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6월 26일. 일본 도쿄 무도관에선 무하마드 알리와 안토니오 이노키라는 두 거물이 맞붙은 세기의 대결이 펼쳐졌다.
12일 오전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는 알리와 이노키의 '세기의 졸전'이 된 '세기의 대결'을 조망했다.
세기의 대결이 성사된 건 시합이 열리기 1년 여 전. 1975년 3월, WBA&WBC 통합 세계 헤비급 챔피언 무하마드 알리가 농담같은 말을 언론에 내뱉는다. "100만 달러의 상금을 준비할 테니 나에게 도전할 동양인은 없나? 레슬러이든 뭐든 좋다"
무적의 제왕인 알리의 제안을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그때 그 말을 넙죽 받은 건 '신일본 프로레슬링'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흥행을 노리던 안토니오 이노키. "100만 달러에 900만 달러를 더한 1,000만 달러의 상금을 걸자"
애초 입담이 좋은데다 프로레슬링의 엔터테인먼트 속성을 잘 알고 있던 알리는 그뒤에도 이노를 상대로 강도 높은 '마이크 워크'를 펼쳐 보였고 이노키도 이에 대응하며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알리에 비하면 지명도가 떨어지는 이노키는 지속적인 관심 유발을 위해 네덜란드 유도 금메달리스트인 윌렘 루스카와 경기를 벌여 TKO승리를 거두며 몸값을 불려나갔다.(뒤에 루스카는 아내의 병원비 때문에 '짜고치는' 경기를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알리 대 이노키'의 대결이 세기의 대결로 전 세계적인 기대감을 끌어올리는데도 한몫했다.
경기가 열리기 열흘 전 일본에 도착한 알리는 특별한 훈련 없이 도쿄를 관광하며 편안한 시간을 보냈지만 이노키는 두 달 전부터 경기를 중단한 채 몸만들기에 열중이었다.
방심하던 알리는 결전을 6일 앞둔 6월 20일 이노키와의 공개 스파링을 하면서 이노키의 점핑킥에 놀라 몇가지 금지룰을 요구한다. '스탠딩 상태에서 킥 금지'처럼 이노키에게 불리한 조건들이었지만 이노키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시합 당일일 6월 26일, 로얄석 30만 엔, S석 10만 엔, A석 8만 엔, B석 6만 엔이란 고가에도 1만4000석이 모두 매진됐고, 34개국에서 위성생중계로 14억 명이 시청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고 15라운드 내내 레슬링 선수 이노키는 링 위에 누워만 있었고, 권투 선수 알리는 링 외곽으로 빙빙 돌다가 경기가 끝났다. 싸움 같지 않은 싸움의 결과는 무승부. 졸전을 경기가 끝나긴 했지만 이 경기는 훗날 이종격투기를 낳게 한 중요한 시합이었다.
한편, 알리와의 경기로 이노키는 300만 달러의 적자를 보고 법정 분쟁까지 이르지만 뒤에 화해한다. 1995년 평양에서 열린 '평화를 위한 평양 국제 체육 문화 축전''에 참여한 알리는 프로 레슬러 이노키와 릭 플레어의 경기에 입회인으로 나서기도 했다. 1998년 이노키의 은퇴 경기엔 파킨슨병을 앓던 알리가 찾아와 꽃다발을 증정하고, 영화 '알리' 시사회에 이노키가 참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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