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신춘문예-단편소설] 6이 나올 때까지 / 조성백

입력 : 2024-01-01 17: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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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노인호 기자 nogari@busan.com 삽화=노인호 기자 nogari@busan.com

당신은 궁금하다. 무엇이? 손바닥에 들어온 정육면체가 1에서 6 중 어느 한 숫자를 내보이기까지의 과정이. 다시, 정육면체를 던진다. 선분의 길이가 2㎝인 정육면체가 북서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채 공중으로 던져진다. 각 면에는 작은 원들이 상하좌우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정렬해 있다.

정육면체는 공중에서 빠르게 돌며 천장을 향한 면을 끊임없이 바꾼다. 1이 천장을, 3이 천장을, 4가 천장을…… 휙휙 지나가는 면들. 호기로운 출발과 달리 그것은 점차 속도를 잃는다. 잠시 후, 매우 느리게 회전하던 정육면체가 초기의 동력을 완전히 상실한 채 어느 한 점에 멈춘다. 정확히는, 멈춘 듯 보인다. 그 찰나를 산술적으로 따지자면 0.00000…1초. 멈췄다 하기에도, 멈추지 않았다 하기에도 애매한, 무한대에 근접하는 최소 시간. 여하튼, 속도가 0에 최대한 가까워지기까지 정육면체가 천장을 향해 내보인 숫자는 2. 4. 3. 5. 1. 4. 2. 3.

날카로운 모서리를 가진 정육면체가 추락한다. 중력의 유혹을 끝내 뿌리치지 못한 그것이 속도를 붙여 하강한다. 그건 시시각각 좌표를 바꾸는 중에도 안달복달하는 아이처럼 가만히 있지 못하고 면을 이리저리 튼다. 그러니까 정육면체는 당신의 검지와 중지, 그 첫 번째 마디를 떠나고서부터 손바닥에 무사히 안착하기까지 빠르고 격하게, 때로는 당신이 인지하거나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느리고 미세하게 면을 트는 것이다.

정육면체는 주먹 안에 있다. 자, 이제 정답을 말할 차례다. 당신은 속삭이듯 6을 말한다. 왜? 특별한 이유는 없다. 별이 반짝이듯 그저 순간적으로 당신의 머릿속에 6이 떠올랐을 뿐이다. 다섯 개의 손가락이 펼쳐진다. 손바닥엔 이열종대로 맞춰선 작은 원들이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고개를 살짝 숙였을 때 내려다보이는 숫자, 곧 4가 정답이 된다. 당신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시 정육면체를 던진다. 원하는 정답이 나올 때까지 계속, 같은 방식으로. 6분의 1 확률을 뚫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나 반대로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정육면체를 던질 때마다 그 방향이나 각도가 미세하게 달라진다. 새로운 이름표가 각 시도마다 붙여지고 정육면체는 그 속에서 상승하고 회전하고 하강하길 반복한다. 당신은 천천히 정답을 읽어나간다. 1. 3. 2. 5. 5. 3. 4. 1…….

12월 3일 18시 55분, 박도일이 태어났다. 마침 그날은 만 오천 년의 주기를 가진 퍼핏 혜성이 타원에 가까운 궤도를 그리며 지구에 초근접하는 날이었다.

“퍼핏 혜성은 일몰로부터 약 한 시간 후 북동쪽 하늘에서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예상됩니다.” 한 천문연구원이 언론 인터뷰를 통해 그렇게 말했다.

