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목항
‘드르륵….~’
호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울렸다. 오랜만에 울리는 전화에 순간 놀랐다. 준호는 인도양 항해를 마치고 부산으로 향하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곧 잠이 들 만큼 지쳐 있었다. 하선하자마자 퇴적물 시료를 챙겨 시료 창고에 보관하는 절차까지 마치느라 체력은 거의 고갈된 상태였다. 장목항에 세워 두었던 승조원의 차를 수현과 함께 얻어 타고 이동하던 중이었는데, 모르는 번호가 화면에 떴다. 오랫동안 통화하지 못해선지, 전화를 받는 일조차 낯설게 느껴졌다.
“여보세요.”
“박사님!, 저 삼항사 김해연이에요. 어디까지 가셨어요?. 박사님!, 운항 종료 후에 ‘운항 결과 보고서’를 드렸어야 했는데, 하선할 때 너무 정신이 없어서 전달을 못했어요.”
“아…. 참. 그렇지!”
“어떡하죠?”
“이거 가지고 가셔야, 출장 결과 보고도 하실 텐데….”
“지금 꽤 멀리 왔습니다, 동승해서 부산으로 가고 있는데... 제 메일로 보내주시면 안 될까요?”
“네, 그러면... 그렇게 할게요. 죄송합니다~ 박사님, 챙겨드리지 못해서….”
“아닙니다. 삼항사님, 이번엔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힘든 항해였는데….”
“아니에요. 제가 많이 배웠구요~, 박사님, 기회 있으면 다음에 또 봬요~, 조심히 돌아가시고요.”
삼등 항해사는 벌써 피로가 다 풀린 것인지, 귀항의 기쁨에 들떠 있는지 경쾌한 목소리였다. 전화로는 처음 듣는 삼등 항해사 목소리였다. 항해가 끝나면, 당연히 연구선 운항 결과를 받아야 했다. 운항 결과를 보면, 누가 승선했으며, 언제 어디를 갔다 왔는지, 어떤 일을 했는지 모두 알 수 있다. 잠시 후, 메일이 도착했다. 연구원에 가서 출력하면 되겠지만, 궁금했다. 얼른 파일을 열고 확인했다.
연구과제명: 저위도 인도-태평양 기후변화 연구
총 운항 거리: 4,225 해리
주요 작업: Piston Core
사용 장비명: ADCP, EA600, Giant Piston Core, Chirp, Eco-Sounder...
조사 해역: 인도양 (Ninetyeast ridge 북쪽 끝단)
한 장으로 첨부된 파일에 모든 게 기록되어 있었다. 출항 준비 과정과 보안 요원의 승선과 하선 시각을 분 단위로 기록하고 있었다. 항적도 1부도 첨부되었다. 조금 전 삼항사와 통화하고, 파일을 여는 모습을 보고 있던 수현이 말했다.
“박사님, 저..., 죄송합니다.”
“뭐가?”.
“아침에 입항해서 퇴적물을 옮기고 있었거든요. 그때 삼항사가 브리지에서 박사님께 운항 결과 보고서를 가져가시라고 전하더라고요. 제가 깜박한 것 같아요.”
“아, 그랬구나, 아침에 다들 정신없이 움직이다가 잊었구나.”
“네, 죄송합니다.”
“메일로 받았으니까, 오히려 그게 편하다. 그게 있어야 출장 보고가 되니..나, 참. 아침에 분주하게 움직이다 보니 너한테 고생했다는 말도 못 했구나. 암튼 이번에 너도 고생 많았다.”
“아니에요, 당연히 할 건데요, 뭐. 박사님 말씀대로 열심히 해볼게요.”
“그래, 알았다. 이제 적당할 때 시료 가져다가 분석하는 일만 남았구나.”
준호는 수현에게 고생했다는 말을 한 후, 핸드폰 메일을 다시 보면서 지난 항해를 떠올렸다.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그리고 평생 기억에 남을 경험이었다. 분명 피곤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다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 지난 17일간의 항해가 주마등처럼 펼쳐졌다.
