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부터 부산에서는 매일 밤 표 구하기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달 1일 부전역에서 강릉역까지 운행하기 시작한 동해선 열차를 타기 위해서다. 종착역까지 꼬박 5시간 걸리는 ‘근성 노선’이지만 인기는 뜨겁다. 특히 매일 오전 5시 33분 260여 명을 태우고 부전역을 떠나는 첫 차는 이달 말까지 모든 날짜가 매진이다. 유튜브에는 부산에서 강릉까지 ‘왕복 10시간’ 당일치기 여행에 '도전'하는 영상이 높은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다.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는 동해선이 '부산에서 기차 여행의 낭만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노선'이라는 입소문이 나면서 '취소 표 풀리는 시간' 등의 정보가 공유되기도 한다. 취재를 위해 직접 열차를 타려던 기자도 출발 며칠 전에야 표를 확보할 수 있었다.
지난달 21일 오전 5시, 아직 도시철도도 운행하지 않는 이른 시간이지만 부산 부산진구에 자리한 동해선 부전역은 두꺼운 옷차림의 사람들로 북적였다. 역을 찾은 이들 대부분은 이날 5시 33분 강릉역으로 향하는 승객이었다. 역사에서는 특히 방학을 맞이해 여행을 떠나는 대학생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부경대 재학생 손 모 씨는 “졸업 전 친구들과 추억을 쌓기 위해 왔다”라며 “이전부터 가고 싶었던 강릉까지 기찻길이 열렸다는 소식이 무척 반가웠다”라고 말했다.
역사 2층 맞이방 내 편의점도 음료와 김밥, 샌드위치 등을 사기 위해 밀려드는 손님들을 분주히 맞이했다. 부전역 구내 편의점에서 10년 넘게 일하고 있다는 한 점원은 “체감상 지난해 이맘때보다 70%가량 손님이 늘었다”라며 “몇 해 전 울산 태화강역으로 향하는 광역철도가 개통했을 땐 첫차를 타러 온 대부분이 노인들이었는데, 이번엔 젊은 사람들이 눈에 띄게 많다”라고 말했다.
■실내는 편안, 예매는 불편
오전 5시 17분, 승차 안내 방송을 따라 이동한 플랫폼에는 4량으로 이뤄진 빨간색 열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열차 내부는 쾌적했다. 한 호차에 배치된 좌석 수는 56~74석으로 KTX나 SRT와 같은 고속열차와 비슷하거나 약간 많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차체 길이(전장)도 25%가량이나 길어 앞뒤 좌석 간격은 오히려 더 넓게 느껴졌다.
장거리·여행 승객들에게 특히 유용하게 설계된 실내 설계도 눈에 띄었다. 스마트폰 등을 충전할 수 있는 콘센트 2구가 좌석 손잡이 바로 밑에 설치돼 있어, 다른 열차처럼 좌석 아래로 허리를 숙일 필요가 없었다. 양 끝이 U자 모양으로 살짝 튀어나온 좌석 목 받침대는 목을 탄탄하게 지지해 줘 잠시 눈을 붙일 때도 편안했다. 객차 간 연결 통로는 물론, 내부에도 캐리어를 보관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 짐이 많은 여행객들에게 편의를 더했다. 다만 아직 열차 내 자판기가 가동되지 않아 탑승하기 전 물이나 간식을 챙겨야 하는 점은 아쉬웠다.
오전 5시 33분 정시에 부전역을 출발한 열차엔 아직 좌석의 절반가량이 비어 있었다. 빈자리는 열차가 센텀·태화강·포항역 등을 지나며 거의 다 채워졌다. 여행객 외에도 노트북 가방을 들거나 정장 차림의 승객도 눈에 띄었다. 이날 태화강역에서 동해역으로 네 번째 출장길에 오른 이종원(72·울산 남구) 씨는 “직접 운전해 갈 때는 중간에 쉬어야 해서 4시간 넘게 걸렸는데, 기차는 편하게 앉아 3시간 만에 도착할 수 있다”면서도 “하루에 4편밖에 없어 매번 예매가 고역”이라고 말했다.
