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정려원에게 드라마 '마녀의 법정' 출연은 그야 말로 신의 한 수였다. 극중 '마녀'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독종 검사 마이듬 역을 맡은 그는 걸크러쉬와 사랑스러움을 오가며 2개월 동안 시청자들을 울리고 웃겼다. 드라마는 정려원의 열연에 힘입어 방송 전 '약세'라는 평을 깨고 동시간대 시청률 1위로 화려한 막을 내렸다.
오랜만에 '인생작'을 만들어낸 정려원의 재발견이었다. 2000년 그룹 샤크라로 데뷔 후 2002년 배우로 전향한 그에게 '마녀의 법정'을 만난 올해는 잊을 수 없는 한해로 남을 것이다. 아직 마이듬과의 이별이 아쉽기만 한 정려원을 최근 서울 강남구 한 카페에서 만났다.
■ "재미있다는 확신 있었다, 시즌2 제작되면 무조건 할 것"
지난 10월 9일 첫 방송된 '마녀의 법정'은 여성아동범죄전담부에서 근무하는 마이듬, 여진욱(윤현민)의 이야기를 그린 법정 추리 수사극이다. 성폭행, 몰카, 살인 등 파렴치한 범죄들이 나오고 권력층의 비리 등 무거운 소재로 가득한 작품이기에 반신반의 하는 시선들이 많았다. 마침 경쟁작인 '사랑의 온도', '20세기 소년 소녀'가 멜로물이어서 더욱 비교가 됐던 것도 사실.
하지만 뚜껑을 열자 탄탄한 대본,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와 더불어 여성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시킨 '마녀의 법정'에 호평이 쏟아졌다. 종영한지 한 달이 채 안됐지만 벌써 시즌2 제작 요청까지 나오고 있다.
정려원은 "촬영 들어가기 전 배우와 스태프들끼리 대본을 처음 봤을 때 너무 재미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느낀 것처럼 시청자들도 똑같이 봐주실지 조금 걱정됐다"며 "가을이다 보니까 사람들이 멜로물을 더 좋아하지 않을까 싶었고, '마녀의 법정'은 법원이라는 딱딱한 무대를 배경으로 하지 않나. 훌륭한 작품이라는 확신은 있었지만 그것이 대중에게까지 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고 털어놨다.
"이전에 방송된 '란제리 소녀시대'가 높은 시청률을 올리지는 못해서 대부분 '마녀의 법정'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처음 제작발표회 때 목표 시청률을 7% 정도라고 말했는데 전광렬 선배가 혀를 차면서 '16%는 나온다. 너희를 그렇게 못 믿겠냐'고 하시더라고요. 우리는 우리를 믿지만 세상은 믿을 수 없다고 말하고 싶었어요(웃음). 1회부터 6%를 넘겨서 15%로 재공약을 걸기는 했지만 번복하려니까 좀 민망했어요. 나중에는 굳이 수치에 연연하기보다 동시간대 시청률 선두에 의미를 두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그는 "시즌2가 제작된다면 이번에 출연했던 배우들 모두 그대로 함께 가자고 약속했다"며 "정도윤 작가가 이 작품을 3년 동안 준비했는데 대본이 워낙 촘촘하다 보니 쓸 때 피로도가 너무 높았을 것 같아서 걱정은 된다. 아직 오케이 사인을 내리지 않았지만 시즌2 제작 여부는 전적으로 작가의 결정에 달려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 "촬영 내내 핸드폰 보지 않을 정도로 집중, 부담감 컸다"
마이듬은 극을 이끌어 가는 인물이다. 여성 범죄 사건 외에도 엄마 곽영실(이일화)의 행방불명과 연관된 악덕시장 조갑수(전광렬)를 추적하는 마이듬의 모습이 중심 스토리이기 때문. 촬영 내내 핸드폰을 보지 않고 상대 배우의 대본까지 통째로 외우면서 힘과 집중력을 쏟았다. 비중이 컸던 만큼, 역할을 잘해내야 한다는 부담과 압박감으로 인해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다.
"원래 촬영에 들어가면 핸드폰을 잘 안 보는 편인데, 이번에는 유독 그랬던 것 같아요. 스마트폰에 대한 의존도가 갈수록 높아지니까 자꾸 다른 생각이 나고 집중도 잘 안돼서 최대한 잡념을 빼고 연기에만 몰입하려고 했어요. 자신 있는 역할이 아니다 보니까 1~4회까지는 아예 대본을 통째로 외웠어요. 상대방 대본과 지문까지 다 숙지하면 전체적인 그림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길 것 같아서 그렇게 하기로 결심 했죠"
그는 "작품 찍으면서 두려움이 생긴 건 '마녀의 법정'이 처음이었다. 초반부터 마이듬의 분량이 워낙 많아서 부담스러웠지만 내가 무너지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버텼다"며 "나중에는 분량이 조금 줄어들 줄 알았는데 계속 그렇게 가길래 '멘붕'이 왔다. 도저히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때는 중간에 끊고 다시 시작한 적도 많았고 답답한 마음에 몰래 화장실로 가서 소리를 쳤다"고 밝혔다.