콜롬보항
오래된 도시의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여느 도시처럼 공항 활주로는 바다에서 내륙으로 뻗었다. 활주로가 높은 산에서 바다로 향하는 것보다, 바다에서 육지로 향하는 게 편할 것 같았다. 스리랑카와 같은 지리를 가진 나라에선 어쩌면 그게 순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었다. 기내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콜롬보는 옛 도시의 향기를 품고 있었다. 조금 낡았지만, 흙냄새가 풀풀 나오는 것 같았다. 비행기가 상공을 한 번 선회했다. 바다로 향하려고 몸부림쳤던 케나이(Kenai) 강의 사행이 뚜렷하게 보였다. 이 강은 수만 년에 걸쳐 이 도시를 지켜내면서 받았던 고난을 꾸불꾸불하게 표현하는 듯했다. 강 양옆으로 세워진 유럽풍의 건축물이 희미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파란 바다와 대비가 잘 이루어졌다. 연한 흙색으로 수채화를 반쯤 그려 놓은 것 같았다. 드디어 스리랑카 콜롬보, 반다라나이케 공항. 과거와 현재가 얽혀 있는 공항을 생각했지만, 문득 보이는 디지털 화면과 세련된 구조는 미래를 엿보는 듯했다.
‘흡!’ 콧속 깊이 ‘툭’ 쏘는 것처럼 짙은 냄새가 들어온다.
‘아, 여기가 말로만 듣던 그 콜롬보인가.’
열대 지역 특유의 냄새가 익숙하게 다가왔지만, 공기는 그리 무겁지 않았다. 서너 걸음 내딛자 화사하게 웃는 광고판 모델이 눈앞에 보였다. 전통 의복을 입은 소박하고 정겨운 얼굴이다. 두 손을 모은 그녀의 순수한 미소 아래에는 한 마디가 적혀 있었다. ‘Ayubowan(아유보완).’ 얼른 인터넷으로 ‘아유보완’을 검색했다. 이곳 스리랑카 인구의 70%를 차지하는 싱할라 민족의 언어로 ‘오래오래 사세요’라는 뜻이었다.
‘오래오래 사세요?’
여러 나라 인사말이 있을 수 있다. 왜 하필 ‘오래오래 사세요’일까. 이 짧은 인사말 속에서 스리랑카가 지닌 역사 앞에서 그들에게 숙명처럼 다가왔던 애절함과 질곡진 사연을 상상했다. 화사하게 웃는 광고판 여인의 모습처럼 소박하고 따뜻한 나라일지는 모른다. 질곡의 역사에 배어있는 아픔을 품고 살아왔는지, 소박하고 환하게 웃는 여인의 눈 속에 어딘지 모를 슬픈 눈물이 보였다.
공항에서 빠져나온 후, 준호와 수현은 항구에 정박해 있는 ‘이사부호’로 향하고 있었다. 강을 가로지르면서 고도의 정취를 느꼈다. 오랜 역사의 흔적이 배어있는 골목 골목이 스쳐 지나갔다. 열대 지역이라 찌는 더위가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따가웠지만, 처음 밟은 이국의 정취에 충분히 매료되었다. 도시가 오래되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수백 년 전에 지었을 법한 2~3층 높이의 갈색 건물이며, 건물을 가로지르는 도로 폭은 넓지 않았다. 최근에 도시계획을 세워서 도로를 만들었다면, 최소한 이 거리는 6차선은 되어야 했다. 한편으로 준호는 정겹게 다가오는 고도의 풍경과는 별개로 인도양 항해에 대한 걱정으로 머릿속이 가득했다. 옆에 탄 수현이도 분위기를 아는지, 말없이 시내를 쳐다보다가 차분하게 한마디 한다.
“박사님!, 전 개인적으로 이곳에 한 번 와 보고 싶었어요. ‘콜롬보’라고 하면 뭔가 중세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열대 지역이라 참 궁금했거든요.”
“나도 이곳은 처음이야.”
수현이 계속 이야기한다.