당시 박도일의 엄마 김이진은 긴 시간 동안 산통으로 고통스러워했는데 18시 15분이 넘어가자 담당의는 그녀가 아직 아기를 낳을 때가 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는지 막내 간호사 한 명만 옆에 붙여 놓고선 퍼핏 혜성을 보기 위해 건물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그건 김이진의 담당의뿐만 아니라 산모와 필수 인력을 제외한 병원 내 모든 사람이 그랬는데, 그들 중 몇몇은 병원 출입문을 나서며 이런저런 의문을 품었다. 이를테면, 만 오천 년 후에도 퍼핏 혜성을 볼 사람이 지구상에 남아 있긴 할지, 지금으로부터 만 오천 년 전에도 누군가 퍼핏 혜성을 보며 미래의 후손을 운운했을지와 같은 의문들. 그러고는 확률에 대해 생각했다. 무려 만 오천 년에 한 번씩 지구 주위를 들르는 퍼핏 혜성을 볼 수 있는 건 엄청난 행운이라고, 수치로 따지자면 1퍼센트도 안 되는 확률을 뚫은 거라고.

퍼핏 혜성은 천문연구원의 말처럼 일몰 시간으로부터 55분 뒤인 18시 25분에 북동쪽 하늘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혜성이 대기에 끼치는 붉고 푸른빛의 파장은 상당히 강렬해서 해가 졌음에도 불구하고 주위가 그리 어둡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밝은 쪽에 가까웠다. 옆에 선 사람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조차 다 보일 정도로. 군중들의 눈에 퍼핏 혜성은 생의 기운이 응축된 어느 한 점에서 곧장 뒤로 뻗어나가는, 절도 있는 붓놀림의 한 획처럼 보였다. 농도가 점점 옅어지고 비행의 흔적이 넓은 각도로 산개해나가는 꼬리 부분은 잘게 부서지는 포말을 연상시켰다. 병원 앞 공터에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은 오묘한 색을 발하는 점의 움직임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혜성의 모양이나 색깔, 혹은 움직임 속에서 인생의 어떤 정답을 찾을 수 있기라도 한 양. 퍼핏 혜성은 그렇게 약 50분간 하늘에 머물며 북서쪽으로 서서히 가라앉다 어느 순간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혜성이 사라지자 사람들은 그제야 어둠의 짙은 농도를 절감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고개를 젖혀 달을 찾았지만 희미한 별들만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김이진의 담당의는 하늘에 붉고 푸른 기운이 말끔히 사라지고 난 뒤에야 비로소 분만실로 돌아왔는데 그땐 이미 막내 간호사가 어찌어찌 핏덩이를 받아든 후였다.

“트레드 마리오네트 병이에요.” 머리가 희끗한 의사가 말했다.

“네?” 김이진이 물었다.

“희귀병이죠. 그것도 정말 희귀한. 이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은 전 세계적으로 대략 900명 내외, 국내에는 단 다섯 명밖에 없어요.”

어느 날부턴가 박도일의 몸에 엄지손톱만한 작은 혹이 툭툭 튀어나왔다. 그가 세 살이 되던 해였다. 김이진은 걱정되는 마음에 동네 병원을 이곳저곳 찾아다녔지만 의사들은 하나같이 단순 두드러기 증세로 보인다며 먹는 약과 유아용 스테로이드만 처방해줄 뿐이었다. 물론 약은 효과가 없었고 한의원에서 지어 먹인 한약이나 민간요법 역시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결국 김이진은 이곳, 서울의 한 유명 대학 병원에까지 아이를 데리고 와 정밀 검사를 받게 한 것이었다.

“이 병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무서워져요. 지금 아이의 몸에 난 저 작은 종기 같은 거 있죠? 그게 점차 많아질 거예요. 문제는 저게 몸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 간의 합성과 해독 기능을 방해하는 유해 물질을 뿜어낸다는 데 있죠.”

“그러면요?”

“간이 팽창해 뇌압을 상승시키죠. 이런저런 합병증은 거기서 오는 거고요.”

의사는 그 뒤로 한참 동안 이 병을 앓는 환자에 관해 말했다. 대부분 해외 사례였고 하나같이 부정적인 이야기였다. 곧, 트레드 마리오네트 병 환자들은 99퍼센트 20대에 죽는다는, 아직까진 정확한 치료 방침이 없어 해외 사례를 보고 그에 맞게 대응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 김이진은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혔다. 아무 말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도록 누군가 그녀의 성대를 강하게 쥐어트는 것만 같았다. 진료실은 견딜 수 없을 만큼 답답했고 그래서 그녀는 곧 다시 찾아뵙겠다는 말만 남긴 뒤 얼른 방을 빠져나왔다.