"대본까지 다 외우고 중무장을 한 상태에서 촬영을 하는데도 막상 사인이 떨어지면 머릿속이 백지상태가 되곤 했어요. 그럴 때마다 '나는 아직 멀었네'라며 자책도 했고, 자꾸 어딘가로 숨고 싶어지더라고요. 촬영 초반이고 아직 첫 방송도 나가지 않았는데 못하겠다고 말해야 되나 고민한 적도 있었어요. 이런 것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나 혼자 이겨내려 했어요"
■ "피해자들 더 큰 상처 받을까 걱정, 위로된 것 같아서 다행"
'마녀의 법정'은 여성들이 노출된 범죄를 끄집어내며 불편한 현실과 마주했다. 민감한 사항이기 때문에 자극적인 것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정려원은 실제 피해자들이 드라마를 보면서 더 큰 상처를 받지는 않을까 걱정했다고 한다. 다행히 공감과 공분을 동시에 그려내려는 작품의 의도가 명확히 전달되면서 이 같은 우려는 사그라들었다. 또 마이듬이 몰카 피해자가 된 상황을 연기할 때는 마치 자신의 일처럼 분노했다.
정려원은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문제들을 매끄럽게 풀어내지 못하면 비난 받지 않을까 지레 겁도 먹고 부담이 됐던 게 사실이다"며 "우리 드라마가 피해자들의 상처를 더 키우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됐는데 많은 위로가 된 것 같아서 다행이고 뿌듯하다"고 했다.
그는 "실제로 몰카를 당한 경험은 없지만, 그런 상황을 상상하고 나서 온 몸에 소름이 쫙 돋더라. 나중에 몰카범을 연기한 배우가 너무 미워서 진짜 때릴 뻔했다"며 "여자들이 정말 많은 범죄의 타깃이 된다는 걸 알았고, 우리가 평소 뉴스를 보며 그냥 지나친 사건들이 어느 순간 나한테 일어날 수도 있다고 느끼니까 더 와 닿았다"고 떠올렸다.
■ "마이듬 겉으로 잘 우는 편 아냐, 쌓아놓고 한 번에 눈물 터트려"
정려원은 마이듬의 성격과 심리까지 세밀히 잡아내면서 연기를 했다. 정려원이 마이듬인지, 마이듬이 정려원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인물에 제대로 녹아들었다. 단순히 주어진 대본대로 연기하기보다 상황에 맞춘 섬세한 표현력으로 캐릭터를 완성했다. 그런 노력은 여러 가지 장면에서 빛을 발했다.
"4회 엔딩 때 이듬이가 꿈속에서 엄마를 만난 후 눈물 흘리면서 손을 젓는 신이 있었는데, 그때 '엄마'라고 하는 목소리가 보기에는 엄청 떨리고 이상하게 나왔어요. 근데 누구든 아무도 없는 쓸쓸한 집에서 그런 상황에 놓였다면 차분하게 '엄마'라고는 하지 않았을 것 같았고, 그 애절한 감정을 확실하게 그려내고 싶었어요. 이일화 선배께서 '내가 너희를 다 울려버리겠다'는 것처럼 아련한 눈빛을 보내시는데, 동공을 보자마자 제 눈에 지진이 난 것처럼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라고요. 정말 혼을 빼고 울었던 것 같아요"
그는 "8회 때 그토록 찾았던 엄마가 끔찍한 성고문을 당했다는 걸 알았을 때 나오는 리액션에서 원래 지문은 헛구역질하고 조갑수를 만나러 가는 거였는데, 차마 대본을 넘기지 못하겠더라. '조갑수 이xx 진짜 너무하네' 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엄청나게 몰입했다"면서 "이듬이가 그 어느 때 보다 심하게 무너질 것 같아서 그 정도로 표현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마이듬은 겉으로 잘 우는 편은 아니다 보니 무언가 쌓아놓고 한 번에 울었을 때 폭발력이 대단한 캐릭터"라고 이야기했다.
■ "'기승전 로맨스' 되면 비난 받을 줄, 시청자들이 러브라인 원해서 놀랐다"
흔히들 한국 드라마의 문제점으로 꼽는 것이 때와 장소를 막론하고 나오는 로맨스다. 메디컬 드라마에서는 의사가 연애하고, 법정 드라마는 검사, 변호사가 연애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마녀의 법정'은 마이듬과 여진욱의 뻔한 러브라인을 그려내기보다 극의 본래 기획 의도와 메시지를 구현하는데 힘썼다. 그러자 오히려 두 사람의 멜로 비중을 늘려달라고 요청하는 시청자들의 목소리가 커지기도 했다.