“저에겐 이번 승선이 좋은 기회인 거 같아요. 시료도 얻고, 학위과정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고, 박사님,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수현은 박사과정 1년 차 학생이다. 연구실에서 준호를 도와주고 있으며, 이번 시료를 채취하고 그걸 사용해 학위논문을 써야 했다. 평소에는 서로 바쁘다 보니 얼굴조차 보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이야기하는 편이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는 말이 싫지 않았다. 수현이가 말하는 모습에는 특별한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이번 항해에 임하는 태도가 잘 전달되었다.
“그래, 우리가 같이하는 일이니까. 잘 되겠지! 이번엔 다른 연구팀도 승선해서 시료를 채취하긴 하지만, 17일 동안이나 항해하는 만큼 시료를 채취하는 데는 문제없을 거다. 네가 필요한 시료는 꼭 채취할 수 있도록 하자.”
“네, 고맙습니다.”
수현에게 이번 항해는 무엇보다 시료 채취가 관건이었다. 말은 아끼고 있었지만, 이 항해가 얼마나 중요한지 준호는 그의 태도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평소 자존심이 강해 보이던 그가 ‘잘 부탁드립니다’라고까지 말한 것을 생각하면, 지도교수로서 책임감이 자연스레 어깨에 얹혀 오는 듯했다.
“수현아, 여기 콜롬보 역사 좀 찾아봤니?.”
“아니요, 시료 얻으면 어떻게 연구 계획을 구상할지 고민하고 있어서, 잘 보진 못했고요, 아까 공항 내려서 짐 기다리는 동안에 인터넷으로 잠깐 봤어요.”
“아, 그랬구나. 나도 많이 찾아보지는 못했지만, 명나라 시대 ‘정화’라는 환관 출신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이곳까지 왔던 기록이 있더구나. 그..., 무슨 책이었지?
“네, 저도 그건 알고 있어요. 아마도 남경태 작가의 ‘역사’라는 책 아닌가요. 동양사?”
“아, 그런가?. 맞다 맞아.”
이과 계열이지만, 수현이 책을 많이 읽었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래, 책을 꽤 많이 읽었네?”
“아, 그건 아니어요.”
사실 준호는 남경태의 동양사를 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것도 우연히 알게 된 직장 동아리 모임에 같이 있던 사람이 동양사를 통 모른다고 하면서 꾸짖듯 권해준 책이었다. 아무튼, 수현과 함께 이사부호가 정박해 있는 항구로 가면서 수현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항구에 정박한 연구선 ‘이사부호’ 앞에 도착했다. 항구는 크지 않았지만, 연구선 이사부호가 성큼 눈앞으로 다가왔다. 이사부호는 6천 톤에 가까운 큰 연구선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몇 번 승선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눈에 띄었을지도 모른다.
“박사님, 어서 오십시오. 선장님이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습니다.”
“네, 갑판장님,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잘 계셨죠?, 지난 항차도 만만치 않게 한 달간이나 바다에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건강이 좋아 보이네요.”
“그대로인데요…. 뭐, 지난번 항차는 날씨도 좋았고, 좀 편했습니다. 이번 항차도 날씨가 좋아야 할 텐데…. 아무튼 환영합니다. 빨리 짐 푸셔야죠.”
당직을 서고 있던 갑판장이 반가운 얼굴을 하면서 인사를 건넸다. 정확하게 갑판장의 나이는 모르지만 아마 승조원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갑판장은 연구원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꼬박꼬박 존댓말을 했다. 준호도 연구원에 꽤 오래 있었고, 1년에 한 번 정도는 승선하고 조사할 기회가 있었다. 갑판장과는 여러 번 배를 같이 탔다. 준호는 갑판에 오르면서, 갑판장과 간단한 대화를 했고, 수현을 갑판장에게 소개해 주는 걸 잊지 않았다.