■다채로운 창 밖 풍경 지루함 덜어
큰 불편함은 없었지만 5시간에 달하는 긴 여정 탓에 지루함은 불가피했다. 다행히 시시각각 바뀌는 다채로운 창밖 풍경이 지루함을 덜어줬다. 부전역을 출발한 열차가 센텀·신해운대·기장역 등을 지날 땐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 부산 도심의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어스름이 남은 울산 태화강을 건너, 경북 경주를 통과할 무렵엔 서서히 떠오르는 태양과 마주했다. 영덕과 울진 등 경북 북부를 통과해 다다른 강원도의 관문 삼척역에서는 산자락을 따라 자리한 거대한 시멘트 공장 단지가 눈에 띄었다.
동해선 열차의 백미는 단연 ‘오션 뷰’다. 동해와 묵호, 정동진 등 동해안의 명소를 지날 때면 창밖으로 드넓은 동해가 펼쳐졌다. 잠들었던 승객들도 일어나 스마트폰을 들고 사진을 찍기에 바빴다. 특히 망상 해수욕장 부근을 통과할 때 나타난 한옥촌과 푸른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은 너무 빨리 지나가 아쉬움을 표하는 승객도 있었다.
바다를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좌석은 창가 쪽의 D열이다. 가장 인기가 많은 좌석이기도 하다. 기자처럼 A·B열 좌석에 앉은 일부 승객은 출입문에 난 창으로 바깥 풍경을 보기 위해 객차 연결 통로에서 서성이기도 했다.
■부산 MZ 맞이로 부산한 강원
오전 10시 31분, 열차가 예정보다 2분 일찍 강릉역에 도착했다. 강릉에서는 이미 ‘동해선 효과’가 나타나고 있었다. 초당순두부마을은 평일 오전임에도 앳된 얼굴의 여행객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강릉의 명물인 초당순두부로 만든 음식을 파는 식당과 카페가 밀집한 곳으로 역에서 시내버스로 15분이면 도착할 수 있어 '뚜벅이’ 여행객들에게 필수 코스로 꼽힌다. 이곳에서 디저트 가게를 운영하는 홍민길 대표는 “보통 1월은 연말보다 매출이 적은데, 올해는 다르다”며 “이전에는 젊은 손님 대부분이 서울 말씨를 썼는데, 이번 달 들어 경상도 말씨도 자주 들린다”고 전했다.
동해선 개통은 강릉 인근 지역 관광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강릉역에서 자동차로 40여 분 거리에 있는 대관령 일대의 체험형 목장은 겨울에 설경과 함께 양 떼에게 먹이를 주는 이색 체험을 할 수 있어서 인기다. 대관령의 한 체험형 목장 관계자는 “원래 부산·울산 지역에서는 단체 패키지 상품으로 관광버스를 대절해 오는 중·장년층이 대세였다”며 “앞으로는 기차를 타고 소규모로 오는 젊은 층이 늘어날 만큼 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속화가 동해선 '롱런' 관건
이번 특수가 ‘개업 효과’에 그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5시간에 달하는 긴 운행 시간 탓에 장기적으로 이용이 줄면, 동해안 지역을 하나의 생활권으로 연결한다는 기대 효과가 반감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현재 부전역에서 강릉역까지 걸리는 시간은 자동차를 이용하거나 부산역에서 서울역을 거쳐 강릉역으로 향할 때와 비슷한 수준이다. 당초 이 구간에는 최고 속도 시속 250km의 고속열차가 도입돼 3시간가량이 걸릴 것으로 기대됐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최고 속도 시속 150km의 ITX 열차가 투입됐고, 강릉~삼척 구간은 선로 개량이 이뤄지지 않아 그마저도 제 속도를 못 낸다.
전문가들도 동해선이 제 기능을 하려면 고속화와 증편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강원연구원 장진영 연구위원은 최근 발표한 정책자료에서 “현재 도입된 열차는 통행시간 절감 효과가 없으며 유발 수요도 기대하기 어렵다”며 “KTX 투입을 통해 동해선을 정상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동우 기자 friend@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