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지난 21일 미국의 제45대 대통령에 취임한 트럼프 정권을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자니 민튼 베도스 편집장은 '2017 세계경제 대전망'에서 "올해는 세계 각지에서 권위주의적인 정치인들이 약진하는 낯설고 어두운 세계 질서의 서막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그러나 그는 또 어둠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고 터널 끝에는 빛이 있다고도 말했다.
하지만 한국은 지금 끝이 있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낡고 긴 터널 속에 갇혀 있는 느낌이다. 무능하고 탐욕적인 비선 실세가 국정전반에 걸쳐 간여한 정황이 속속 밝혀지면서 많은 국민들을 분노와 허탈감에 빠뜨렸다. 또한 과거 어느 정부도 해결하지 못한 외교적 치적으로 내세웠던 박근혜 정부의 한일 위안부 합의도 좌초될 위기에 처해 있다.
지난해 12월 부산의 시민단체들이 일본총영사관 앞에 평화의 소녀상을 세우자 일본 정부는 올들어 지난 6일 주한 일본대사와 부산 총영사의 일시 귀국, 한일 통화스와프 협상의 중단, 총영사관 직원들의 부산지역 행사 참가 금지, 고위급 경제협의 연기 등의 대응조치를 발표했다.
역사문제와 경제나 사회문화 분야를 분리하자는 일본 측 기존 입장에도 반하는 강경조치는 한국 국민들을 자극하고 분노를 샀다. 일본 정부의 진심어린 사죄와 반성이 없는 합의를 파기하고 재협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가운데 경기도 의회가 독도에 소녀상을 세우겠다고 나서자 기시다 후미오 외상은 `다케시마(일본에서 부르는 독도 이름)는 일본 고유의 영토'라고 비판했다.
국내에서 기시다 발언은 `망언'으로 규정되고 국민적 규탄을 받았다. 이런 한일 간의 치고받기(tit for tat)는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일이지만, 위안부문제가 독도 영토문제로 확대되는 것은 문제 해결을 더욱 어렵게 할 것이다.
한일 간에 영유권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 정부의 기본입장이지만, 독도 소녀상 문제로 양국이 갈등을 빚게 되면 독도 영유권분쟁이 양국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을 국제적으로 확인해주는 역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 또한 위안부와 독도문제를 보는 일본인들의 시각에 차이가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한국에 친근감을 느끼는 일본인들의 등을 돌리게 할 수도 있다.
아베 신조 총리와 일본 정부는 합의대로 10억 엔을 거출했으니 한국 정부도 성의를 보여야 한다면서 소녀상의 이전을 압박하지만, 이것은 위안부 합의 내용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이다. 일본 정부가 10억 엔 거출과 소녀상 이전에 집착할수록 한국 국민과 국제사회는 일본 정부의 진의를 의심할 것이다.
아베 총리의 발언이 위안부는 자발적인 매춘부였으며 국가에 의한 강제연행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일부 국내 지지 세력을 의식한 것일지 모르지만, 위안부가 본인의 의사에 반한 여성에 대한 가혹한 인권 침해였다는 사실은 이미 국제사회에 확고하게 정착되어 있다.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부산의 소녀상이 영사관계에 관한 비엔나협약의 조항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지적했지만, 소녀상에 대한 일본 정부나 국민들의 감정과 국제법적인 측면의 해석은 다른 것이다. 소녀상이 영사기관의 `평온과 대한 교란 또는 그 위엄의 손상(disturbance of the peace of the consular post or impairment of its dignity)'을 해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방 국가와 국민들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소녀상을 대사관이나 총영사관 앞에 세우는 것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2011년 12월 14일 일본대사관 앞에 소녀상이 설치된 직후 교토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노다 요시히코 총리에게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치적 결단을 요구했다. 정상회담에서 이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한 것은 처음이었지만, 아무런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회담은 결렬됐다.
이로부터 4년 뒤인 2015년 12월 28일에 이뤄진 위안부 합의의 핵심은 일본 정부의 책임 인정과 이에 입각한 사죄와 반성 표명, 한국 정부 설립 재단에 일본 정부가 10억 엔을 거출해 모든 위안부 피해자의 존엄과 명예의 회복, 마음의 상처 치유를 위한 사업을 양국 정부의 책임 하에 실시한다는 것이다. 소녀상 이전이나 국제사회에서의 상호비난 자제는 부차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는 것처럼 이면합의(밀약)를 통해 소녀상의 이전이나 10억 엔의 거출이 일본 정부의 유일한 의무라는 것에 우리 정부가 동의하지 않았다면 정부는 앞으로 위안부 역사관 건립 등의 추모사업이나 일본 정부 보유 위안부 자료의 제공 등을 적극적으로 요구하면서 합의의 착실한 이행을 촉구해야 한다.
피해자와 그 유족에게 지급하고 있는 현금이 일본 정부가 책임을 통감하고 사죄와 반성의 뜻을 담아 전달하는 것이라면 사실상 개인보상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위안부 합의 내용을 설명하고 현금 수령 의사를 확인하고 지급하는 과정에서 정부(화해치유재단)와 민간 지원단체 사이에 불신과 갈등이 존재하는 것 같다.
정부는 12. 28 합의가 최선이었다고 자화자찬하지 말고 이들의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설득을 계속해야 한다.
고 김학순 할머니의 고백 이후 사반세기가 지났다. 정부 간 합의로 모든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들이 많다. 그러나 부산의 일본 총영사관 앞 소녀상을 계기로 재연된 위안부 갈등은 한일 간의 역사 화해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다시 한 번 잘 보여주었다.
지금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양국 정부와 국민들 사이에 시각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양국 관계에 파국적인 상황이 초래되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 아닐까.
조진구 고려대 글로벌일본연구원 연구교수(도쿄대학 법학박사, 국제정치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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