후갑판 문을 열고 식당으로 갔다. 호텔처럼 깨끗하거나, 잘 정리된 모습은 아니었지만, 몇 개의 테이블이 고정되어 있고, 통로 옆에는 커피 머신도 있었다. 다소 투박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편이었다. 더군다나 이사부호가 취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배 전체가 아직은 새 배 특유의 청결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2~30명 정도가 한꺼번에 식사할 수 있는 식당은 예전 기억과는 조금 달라진 듯했다. 새로 장식한 것처럼 깨끗한 식당 커버로 테이블을 덮고 있었다. 수현은 식당으로 들어오면서, 바깥 열기를 식혀주는 식당이 시원하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박사님, 엄청 시원하고 좋네요.” 이사부호가 처음인 수현이 조금 감탄스럽다는 듯 얘기한다. 준호는 후갑판에서 실험실로 들어서는 순간 그걸 느꼈는데, 수현은 이제야 그걸 이야기하고 있었다. 배에서는 에어컨 바람이 세다. 대부분 철로 만든 배가, 뜨거운 햇볕을 받으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내부 온도가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후갑판과 연결된 실험실은 항상 문을 닫고 있다. 이곳을 통해 선실과 외부를 차단하고 있다. 식당은 실험실에서 좁은 복도를 지나 배의 중간쯤인 1층에 있다.
준호는 새롭게 비치된 정수기에서 물 한 컵을 급하게 들이켰다. ‘아, 시원하네!’ 하며 혼잣말처럼 이야기한다. 공항에 내릴 때부터 수현에겐 백 팩이 있었고, 그 백 팩 옆 포켓에는 생수병이 꽂혀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도 수현은 그걸 여러 번 먹고 있었다. 준호는 목이 말랐지만, 그 물을 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백 팩도 없었고, 큰 트레일러 하나에 짐을 꾸겨 넣고 이곳까지 온 터였다. 수현은 물을 먹는 대신에 이번 항해에 참여한 연구원 명단과 할당된 침실을 게시한 게시판을 보고 있었다.
“이 선장님, 오랜만입니다.”
땀으로 온몸을 젖힌 그는 ‘어, 왔네!’라고 대답 겸 인사를 한다.
이 선장과 준호는 잘 아는 사이다. 예전에 갑판장과 비슷하게 연구선을 타면서 친구처럼 가까워진 사이가 되었다. 이 선장도 연구원에 온 후 항해사를 거쳐 선장이 되었다. 호리호리한 이 선장은 좀 까다로운 사람이다. 준호가 선장실 문을 두드렸을 때도, 그는 러닝머신 위에서 뛰며 체력을 관리하고 있었다. 준호와 언제 처음 만났는지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지만, 족히 10년은 넘은 듯했다. 나이는 좀 많았지만, 이 선장이 먼저 친구처럼 지내자고 해서 지금은 스스럼없는 사이가 됐다. 하지만 여러 사람이 있거나, 승조원이 같이 있을 때는 꼬박꼬박 존댓말을 해야 했다. 연구선에서 절대 권력을 가진 선장을 쉽게 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러 면에서 그는 좀 까다롭고 자존심도 센 사람이다. 항해사로 있으면서, 잠깐 육상 근무하는 동안에 박사과정에 입학했고, 결국 학위까지 마무리했다. 연구원에는 박사 타이틀을 가진 사람이 많아서, 좀 자존심 상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준호는 철저한 자기관리가 오늘의 선장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원칙을 지키고자 한다는 것은 타협이 여지가 어렵다는 것일 수도 있다. 준호는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공과 사를 분명히 구분해 대하고자 했다. 선장 역시 그런 준호의 태도를 이심전심으로 느끼는 듯했다. 이번은 인도양 조사를 위해서 콜롬보에서 만났지만, 평상시에는 거의 만날 수 없다. 연구원 전체 체육대회가 있거나, 연초에 열리는 시무식에서 가끔 볼 수 있을 뿐이다.
“현 박사, 사람들이 거의 다 밖으로 나갔어. 한 달 동안 배 안에 갇혀 있어서, 여기 오니 다들 나가더라고.”
“아…. 어쩐지 사람들이 없더라!”
“내일 날씨가 나쁠 것 같아서, 모래 출항하기로 했는데, 오늘 저녁은 시내에서 승조원과 연구원 간 상견례도 할 겸 해서 미리 계획을 짰어. 잘했지?”
“그렇구나, 잘했네…. 그럼, 식당도 다 섭외된 건가?”