박도일은 자신의 몸에 난 작은 종기를 공깃돌이라 불렀다. 공깃돌처럼 작고 각이 지지 않아서였다. 그건 지름이 2㎝ 정도였고 주로 검정색을 띄었는데, 가끔씩 붉거나 푸른끼가 도는 것도 있었다. 공깃돌은 얼굴부터 시작해 가슴, 팔, 다리, 목, 등, 엉덩이, 사타구니, 심지어 검지 안쪽까지, 부위를 가리지 않고 났는데 그중에서도 등이 가장 심했다. 직선거리로 51㎝ 밖에 되지 않는 등골뼈를 모두 덮는 박도일의 자그마한 등판엔 최소 여덟 개의 공깃돌이 무작위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어딘가에 닿을 때마다 심한 통증을 불러일으켰고 그래서 박도일은 수면 중에 몸을 뒤척이다 잠에서 깰 때가 많았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뾰족하게 다듬어진 칼날로 등에 자리 잡은 공깃돌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파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고 무엇보다 공깃돌만 도려낸다고 해서 끝날 일이 아님을 박도일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미 신경 다발과 근육 조직에 깊숙이 침투한 그것의 잔뿌리를 모조리 잡아 뜯지 않는 이상, 공깃돌은 더욱 거칠고 흉포한 형태로 나타날 것이 분명했다.

통증 혹은 그로 인한 불안으로 인해 박도일은 깊은 잠에 들지 못했고 때문에 그는 종종 현실과 꿈을 혼동하곤 했다. 한 예로는 부모님과 함께 가족 여행을 떠난 어느 해변에서 목격한 일. 그는 해변의 이름은 물론이고 어느 지역으로 여행을 떠났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오로지 그의 머릿속에 각인된 건 눈앞에 펼쳐진 풍경. 새파란 하늘, 따갑게 내리쬐는 햇빛, 텅 빈 모래사장, 부서지는 파도…… 그리고 새끼 거북이들. 커다란 암석 더미에서 모습을 드러낸 새끼 거북이들이 바다를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대충 훑어봐도 백 마리가 훌쩍 넘는다. 무리의 움직임 속에 응당 보이는 최소한의 대열도 없이 그것들은 오로지 바다로 뛰어들겠다는 일념 하나로 모래에 파묻혀 잘 보이지도 않는 다리를 마구 휘젓는다. 그건 마치 새카만 조약돌이 데굴데굴 굴러가는 모양새다. 그때 북동쪽 하늘에서 새 한 마리가 등장한다. 머리가 붉고 부리와 발톱이 날카로운 새. 그것의 종(種)이나 이름은 알 수 없지만 새끼 거북이를 노리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땅과 하늘 사이에 팽팽히 당겨진, 보이지 않는 긴장의 끈을 통해 알 수 있다. 하늘을 뱅뱅 돌던 새가 어느 순간 곤두박질치듯 수직으로 낙하한다. 공기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부리 반대 방향으로 길게 내뻗어진 날개. 부리와 날개가 거의 수평을 이루고 있어 멀리서 보면 그건 공중에 새겨진 하나의 짧은 선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아무튼, 그대로 모래사장에 박히는 게 아닌가, 하는 순간 모래가 흩날리고 새는 급격히 고도를 높인다. 그것의 입엔 어느새 거무스름한 물체가 물려 있다. 언뜻 스쳐 지나가는 짧은 다리의 버둥거림. 지면에 거의 닿을 정도로 고도를 낮춘 뒤 표적을 낚아채고 다시 상승하는, 그 간결한 움직임 속에서 새는 시종일관 무표정이다. 다만, 그는 새를 손에 쥐고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것의 세세한 표정까지 볼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고 그 때문에 이 장면이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닌 꿈의 일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새는 이제 왔던 방향의 반대인 북서쪽으로 날아가고 박도일은 고개를 한껏 젖혀 그 모습을 가만히 응시한다. 그때 그의 머릿속을 가득 메운 건 연민이나 분노의 감정이 아닌, 한 가지 의문이다. 바로 백 마리가 넘는 새끼 거북이들 중 왜 하필 저 녀석일까, 하는. 대략 일 퍼센트의 확률을 뚫은, 더럽게도 운이 없는 녀석. 박도일은 이후 새끼 거북이에게 벌어진 일을 알 수 없다. 어쩌다 운 좋게 공중에서 탈출했을 수도 있고, 둥지에서 입을 쩌억, 벌려대는 새끼 새들의 한 끼 식사가 되었을 수도 있다. 아니, 자신을 물고 가던 새와 함께 고양이의 먹잇감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

