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정원 컬처가든|
충무로가 돈 되는 상업영화에만 목숨 거는 요즘, 짙은 여운이 남는 영화를 만나는 일은 드물다. 그런 의미에서 엄태화 감독의 ‘가려진 시간’(16일 개봉)은 귀한 작품이다. 주로 돈 되는 영화를 ‘충무로’라는 공장의 규격화된 틀에서 찍어내듯 생산하는 요즘 영화 세태에 반기를 들 듯 ‘가려진 시간’은 작가주의와 상업주의를 절묘하게 절충한 작품이다.
▲ 엄태화 감독, 신인 같지 않은 아우라
마치 박찬욱 감독이 영화 ‘친절한 금자씨’와 ‘올드보이’로 대중과 평단 두 토끼를 사로잡은 ‘엄청난 능력’을 발휘했을 때처럼 엄태화 감독의 ‘가려진 시간’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면 비약일까. 지나치게 상업적이지도, 지나치게 작가주의적이지도 않은 이 신인감독에게서 박 감독의 아우라가 느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엄태화 감독은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 연출부 출신이다.
무엇보다도, ‘가려진 시간’은 판타지인데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그냥 로맨스도 아니고 ‘허구 덩어리’인 판타지로맨스를 보고 눈물 흘리기란 쉽지 않은 법. 평소 판타지 장르라면 별로 감흥을 느끼지 않는 기자가 눈물 훔친 영화는 ‘사랑과 영혼’(1990) 이후 ‘가려진 시간’이 처음이다.
▲ 믿음-사랑에 관한 현실적 판타지, ‘멈춘 시공간’ 소재 신선
누군가 나를 믿어준다는 것은 힘 나는 일이다. 믿음 없는 사랑은 가짜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 작품은 그런 믿음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여자아이 수린(신은수)은 친엄마를 사고로 잃은 후 의붓아버지와 화노도라는 섬에 이사 온다. 그곳에서 만난 같은 학교 남자아이 성민(이효제). 사고로 엄마를 잃고 공상에 빠져 홀로 지내던 수린에게 엄마 없는 고아 성민이 다가오니 두 아이는 금세 마음이 통한다. 둘만의 암호 같은 부호와 아지트를 통해 교감하며 진정한 친구가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수린은 성민, 그의 친구들과 동굴 폭파현장을 구경하기 위해 산에 올라가고 굴속에서 이상한 돌을 발견한 뒤 갖고 나온다. 성민의 다른 친구가 그 돌에 얽힌 소문, ‘시간을 잡아먹는 요괴’ 이야기를 한다. 이후 머리핀을 떨어뜨렸다며 다시 굴속으로 들어간 수린만 발견되고 성민과 나머지 친구들은 마을에서 감쪽같이 실종된다. 실종된 아이들이 있던 자리에는 돌이 깨져있다. 요괴 이야기가 현실이 된 순간이다. 극중 요괴는 시각적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돌이 깨지면 시공간이 멈추고 깨진 자리에 있던 사람만 멈춘 시공간, 즉 현실이 아닌 ‘가려진 시간’ 속에서 살게 된다. 그곳에서 갑자기 늙어버리고 스무살이 넘으면 ‘멈춘 시공간’에서 다시 시간이 흐르는 ‘현재’로 빠져나와 현재를 사는 사람들과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다. 바로 이 같은 멈춘 시공간이라는 설정이 독창적이며 동화적이다. 타임머신이나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설정(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할리우드 영화는 있어도 그 어느 작품에서도 멈춘 시공간을 다룬 영화는 없었다. 때문에 신선하다.
갑자기 발생한 아이들의 실종사건 후 며칠 만에 홀로 어른이 돼 나타난 성민(강동원). 수린도 처음에는 자신이 성민이라며 다가오는 남자 어른을 믿지 못했다. 그러나 수린은 성민하고만 주고받으며 소통했던 암호가 적힌 그의 노트를 발견한다. 또 성민은 둘만 알고 있던 추억을 계속 이야기한다. 때문에 수린은 외모는 낯설지만 이 어른 남자가 정말 성민이라 믿는다. 이후 어른들이 뭐라 하든 성민의 말을 믿는 세상 단 한 사람이 된다. 성민은 그런 수린을 아끼지 않을 수 없다.
이 유니크한 이야기의 전개는 판타지와 현실을 넘나들며 이뤄진다. ‘가려진 시간’은 남자 관객이 봐도 오글거리지 않을 만큼 판타지로맨스의 중심을 잘 잡았다. 판타지와 현실의 균형을 기막히게 이뤘기에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그 설득의 중심에는 ‘첫사랑’이라는 현실이 있다. 엄태화 감독은 장편영화 데뷔작 ‘잉투기’(2013)처럼 현실과 비현실 세계를 동시에 다뤘다. 생존자 중 성민만 겪는 ‘멈춘 시공간’에 현실적 소재 첫사랑을 더해 황당할 뻔했던 이야기로 관객을 납득시킨다. 남녀주인공 성민과 수린은 서로에게 첫사랑이다. 첫사랑은 누구나 해봤기에 관객들이 공감할 만한 소재다.
▲ 판타지지만 스릴러적인 요소도, 팽팽한 긴장감
영화적 즐거움도 장면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어쩔 수 없는 판타지적 설정인 어른 아이, 강동원이 긴 머리를 나부끼며 처음 등장하는 장면 외에는 판타지 장르지만 허무맹랑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다. 성민이 아이들의 실종사건의 용의자, 살인자로 몰리는 과정에서 그가 쫓기는 장면에선 ‘스릴러가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게 한다. 장면 이곳저곳에서 느낄 수 있는 스릴러적 요소로 지루하지 않다. ‘용한’ 작품이다.
▲ 연기경험 전무한 신은수의 발견, 제2의 김유정
강동원의 꾸밈 없는 자연스러운 연기도 재발견이지만 신인 여배우 신은수의 발견은 깜짝 놀랄 정도다. YG엔터테인먼트 걸그룹 연습생이던 2002년생 신은수는 300대 1 경쟁률을 뚫고 이번 작품에 발탁돼 처음 관객에게 인사하지만 연기를 처음 해봤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아역배우에서 최근 여배우로 성공적으로 성장한 김유정이 보일 만큼 연기성과 스타성 모두를 발견할 수 있다. 신은수는 연기 경험이 전혀 없지만 마치 베테랑처럼 연기했다. 또한 어른이지만 소년 같은 배우 강동원이 아니면 누가 ‘어른아이’ 성민 캐릭터를 연기했을까. 강동원 외에는 어떤 남자 배우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표현도 과장된 것이 아니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쯤, 그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여운을 느낀다. 이어 각본까지 맡은 엄태화 감독 얼굴이 떠오르며 그의 차기작이 무척 궁금해진다.
홍정원 기자 m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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