“당연하지, 지금쯤 앞에 나간 사람들은 시내 구경하고 있을 거야. 현 박사는 짐 풀고 나하고 같이 가자고...,여기저기 둘러보다가 예약했다는 식당으로 가면 되니까”
“오케이, 오케이. 뭐가 일이 너무 쉽게 풀리는 거 같네. 하하” 준호는 선장과 그렇게 간단한 인사를 하고, 침실로 가서 짐을 풀어놓고 30분 후 갑판에서 만나기로 했다. 침실로 가는 동안 각 침실 앞에는 이번 항해에 참석하는 연구원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준호의 방은 후갑판이 쉽게 보이는 2층에 마련되어 있었다. 입구에는 ‘수석연구원’이라는 이름표도 붙어 있었다.
선장이 운항에 대해 모든 권한을 가진 것처럼, 준호는 이번 항해에서 연구 책임자이기에 수석연구원으로 승선했다. 보통 항해를 나갈 땐 칩사(chief scientist)라고 부른다. 이번 항차에서 연구 부분에 관해선 모든 책임과 권리는 준호에게 귀속된다. 하지만 연구팀은 꼭 한 팀이라야 되는 것은 아니다. ‘이사부’라는 대형 연구선을 운영하는데 많은 재원이 소요되기 때문에, 이 배를 활용하고 싶은 연구단체나 팀은 연구 지역이 비슷하면 같이 승선해서 연구할 수 있도록 했다. 이번 항해에는 부산대학교 연구팀이 함께 승선했다. 연구 지역과 목적이 비슷해 두 기관이 공동으로 조사팀을 꾸린 것이다. 그러나 기관 측에서 실제로 배에 오른 인원은 관측사 두 명을 포함해 일곱 명뿐이었다. 반면 승조원은 스물다섯 명 가까이가 모두 탑승했다. 6천 톤급 선박에 연구 인력이 이 정도라니, 공간이 썰렁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본래 최대 서른다섯 명까지 탈 수 있는 배라, 이번 항해는 어딘가 외롭고 쓸쓸한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연구선 이사부호는 한 달간의 서인도양 자원탐사를 마치고 콜롬보에 기착해 있었다. 이제 한국으로 귀항하는 길에 동인도양을 지나며 두 번째 조사 임무를 수행하도록 계획된 상태였다. 이사부호가 서인도양으로 나가는 일은 이제 연례행사처럼 자리 잡았다. 십 년 동안 이어지는 대형 국가 프로젝트인데, 해저에 매장된 광물을 찾기 위한 심해 탐사는 매년 반복되었다. 열수광상 조사는 그중에서도 핵심 과제였다. 탐사가 성과를 거두기만 한다면, 국제해저기구에 광구를 설정해 미래 에너지원 확보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으니, 정부가 장기간 지원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서인도양 항해에는 늘 변수도 많았다. 가끔은 위급한 환자가 발생해 배가 마다가스카르까지 급히 이동해 정박한 적도 있었다. 예측 불가가 대양 항해의 본래 성격이었고, 이번 항해 또한 그 불확실성 속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이번 항차는 콜롬보에서 출항해서, 동인도양 벵골만 나인티이스트 릿지(Ninetyesat ridge) 부근에서 퇴적물을 채취하는 목적이다. 벵골만의 서쪽에는 인도 대륙이 있고, 배후에는 티베트고원이 있다. 인도 대륙에서는 벵골만으로 뻗어 나오는 강도 있다. 인도 대륙은 우기가 되면, 강을 통해 막대한 퇴적물을 벵골만으로 토해낸다. 그 뒤쪽에 있는 티베트고원으로부터도 계절 변화 때문에 대륙의 먼지를 바다로 내보낸다. 또 저위도 열대 해역은 무풍지대도 동서를 가로지른다. 이처럼 다층적인 자연환경 속에서 벵골만의 퇴적물이 퇴적되고 있다. 이번 항해는 이 퇴적물을 확보해 해역의 기후 변동성을 규명하는 것이 1차 목적이다. 나아가 그 결과가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 기후와 어떤 상관성을 지니는지까지 살피는 데 연구의 초점이 맞춰져 있다.
