 이번 공연에 선보일 깜짝 댄스로 방탄소년단의 '불타오르네'를 선정했다. "이왕 도전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가장 센 거부터 시작하려고요. 몸의 한계를 느끼면 선미의 '가시나', 서태지와 아이들의 '컴백홈'으로 바꿀까도 생각 중이에요." 투컷은 타블로를 바라보며 "꼭 '불타오르네'를 마스터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 진지하고 점잖은 에픽하이 "그게 지금 우리의 모습"
에픽하이는 자신들에게 찾아온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나이를 먹고 차분해진 지금의 모습도, 장난기 넘치고 유쾌했던 과거의 모습도 모두 14년이라는 시간을 거쳐 온 에픽하이의 울타리 안에 있다. 멤버들은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지만 '마지막'이라는 순간이 불현 듯 다가올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서 주어진 하루에 최선을 다하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타블로는 "덤덤한 노래들이 많다 보니 진지하고 점잖은 앨범이라고 여길 수 있는데 그게 지금 우리의 모습"이라며 "투컷, 미쓰라도 나처럼 느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나이 들어가는 부분을 애써 감추려 하지 않는다"며 "지금 내가 아이를 키우고, 오래된 친구들을 그리워하면서 생기는 감정을 자연스럽게 풀어내는 게 좋은 것 같다"고 생각을 전했다. "힘들었던 순간을 지나오다 보니까 누군가가 나의 일을 아껴주고 사랑을 준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지를 알게 됐어요. 쭉 인기만 얻었다면 오히려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점들이 지금까지 음악을 해올 수 있는 원동력이 아닐까 싶어요"

이날 인터뷰에서 나온 질문에는 대부분 타블로가 답변을 했다. 공식적인 인터뷰를 부담스러워하는 미쓰라, 투컷의 성향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랜 만에 나온 앨범을 위한 자리였기에 소극적인 두 사람의 모습은 다소 아쉬움으로 남았다. 타블로도 답변을 하면서 미쓰라, 투컷이 말을 별로 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 대해 눈치를 볼 정도였다. 기자가 인터뷰 말미에 미쓰라, 투컷을 직접 지칭하며 질문에 대한 답변을 요청하자 오랜 만에 입을 열었다.
투컷은 "항상 앨범 작업을 할 때 마다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며 "당장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것이고, 스스로 성에 차지 않으면 만족 할 때까지 계속 하는 편이라 그런 것 같다. 정말 열심히 만들었고 후회 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앞서 타블로와 투컷의 이야기를 들은 미쓰라는 "다들 똑같겠지만 절실한 마음을 가져야 에픽하이 다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고 본다"면서 "앨범을 냈을 때 결과물에 실망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지금의 생활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마지막은 아름답고 멋지게 마무리하고 싶다"고 바람을 나타냈다.
에픽하이가 훗날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언제나 음악을 향한 진정성과 번뜩이는 역량이 돋보였던 팀이라는 점이다. 기나긴 세월 속 성공과 좌절을 맛보며 더욱 단단해진 에픽하이는 가요계의 전설로 가기 위한 발걸음을 서서히 내딛고 있다.
사진=YG엔터테인먼트 제공
김상록 기자 sr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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