학교에서 돌아온 박도일은 집에 혼자 있을 때가 많았다. 부모님은 모두 일을 나갔고 같이 놀 친구가 없었다. 반 아이들은 그의 피부 곳곳에 솟아오른 공깃돌을 보고 곰보빵이나 독버섯이라고 놀려대기만 할 뿐 그를 결코 무리에 끼워주려 하지 않았다. 결국 박도일은 집에서 혼자 시간을 보낼 만한 이런저런 놀이를 찾아야 했는데 예를 들면 이런 것이었다.

1) 주사위 던지기 놀이 : 가상의 인물들 다수, 이를테면, A~Z나 ㄱ~ㅎ을 설정한 뒤 몇 차례씩 주사위를 던져 미리 정해놓은, 덧셈과 곱셈으로 이뤄진 간단한 수식에 대입하는 게임. 결과값이 제일 큰 자는 이후 경기에 대한 참가권을 부여받고 제일 적은 자는 제거된다. 참가와 제거가 반복되며 인물들의 운명은 2의 배수로써 결정된다. 그렇게 일차적으로 구분이 되고 나면 이제 50% 확률을 뚫은 자들끼리의 게임이 시작된다. 토막 난 확률 속에서 최후의 일인이 남을 때까지 지속되는 게임.

박도일은 주로 인물들을 대신해서 주사위를 던져주는, 운명의 대언자 내지는 집행자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가끔씩 자신을 게임 속의 한 인물로 집어넣어 경쟁자들과 겨루기도 했다. 승자는 매번 달랐다. 설령 운 좋게 왕위를 지켰다 하더라도 세 번 이상 그 자리를 유지하는 자는 이제껏 한 번도 없었다. 공중으로 던져진 주사위는 그 누구도 영원한 왕좌에 거하지 못하도록 여섯 개의 숫자를 무작위로 내보였다. 그렇게 가상의 인물들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휙휙 돌아가는 주사위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겨야 했다.

2) 인형극 : 팔과 다리가 각각 기다란 실로 연결된, 완성도가 그리 높지 않은 카우보이 인형. 그건 박도일의 아빠 박삼식이 2~3년 전 박도일의 일곱 살 생일 선물로 사온 한 만화 영화 캐릭터였다. 박도일은 아빠가 인형을 어디서 사 왔는지는 몰라도 어색한 표정과 조악한 마감질로 미루어 정품은 아닌 듯하다고 생각했다.

실을 잡은 손을 살짝 오르내리는 것만으로도 카우보이 인형은 팔다리를 마구 흔들어댔다. 그것은 공중에서 세 번 연속 앞구르기를 하기도, 두 발을 머리 위로 동시에 들어올리기도 하는 등, 고난도의 묘기를 선보였다. 기다란 실 이외에도 인형의 등에는 플라스틱 고리가 하나 달려 있었는데 그걸 잡아당기면 심장 부근에서 I have my own way, 라는 말소리가 새어나왔다. 박도일은 그것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음에도 묘한 매력을 가진 그 억양이나 리듬에 끌려 혼잣말처럼 아햅마온웨이, 아햅마온웨이, 하고 노래 불렀다.