연구하면 연구 성과를 내야 하는데, 그 전에 퇴적물을 채취해야 했다. 그게 연구의 시작이다. 그런데 바다에서는 그 시작조차 어려울 때가 있다. 채취하려는 인도양 수심은 3천 미터가 넘는다. 그러니 퇴적물 채취가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재원을 아끼기 위해 외부 연구팀도 승선하게 기회를 주는 이유이기도 했다. 귀항하는 항해라 쉽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쉬운 일이란 세상에 없다. 바다라는 특수성을 고려하더라도, 성공적으로 시료를 채취하지 못하면 낭패다. 연구 책임자가 형사처벌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책임은 막중하다.
“안녕하세요?”
조금 기다리고 있으니, 부산대 연구팀이 도착했다. 어디에선가 본 듯한 얼굴이었다.
“박사님, 상범이라고 합니다. 지난번 학회에서 인사드린 적 있습니다.”
“아 그렇구나,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한데, 이제 알겠네….”
“오느라고 고생했다. 얼른 짐 풀어 놓고. 저녁 식사 겸 승조원들과 단체 미팅할 예정이니, 준비한 후 갑판에서 보자!.”
상범과 다른 학부생 두 사람은 이런 일정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예, 알았습니다’를 대답하고 서둘러 내려가면서 금방 다시 돌아오기로 했다. 팀장이며 수석연구원인 준호는 그들도 데리고 가야 했다. 팀장으로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제때 와준 그들이 고맙기도 했다. 콜롬보라는 도시에 개인적인 호기심이라도 생겨, 미적거리며 늦게 나타나기라도 했다면, 한국에까지 연락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일없이 제시간에 와준 건 연구 책임자로서 고마운 일이다.
“자, 갑시다.”
이 선장이 뒤범벅되었던 땀을 다 씻어내고, 깨끗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나타났다. 파란 계열의 꽃무늬가 선명한 티셔츠는 이곳 분위기에 딱 어울렸다.
“현 박사, 여긴 삼항사 김해연이야. 지난 항차에 고생 많이 했고, 앞 팀하고 같이 못 나가서, 이번에 같이 가기로 했어.”
“아, 좋죠! 연구 책임잡니다. 잘 부탁드릴게요~”
“박사님, 선장님께 얘기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잘 부탁드립니다.”
늦은 오후, 지평선 너머로 콜롬보 항구의 풍경이 아련하게 펼쳐졌다. 바람은 낮았고, 강렬한 햇살은 항구의 건물과 정박한 배들을 더욱 건조하게 만들고 있었다. 바다는 고요했지만, 항구에 정박한 선박들은 바다가 빚어낸 대양의 에너지를 간직하고 있는 듯,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한껏 받아내고 있었다. 여기저기에 다소 무질서하게 정박한 배들은 침묵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항구 밖에서 좋은 소식이 오길 기다리는 것처럼 조금 흔들리는 듯했다. 항해는 17일간 이어질 예정이었지만, 이번 출항은 하루가 지연되었다. 우리는 좀 따갑지만, 이국이라는 사실에 호기심을 가지고 항구 밖으로 걸어 나갔다.
“기상이 좀 안 좋은 건 알고 있지요?, 현 박사,”
이 선장이 옆에서 현재 상황을 알고 있냐고 물었다. 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최근 인도양의 날씨가 심상치 않다고 듣기는 들었어. 인도양 쌍극자 영향이라고 하더라고?.”
선장은 듣고 있었지만, 옆에 있던 수현이 끼어들었다.
“쌍극자라면, 동아프리카 홍수와도 관련이 있는 건가요?”
“어?, 알고 있네. 그래 맞아!”
쌍극자라는 용어는 최근에 등장한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인도양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기후변화 현상이다. 어떤 이유로 인도양 표층 해수 온도가 떨어지면, 그 영향으로 동아프리카엔 홍수가 나기 쉽고, 아시아 대륙에는 가뭄을 가져오는 기상 현상이다. 준호는 인도양 쌍극자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하면서 몇 마디 덧붙였다.
“옛날에는 인도양 같은데 관심을 안 뒀는데, 연구 계획서를 짜다 보니 이쪽도 생각보다 재미있겠더라고요. 하하.”
“그런 거구나, 어쩐지, 몇 년 동안 현 박사 배 안 타는 거 같더라고….”
