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건 부산닷컴 기자 pressjkk@busan.com | 2025-03-07 07:00:00
지난 2일(현지시간) 열린 제97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고상인 작품상은 사실상 3파전이었습니다.
골든글로브 시상식과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각 작품상을 받은 ‘브루탈리스트’와 ‘콘클라베’도 만만찮았지만, 가장 유력한 후보는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아노라’였습니다.
예상대로 주인공은 ‘아노라’였습니다. 총 6개 부문 후보에 올랐던 ‘아노라’는 남우조연상 하나만 제외하고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각본상, 편집상까지 휩쓸었습니다. ‘브루탈리스트’와 ‘콘클라베’는 각각 3개 부문과 1개 부문 수상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브루탈리스트’는 남우주연상(에이드리언 브로디)과 촬영상, 음악상을 받았고 ‘콘클라베’는 각색상을 챙겼습니다.
세 영화 중 ‘아노라’는 이미 지난해 11월 국내에서 개봉했고, ‘브루탈리스트’도 지난달 12일 관객과 만났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았던 ‘콘클라베’도 지난 5일 개봉해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오스카가 인정한 명작을 극장에서 관람해봤습니다.
‘콘클라베’는 믿고 볼 만한 감독과 배우가 손을 맞잡은 작품입니다. 넷플릭스 영화 ‘서부전선 이상 없다’(2022)로 이름을 알린 에드워드 버거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영국을 대표하는 명배우 레이프 파인스가 주연을 맡았습니다.
로버트 해리스 작가의 동명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 ‘콘클라베’는 교황 선거를 뜻합니다. 진입 장벽이 느껴지는 주제일 수 있는데, 실제 장르는 정치 스릴러에 가깝습니다. 최근 88세의 고령인 프란치스코 교황이 건강 악화로 입원 치료를 받고 있어 조금 더 와닿는 소재이기도 합니다.
극 중 주인공인 로렌스(레이프 파인스)는 평소 교황을 가까이에서 모시며 따르던 추기경 단장입니다. 그러나 교황이 별세하고, 로렌스는 콘클라베 단장으로서 선거를 관리하는 일을 맡게 됩니다.
성품이 올곧고 겸손한 로렌스는 교황직에 욕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추기경들은 다릅니다. 118명의 추기경 선거인단 사이에는 권력을 얻기 위한 암투와 협잡질이 난무합니다.
영화의 전체적인 플롯은 여느 대선 정치물과 유사합니다. 유력한 후보들끼리 눈치 싸움을 벌이고 자기편을 확보하기 위한 치열한 수 싸움이 벌어집니다. 상대방의 비리를 캐내 자신에게 유리한 정황을 만들고,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는 일단 부정하고 봅니다.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자들끼리도 전략을 놓고 날 선 말다툼을 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등장인물들이 정치인이 아닌 추기경들이라는 점은 영화의 큰 차별점입니다. 누구보다 높은 도덕성을 요구받는 추기경들이 정치인들과 다를 바 없는 추잡한 ‘정치질’을 하는 데서 오는 괴리감이 긴장감을 배가시킵니다. 뉴스를 통해 종종 접한 추기경들의 성추문이나 비리 문제도 등장하니 현실감도 상당합니다. 가톨릭 신자라면 불편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또 추기경들이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로 갈려 진영 다툼을 벌이는 양상은 오늘날 정치판에서 너무나 익숙한 광경이라 기시감이 강하게 듭니다. 말로는 통합과 화합을 외치는 종교인들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인 겁니다.
영화는 잘 만든 정치 스릴러물의 필수 요소도 두루 갖췄습니다. 우선 시나리오부터 탄탄합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판세로 흐름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인물들의 감정과 입지가 순식간에 변하는 과정도 개연성 있게 잘 그려냈습니다. 오스카 각색상에 걸맞은 각본입니다.
레이프 파인스의 명연기도 관람 포인트입니다. 내면의 갈등과 복잡한 감정선을 표현하는 눈빛 연기가 명품입니다. 극 중 주요 인물인 아그네스 수녀 역의 이사벨라 로셀리니 역시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임팩트를 남겼습니다. 두 배우가 오스카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과 여우조연상에 각각 노미네이트 된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영화는 포용과 다양성이라는 주제 의식을 직접적으로 전달하기도 합니다. 기억에 오래 남을 법한 명대사들을 통해 관객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전합니다. 극 전반에 깔려 있는 메시지인 인간의 본성과 불완전성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볼 만합니다. 또한 다소 충격적인 결말부에서 로렌스가 내리는 선택 역시 관객의 윤리관을 자극합니다.
미술과 편집도 돋보입니다. 과연 ‘서부전선 이상 없다’를 탄생시킨 감독의 작품답습니다. 이 영화를 극장에서 봐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의상을 비롯한 미장센이 감탄을 자아내고, 다양한 앵글을 활용한 쇼트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편집이 스크린에 빠져들 수밖에 없게 만듭니다.
특히 콘클라베가 진행되는 시스티나성당 일대를 그대로 재현한 것이 아주 놀랍습니다. 미술감독인 수지 데이비스는 외신과 인터뷰에서 “빛과 어둠, 전통과 현대, 남성과 여성의 대비를 강조하며 공간을 설계했다”며 바티칸 정원의 디테일까지 신경을 썼다고 설명했습니다.
의상에서도 정교함이 돋보입니다. 예컨대 의상감독인 리시 크리스틀은 아그네스 수녀의 의상 컬러로 검은색과 파란색을 혼용했습니다. 파란색은 아그네스의 차분하고 냉정한 성격을 상징하는 것에 더해, 붉은색 복장의 추기경들을 상대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조용한 힘을 가진 인물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분석됩니다.
사운드 활용도 탁월합니다. 다양한 현악기를 사용한 음악이 매우 인상적이고, 때로는 숨 막히는 적막으로 관객들을 압도합니다. 웰메이드 정치 스릴러물이 선사할 수 있는 서스펜스를 느끼고 싶다면 ‘콘클라베’를 극장에서 관람해 볼 것을 추천합니다.
참, 이 영화를 감상할 때는 비닐 포장된 먹거리를 챙겨가는 건 자제하길 부탁합니다. 극이 전반적으로 조용한 탓에 바스락거리는 비닐 소리도 주변 관객에게 굉장히 거슬릴 수 있습니다. 기자도 영화 내내 비닐 포장지 소리를 내는 앞자리 관객에게 화가 나 한 마디 할까 했는데, 영화 속 포용과 화합의 메시지에 감복한 덕에 간신히 인내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