당신은 정육면체가 면을 트는, 그 아주 짧은 순간이 궁금할 것이다. 그럼 이제 그것이 공중의 어느 한 점에 고정되었다 가정하고 주사 터널링 현미경을 그 특정 좌표에 갖다 대 보자. 무엇이 보이는가. 먼저, 당신은 물안개 속에 있는 것처럼 눈앞의 모든 것이 흐릿하다. 그러다 점차 시야가 또렷해질 텐데 외곽에서부터 중심부까지, 수없이 많은 구슬들이 미세한 간격을 두고 균일하게 배열되어 있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들은 나뭇가지에 힘없이 매달린 나뭇잎처럼 빠르고 또 가볍게 떨린다. 다만, 각자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닌, 파도를 형성하는 크고 작은 물 알갱이처럼 거대한 흐름 속의 일원으로서 진동한다. 왜? 당신은 이내 그 이유를 알게 된다. 구슬들은 투명하고 기다란 실에 꿰어져 마치 운명 공동체처럼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슬이 무한한 만큼 그것들을 잇는 실 또한 무한하다. 상쇄와 보강을 반복하는, 무한한 실의 파장들. 어느 순간 힘의 균형이 무너지고 특정 면에 충격이 가해진 정육면체가 몸을 틀기 시작한다. 그것은 빠르게 회전하고, 곧 2가 천장을, 5가 천장을, 6이 천장을…….

당신은 주사 터널링 현미경에서 눈을 떼고 이렇게 생각한다. 그럼 구슬들을 요동케 하는 에너지, 다시 말해 실에 가해진 힘만 안다면 정육면체를 던질 때마다 같은 수 혹은 더 나아가서 원하는 수를 나오게 할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건 불가능하다. 왜? 이유는 간단하다. 당신은 일정량의 힘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수많은 조건들을 통제하거나, 심지어 파악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정육면체를 공중으로 51㎝만큼 던져 올리는 데 들어간 힘의 양을 알지 못하고, 또한 그것이 손을 떠나기 전 오른쪽 검지에 난 작은 혹에 얼마큼의 면적으로 얼마간 닿았는지 당신은 결코 알지 못한다. 사실, 이런 논의를 이어나간다면 끝이 없다. 정육면체의 회전에 영향을 미치는 공기의 질, 검지의 갈라짐이나 굴곡 상태, 출발 직전 정육면체가 바라보는 방향이나 그 각도 등등. 결국, 셀 수 없이 많은, 무한대에 가까운 조건들이 실타래처럼 꼬여 1에서 6의 숫자 중 어느 하나를 정답으로 만드는 것이다.

당신은 이제 현미경을 저 멀리 치운 뒤 이렇게 말한다. 그래, 알겠어. 근데, 어찌 되었든 결국 정육면체가 한쪽 면을 내보일 확률은 6분의 1이야. 아무리 그 과정이 어렵고 복잡하다 하더라도 그것만큼은 변함없는 진실이지. 주사위의 모든 눈을 합치면 21이 되는 것처럼 말이야. 당신은 검지에 난 작은 혹에 닿지 않도록 주의하며 정육면체를 검지와 중지의 첫마디에 올려놓는다.

삽화=노인호 기자 nogari@busan.com 삽화=노인호 기자 nogari@busan.com

그리고 속삭이듯 6을 말한다. 왜? 알 수 없다. 어쩌면 오기를 부리는 걸지도. 언제까지 6이 아닌 다른 숫자가 나오나 두고 보자, 하는 마음. 이내 정육면체는 0도부터 시작해 모든 각을 가로지르는 투명한 실들의 너울거림을 느끼며 공중으로 치솟는다. 상승, 회전, 그리고 하강. 당신은 고개를 숙인다. 곧 손바닥에 무사히 안착한 정육면체가 내보이는 정답은 차례대로 5. 2. 4. 1. 3. 3. 2.