“그건 아니고, 국내 연안 조사만 하다가 대양 쪽으로 관심을 돌리는데, 시간 좀 걸린 거지 뭐!”
준호는 선장에게 이번 승선의 배경을 설명하면서, 인도양 기후에 대해 조금 더 설명했다. 이번 연구가 성공적으로 완수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미리 설명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선장은 잘 듣고 있는 듯,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수현과 상범도 잘 듣고 있었다. 상범은 준호와 같은 박사과정 1년 차 대학원생이었다. 키가 컸고, 열심히 해야 한다는 지도교수의 언질을 받았는지, 오고 가는 대화에 귀를 곤두세우는 것 같았다. 몇 시간 만에 얼굴이 탔는지 유난히 하얗게 보이는 눈동자에 그늘진 표정을 봐선 퇴적물 채취를 무척 걱정하고 있는 듯했다. 항구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그지없이 잔잔해 보였지만, 이 항구의 평화가 계속될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폭풍 전야처럼 무겁게 다가오고 있었다.
출항이 하루 늦춰진 덕분에 연구팀은 뜻밖의 여유를 얻었다. 콜롬보 시내를 잠시 둘러보며 연구원과 승조원들 간에 얼굴을 익히고, 출항 준비를 철저히 하기 위해 간단한 담소를 나눌 기회가 생겼다. 미리 외출한 승조원들은 어디선가 시내 구경을 한 후 나중에 만나기도 했다. 담소라기보다는 정식 미팅이다.
“저기 보세요. 여긴 색깔부터 다르네요.”
수현이 시장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말했다. 현지 시장은 열대 과일과 향신료로 가득해 생동감 넘치는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진열대 좌판은 조금 작고 허술하게 보이기도 했지만, 그 위에 올려놓은 다채로운 색깔 때문에 화사한 분위기가 살아나는 듯했다. 도로를 지나, 좁은 골목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저 불상, 참 묘하네요.”
삼등 항해사가 한마디 한다. 그녀는 부산 영도에 있는 해양대를 갓 졸업한 신참이었다. 현장 항해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 보였지만, 말씨와 태도에는 아직 30대 초반 특유의 젊음이 묻어났다. 지난 한 달간의 항해로 피곤했을 텐데도, 저녁 미팅에는 꼭 참석하고 싶다며 선장과 함께 나왔다. 그녀는 시장 한 모퉁이에 자리한, 오래된 사원 앞에서 불상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을 잇고 있었다. 사원 중앙에 선 불상은 세월의 흔적을 품은 채 온화한 표정을 띠었고, 어깨에는 검은 이끼가 얇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 부드러운 미소가 시장의 소란을 잠시 멈추게 하는 듯했다.
“뭐가 묘해요?”
비슷한 또래여서 그랬을까. 수현이 되묻고 있었다. 삼등 항해사는 불상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이 미소, 참 오래된 거겠죠?”
수현이 말이 없자, 준호가 대답했다.
“대부분 불상은 모두 미소 짓고 있는데요…. 뭐, 고요 속에서 깨달은 자의 얼굴이랄까.”
“저는 그런 얼굴 닮고 싶어요. 거친 파도가 와도 무너지지 않는 마음이요.”
삼등 항해사가 재치 있게 대답했다.
준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아마, 이번 항해가 끝날 때쯤이면 그게 생길지도 모르겠지요. 하하”
농담 비슷하게 말했지만, 준호는 이곳으로 출항하기 전에 책에서 읽었던 몇 가지를 띄엄띄엄 설명했다.
“불교가 기원전에 이곳에 전해졌다 하니, 그런 미소도 그 긴 시간을 견뎌낸 흔적이겠죠. 저런 고요한 미소가… 득도의 끝일까요?”
“스리랑카는 과거 14세기에는 명나라와 교류도 했지만,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의 지배를 오랫동안 받아서 동서 문명이 만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더라구요, 동서 문명이 만났던 곳이니, 보면 볼수록 재미있는 부분이 많을 겁니다.”
“그런 역사가 있는 줄 몰랐습니다.”
