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단상] 벌거벗은 임금님과 광장의 깃발

입력 : 2025-01-13 18: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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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혜규 플랫폼콘텐츠부 차장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문화체육관광부에서 10년간 일하다가 30대 서기관으로 퇴직한 노한동 씨는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에서 공직사회의 ‘영리한 무능’을 폭로한다. “실질적인 문제 해결보다 윗사람의 심기를 맞추는 데” 집중된 시스템 속에서 관료는 “똑똑할수록 조직 우선주의와 상명하복이 가장 유리한 생존 기술임을 더욱 치열하게 터득한다”는 비판이다.

공직사회뿐이겠는가. 관료주의는 현대사회의 모든 조직을 움직이는 핵심 원리다. 한국직업능력연구원이 펴낸 국제성인역량조사 보고서를 보면 한국 노동자는 10년 간격으로 진행된 두 차례 조사에서 일터에서 인지적 역량이 오히려 퇴화했다. 연구진은 원인을 수직적인 조직문화에서 찾는다. 한국 노동시장에서 학력은 고용과 임금 상승으로 이어지지만, 실질적인 역량을 평가하는 시스템은 취약하다는 점도 지적한다.

그 결과 조직의 밑바닥에 냉소와 체념이 쌓인다면 꼭대기에는 작지 않은 확률로 벌거벗은 임금님이 출현한다. 그는 조직과 윗사람의 논리에 영혼을 동기화한 보상으로 일단 권력을 쥐고 나면 권력 연장이나 더 큰 권력을 위해 내달린다. 쓴소리는 배척하고 주위에는 아첨꾼만 남는다. 잘못된 선택으로 조금씩 궤도를 벗어나도 사람들은 입을 다문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와 조직이 모두 벼랑 끝에 서 있게 되는 것이다.

상명하복만이 지상명제일 때 리더는 앙상한 언어로 패거리를 나누고 절대복종을 요구한다. 영화 ‘서울의 봄’에서 12·12 군사반란의 주역을 맡은 전두광 캐릭터는 이런 인물의 전형으로 묘사된다. “인간이라는 동물은 강력한 누군가가 자기를 리드해주기를 바란다”고 속삭이고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이라고 윽박지르는 그를 두고 변영주 감독은 “들은 건 많은데 읽은 건 없는 인물”이라고 요약했다.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 “패악질을 일삼은 만국의 원흉”을 척결하겠다는 비상계엄 선포 담화문의 거친 언어와 국회에 진입한 계엄군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다시 ‘서울의 봄’을 떠올렸다. 비상계엄을 사전 모의한 의혹을 받는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이 육사 출신들로 사조직을 꾸리면서 포섭 대상으로 내세운 “시키면 다 하고, 힘 좀 쓰는 애들”에서는 12·12 군사반란의 주역인 하나회의 절대복종 서약이 어른거린다.

성인역량의 국제 비교 조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주도한다. 한국직업능력연구원은 조사의 의의에 대해 “인적 자본의 주요 지표로, 경제성장, 소득, 사회적 안녕, 불평등, 개인적 행복 등을 예측한다”고 설명한다. 낡고 수직적인 조직문화가 개개인의 역량을 갉아먹고 있다면, 경제성장과 사회적 안녕을 방해하고 불평등은 심화될 것이라는 이야기다. 국가의 발전과 개인의 행복 또한 요원할 것이라는 진단이다.

무능한 행정과 패거리 정치와 성찰 없는 지도자는 개인의 일상부터 나라의 미래까지 촘촘히 좀먹는다. 해를 넘긴 탄핵 정국은 이 교훈을 가장 압축적이고 극단적으로 보여 준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러니 이 혼란의 마지막 장은 한 사람의 퇴장이나 권력의 교체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더 새로운 언어, 더 다양한 정체성, 더 많은 민주주의로, 각각의 구호로 공존하는 광장의 깃발들이 공적이고 사적인 일터로 이어져야 한다.

최혜규 기자 iwil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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