박도일의 몸에 점점 더 많은 공깃돌이 솟아올랐다. 그건 어떤 연고나 약으로도 수그러들지 않아 외관상 무척 흉했다. 게다가 두통, 이명, 균형감각 이상 등의 증상이 길게는 몇 개월, 짧게는 며칠의 시간을 두고 복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박도일은 트레드 마리오네트 병의 정확한 증상은 무엇이며 자신의 몸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순 없지만 공깃돌이 치명적인 독소를 뿜어내고 있다는 것만큼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공깃돌의 형상, 그중에서도 특히 피부 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그것의 하단부는 왠지 엄마가 시장에서 가끔 사오는 오징어와 비슷한 모양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지방과 근육을 휘젓는 기다란 다리, 그리고 영양분을 흡수하고 독소를 주입하는 오돌토돌한 빨판.

중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오던 박도일은 심한 어지럼증을 느끼며 길가에 쓰러졌다. 다행히 지나가던 행인의 신고로 그는 구급차에 실려 곧장 응급실로 이송되었다. 얼마 후, 정신을 차린 박도일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건 천장이었다. 네 개의 직사각형 타일이 서로 꼬리를 물며 하나의 정사각형 타일을 빙 두르고 있는 패턴의 천장. 언제 왔는지 모를 엄마는 의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팽창과 상승이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들렸고 엄마의 멍한 눈은 의사나 환자, 철제침대나 출입구가 아닌 새하얀 벽을 향해 있었다. 박도일은 자신이 깨어났음을 그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눈을 감은 채 그날 과학 선생님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자, 그러니까 결론은 뭐라고? 너희들은 자그마치 일억 분의 일의 확률을 뚫고 태어난, 그야말로 초행운아인 거라고.”

박도일은 상상했다. 거대한 원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헤엄치는 자신의 형제들과 치열한 레이스에서 ‘두 번째’로 결승점을 통과하는 자신을. 그리고 만약 기억이 끈 형태로 되어 있다면 분명 그것의 가장 하단부에 미세한 화석으로 존재할,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의식의 수면 위로 끄집어 올리지 못하는 두 가지 장면을.

1) 선두 주자의 뒷모습. 결승선을 앞두고 뭔가에 강하게 부딪힌 선두 주자의 몸이 산산조각난다. 투명한 유리문처럼 뭔가 결승선 앞을 가로막고 있던 것이다.

2) 후발 주자들의 앞모습. 아쉬움 혹은 안도감이 묘하게 뒤섞인, 비슷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구천구백구십구만구천구백구십팔 개의 얼굴들. 후발 주자들은 경기의 승자가 가려짐과 동시에 불 속의 마른 잎처럼 순식간에 스러진다.

“너희가 만약 일등으로 갔다면 막혀 있던 길만 주야장천 뚫다 산화되어 버렸을 거야. 뭐, 당연히 삼등부터 나머지는 다 아웃이고. 결국 뭐야? 애초에 이등만 살아남는 게임이었던 거지.” 과학 선생님은 그렇게 말했다.

박도일은 자신을 원망했다. 결승점을 이등으로 통과한, 몸 전체가 머리와 꼬리만 이뤄졌던 시절의 자신을. 하지만 그건 결코 그가 원해서 된 일이 아니었다. 출발 위치, 운동 속도, 결승점까지의 거리, 코스 형태 등 셀 수 없이 많은 조건들이 맞물려 낳은 결과일 뿐이었다. 원망은 다시 숙주를 찾아 헤매다 새로운 대상에게로 넘어갔다.

‘엄마는 아빠가 결혼 전부터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고 했어. 결국, 정자에 어떤 식으로든 결함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거지. 어쩌면 내가 희귀병을 갖고 태어난 건 이상하거나 우연한 일이 아닐지도 몰라.’