정려원은 "로맨스로 빠지면 결국 '검사가 연애하는 드라마였냐'는 비난을 받을 줄 알았다. 6회까지만 해도 너무 기승전 로맨스로 가는 흐름이 되는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시청자들이 멜로 비중을 높여주기를 원해서 굉장히 놀랐다"며 "작가가 더 이상의 로맨스는 없다고 생각하고 마음껏 해보라고 이야기했다. 둘 사이의 사랑을 가로막는 어떤 사건이 있으면 나중에는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고 하길래, 괜히 더 오버하고 김칫국을 마셨다"고 말했다.
"마지막회에서 여진욱이 마이듬한테 키스를 하고 술에 취해 그대로 잠드는 신이 있었는데 그냥 지문대로 가기에는 조금 밋밋한 감이 있어서 '님아 이게 끝? 야 너 먹튀냐'라는 애드립을 넣었는데 반응이 좋았어요. 제가 언제 엄마한테 '님아'라고 했는데 너무 웃기다고 하시는 거에요. 그래서 드라마 중간 중간에 '님아'를 자주 넣곤 했어요”
■ "배우 생활 15년 동안 아직 인기상 받은 적 없어, 정말 욕심나"
오는 31일에는 KBS '연기대상‘이 열린다. 정려원은 현재 대상 후보로까지 언급 되고 있는 상황. 그는 대상에는 욕심이 없다며 손사래를 치면서도 시청자들이 뽑아주는 인기상에 각별한 의미를 두고 있었다.
"거론되는 것 자체는 감사하지만 진짜로 대상을 주시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어요. 제가 15년 동안 연기하면서 아직 인기상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는데, 연기력으로 인정받는 것도 좋지만 '너 인기 많아'라는 것을 이번에 증명하고 싶어요. 인기상은 팬 투표로 하는 거니까 확실한 수치로 남길 수 있는 것 같아서 정말 욕심이 나요"
정려원은 "나의 팬들은 대부분 조용히 지켜봐주고 묵묵히 응원하는 스타일이 많은데, 이제는 격하게 마음을 표현해주셨으면 좋겠다"며 "가끔 팬들이 어디에 숨어 있는 건 아닌가 싶을 때 도 있다"고 웃었다.
■ "'마녀의 법정'은 배우 인생 터닝 포인트, 연기 자신감 붙게 해줘"
정려원에게 '마녀의 법정'은 다른 어떤 작품보다 더욱 각별하게 다가온다. 2013년 '메디컬 탑팀', 2015년 '풍선껌'의 부진한 시청률로 인해 조금씩 정체기가 나타났던 상황에서 '마녀의 법정'은 연기 인생에 중요한 터닝 포인트로 작용했다.
그는 "'마녀의 법정'을 하면서 엄청난 무게감을 견뎌내다 보니까 드디어 내성이 생겼다"며 "앞으로 어떤 역할을 맡게 되더라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붙었다. 이 작품으로 얻은 것이 정말 많다"고 되돌아봤다.
"'재발견’이라는 평가를 자주 듣다 보니 문득 '그렇게 재발견만 되면 나는 도대체 언제 발견이 됐단 거지?'라며 갸우뚱 한 적이 있었어요.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나한테 미처 몰랐던 좋은 면이 정말 많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되겠다 싶더라고요. '매번 새로운 매력이 나올 수 있는 배우라는 건가? 그럼 나는 계속해서 재발견 되야지'라는 느낌으로 그렇게 연기 생활을 이어가고 싶어요”
정려원은 지난 13일부터 15일까지 하루 여섯 번씩 '마녀의 법정' 종영 기념 인터뷰를 진행했다. 기자가 정려원을 만난 날은 15일의 마지막 시간이었다. 이전까지 열일곱 번 동안 인터뷰를 하느라 지쳤을 법도 했지만 "마지막 타임인 만큼 더 힘을 내서 마무리 하겠다"며 눈빛을 반짝였다.
평소 매우 차분한 성격으로 알려진 그는 "인터뷰를 할 때는 마이듬처럼 씩씩하게 변한다. 이듬이에 대해 반복적으로 설명하다 보니까, 내가 마이듬 자체가 된 느낌이 들었다"며 애정을 나타냈다. 또 기자들에게 '연기대상' 인기상 투표를 나한테 한번 씩만 해주면 안 되겠냐는 애교 섞인 요청까지 하는 등, 솔직하고 유쾌한 모습으로 인터뷰 현장을 화기애애하게 만들었다.
아이돌 출신이라는 편견과 부정적인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누구보다도 많은 노력을 했을 정려원. 이제 진정한 연기의 맛을 알아가고 있는 그의 행보가 더욱 기대된다.
사진=키이스트 제공
김상록 기자 sr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