물론 전혀 근거 없는, 망상에 가까운 생각이었지만 박도일은 가끔씩 그것이 사실인 양 느껴졌고 그럴 때면 아빠가 죽었으면, 자신의 죗값을 죽음으로 갚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25톤 덤프트럭 기사인 박삼식은 그의 아들이 15살이 되던 해에 공사 현장에서 무너진 콘크리트 더미에 깔려 죽었다. 지름이 1미터가 넘는 거대한 콘크리트 더미가 몇몇 인부의 부주의로 인해 철근 구조물 한쪽 귀퉁이에서 떨어져나갔고, 그게 곧장 박삼식의 덤프트럭으로 낙하했던 것이다. 더미는 약 15도의 각도로 하강했는데, 만약 그것이 2~3도만 방향을 오른쪽으로 튼 채 떨어졌다면 인명 피해가 더욱 커질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박삼식의 바로 옆자리에 트럭을 정차해 둔 동료 기사는 박삼식의 키 정도 되는, 약 165㎝ 차이로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다만, 원래 그곳은 박삼식이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었다. 그는 그날따라 몸이 좋지 않다는 동료의 부탁을 받고 부랴부랴 대타를 나갔다가 그만 변을 당한 것이었다. 아무튼, 사고 현장이 어느 정도 수습되자 콘크리트 더미가 떨어진 아스팔트 도로엔 빨간색 라커로 큰 점이 찍혔다.

사고가 난 뒤 박도일은 자신이 아빠를 원망했던 사실을 떠올리며 죄책감과 두려움에 휩싸였다. 박도일은 아빠의 평상시 모습을 돌이키며 그가 원망이나 저주의 대상이 되어야 할 만큼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집에 거의 잠만 자러올 만큼 바빴고 술에 자주 취해 있었다는 점만 빼면 그는 오히려 좋은 사람에 가까웠다. 다른 아이들의 아빠처럼 박도일을 때리기는커녕 꾸짖은 적조차 거의 없었고 가끔씩 서프라이즈 선물을 사오기도 했다. 박도일은 오래전 아빠가 생일 선물로 사온 카우보이 인형을 떠올리며 그것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버린 기억은 없으니 아마 집 어딘가, 침대 밑이나 옷장 어딘가에 있을 것이었다. 아무튼, 박도일은 아빠의 죽음 이후로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 혹은 왜 이렇게 태어났는지를 속으로라도 엄마의 탓으로 돌리지 않았다.

사고가 난 뒤 김이진은 생각했다. 혹 박삼식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감내하기 힘든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혹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지 않았을까, 하고. 과거의 시간이 그녀의 의식 속으로 범람한다. 김이진이 박삼식을 처음 만난 건 갑자기 급한 일이 생긴 친구의 부탁으로 대신 나갔던 4:4 미팅 장소에서였다. 주선자는 미리 준비해둔 룰렛에 남자들의 이름을 적은 뒤 여자들에게 다트를 던지도록 했고 그걸로 그날의 짝을 정했다. 김이진은 다트를 정확히 보기 위해 몸을 약간 오른쪽으로 기울였고 이내 그녀가 던진 다트촉은 핑핑 돌아가는 룰렛, 곧 박삼식의 이름 한가운데, 좀 더 정확히는 ㅁ자의 정중앙에서 약간 북서쪽으로 치우친 어느 한 점을 꿰뚫었다. 그렇게 짝이 된 김이진과 박삼식은 서로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들이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웃고 떠든 건 정말 오랜만이라고 생각했다. 며칠 뒤, 박삼식은 김이진에게 애프터를 신청했고 얼마 후 그들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김이진은 그 모든 일련의 과정이, 우연적 사건들의 중첩이 마치 오래전부터 누군가에 의해 예견된 일처럼 여겨졌다.

“……그야말로 행운이죠. 아무튼 다시 종합해 보자면 내일 오후 일곱 시 반에서 아홉 시, 북동쪽 하늘에서 돌리 혜성을 볼 수 있을 겁니다.” 한 천문연구원이 인터넷 방송에 나와 그렇게 말했다. 박도일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돌리 혜성에 대해 알아봤다. 오천 년의 주기를 가진, 최고 밝기는 9등급으로 푸르고 붉은빛의, 초속 67.8㎞의 속도로……. 돌리 혜성은 지금쯤 드넓은, 끝없이 팽창하는 우주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다. 3차원이나 4차원으로는 도무지 표현될 수 없는 세계에서의 특정 좌표를 매순간 갱신하며. 박도일은 오천 년에 한 번씩 지구를 들르는 혜성을 볼 수 있다는 게 과연 천문연구원의 말처럼 행운인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 수 있는 건 많았다. 박도일 자신이 태어난 날 육안으로 관측 가능했다던 퍼핏 혜성은 물론이고 트레드 마리오네트 병에 관해 이제껏 알지 못했던 것 또한. 이를테면, 0.97퍼센트의 완치될 확률이나 25.17세의 평균 기대 수명과 같은 수치들. 박도일은 자신이 기적적으로 1%도 안 되는 낮은 확률에 포함되기는커녕 평균 기대 수명에 훨씬 못 미치는 나이로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왜? 최근 들어 그의 몸 상태가 빠르게 악화되고 있었기에. 공깃돌은 탱탱 부어올랐고 거기선 누렇고 끈끈한 진물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이제 어딘가에 닿지 않아도 심한 통증을 일으켰다. 그 외에도 그는 등골이 저릿해지면서 몸이 굳는 느낌과 함께 가끔씩 발작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박도일의 담당 의사는 매번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는 다 안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일 뿐이었고 엄마의 시선은 항상 새하얀 벽을 비스듬히 향해 있었다. 의사가 처방해준 약은 증상과 상관없이 늘 같았다. 노란색의 타원형 알약 한쪽엔 T/P, 또 다른 한쪽엔 J-C라고 적혀 있는데 그걸 먹으면 통증이 얼마간 누그러들긴 했다.

17살, 겨울방학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은 반 아이들에게 영화 한 편을 보여줬다. 그건 박도일이 어릴 적 대사까지 외울 정도로 즐겨 봤던 카우보이 만화 영화였다. 반 아이들은 영화에 나온, 이마와 턱에 커다란 혹이 하나씩 나 있는 인디언을 가리키며 저거 박도일 아니냐고 자기네들끼리 킥킥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황야에 홀로 선 카우보이가 엔딩 크레딧 너머로 서서히 희미해져 가는 모습을 보며 박도일은 문득 지금은 아스팔트 도로 그 어디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없는 빨간색 점을 떠올렸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카우보이 인형을 찾기 위해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형을 찾았는데, 침대 밑이나 옷장에 있을 거란 예상과 달리 그건 책상 서랍 제일 아래 칸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박도일은 어릴 적 자신이 했던 놀이를 어렵지 않게 떠올리며 인형을 움직여보려 했으나 무슨 일인지 그것의 팔과 다리를 잇는 실이 전부 끊어져 있었다. 다행히 몸통 뒤의 동그란 고리는 아직 그대로였다. 하지만 몇 번이고 당겨 봐도 심장 부근에선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인형을 제자리에 둔 뒤 문을 닫으려던 박도일은 순간 모서리 쪽에 콕 박혀 있던, 귀퉁이가 반질반질할 정도로 닳은 주사위를 발견했다. 그는 그것이 바싹 마른 낙엽이라도 되는 양 조심스레 꺼내 검지와 중지 위에 올려놓았다. 순간, 미골(尾骨)에서 경추까지, 끝부분이 몹시 날카로운 무언가가 등줄기를 타고 빠르게 치솟았다. 온몸이, 특히 공깃돌 부근이 쿡쿡 쑤셨고 불에 데인 것처럼 화끈거렸다. 어쩌면 머지않아 심한 발작을 일으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박도일은 6을 외쳤다. 오른쪽 검지에 크게 자리 잡은 공깃돌에 닿지 않도록 주의하며 주사위를 위로, 높이 던졌다. 그것이 내보인 숫자는 차례대로 4. 2. 4. 3. 2. 5. 1.

박도일은 숫자 6이 나올 때까지 계속, 같은 방식으로 주사위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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