갑판장이 시장에서 방금 사 온 모자를 쓰며 말했다. 준호는 갑판장이 쓴 모자를 보면서 선장과 함께 거리를 좀 더 살펴보기로 했다. 나머지 일행은 예약된 식당으로 향했다. 준호는 이곳에 다시 올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선장과 함께 조그만 선물을 사고 싶었다. 한 20분 정도 더 시간을 할애받은 샘이다.
중국풍의 조그만 식당이었다. 앞서 나온 팀에 있던 몇 분은 이미 돌아갔고, 선장과 승조원, 연구팀이 함께 했다. 먼저 온 승조원이 메뉴를 훑어보더니 음식의 종류와 맛까지 파악한 듯 이것저것 추가 주문을 넣었다. 준호와 선장, 그리고 연구원들은 이름도 모르는 음식을 맛보고 있었다. 전통 중국식에 이곳 특징이 가미된 듯한 야릇한 음식이었다. 준호는 음식보다는 맥주가 한잔 먹고 싶었다. 큼지막한 병에 들어있는 맥주였다. 이 고장 특산 맥주를 주문했더니 라이언(Lion)이라는 맥주를 가져온다. ‘떡—’ 하니 사자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그려진 라벨이 병에 붙어 있었다. 목도 축일 겸 선장에게 한 잔 권하고 싶었다.
“선장님, 딱 한 잔씩만 할까요?”
“난, 술 안 해~”
선장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더 이상 권할 수가 없었다. 분명 내가 기억하기론 선장은 술을 먹는다. 오래전에 같이 먹은 적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아마, 승조원들이 있고, 내일 출항하게 돼서 그러는가 보다 생각했다. 테이블을 보니 7~8명이 있었는데, 겨우 맥주 두 병 정도가 놓여 있었다. 먼저 오신 승조원도 대부분 맥주를 먹지 않았고, 한두 사람이 그냥 맛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타이거(Tiger)라는 싱가포르 맥주도 생각나네~’
준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있던 삼등 항해사가 말을 받는다.
“아, 박사님, 그러네요~. 지난번 거기 갔다 왔는데, 거기선 타이거 맥주가 명품이었어요.”
“거…. 참, 이상하네.”
열대 지방인 스리랑카와 싱가포르의 대표적 맥주 이름에 사나운 맹수 이름을 붙이다니, 무슨 연관성이라도 있는지 무척 궁금해졌다. 라이언이나 타이거나 동물 이름을 맥주 이름으로 갖다 쓴다는 게 좀 이상하게 느껴졌다. 상표를 보니 라이언은 1881년에 회사가 설립되었다. 삼등 항해사가 인터넷을 뒤지다가 한마디 한다.
“박사님, 이거 이 나라와는 관계없고, 여기 전통주는 세이론 아락(Ceylon arreck)이라는 술이 따로 있데요….”
“아, 그렇군요~. 내가 아직 비행기에서 내린 지 얼마 안 돼서. 하하.”
준호는 삼항사의 순발력에 감탄했다.
저녁 식사 겸 치러진 미팅에서 개략적인 이야기를 했지만, 연구선으로 돌아온 후에는 항해 경로, 이동 거리를 고려한 배의 속도와 기상 변화에 따른 대응 방법 등을 꼼꼼히 검토했다. 특히, 해적 출몰에 대비한 대응 방법에 이르러서는 모두의 눈빛이 빛나고 있었다. 다른 항차와는 달리 이곳 콜롬보에서 한국으로 귀항하는 도중 통과해야 하는 믈라카에서는 해적이 출몰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그래서 보안업체에서 외국인을 경비원으로 고용한 상태였다. 조금 전에 그들의 승선하는 게 보였고, 이제 귀항할 때까지는 한 식구가 되었다. 안심되는 점도 있었지만, 그들을 만날 때마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어, 불안해지는 마음도 없지는 않았다.
“박사님, 준비가 정말 까다롭네요. 이거 진짜 탐사인가요. 아니면 모험인가요?”
수현이 회의하다 갑자기 질문한다.
“둘 다일지도 몰라. 과학 탐사가 언제나 모험 아닌가?”
준호는 가볍게 받아넘겼지만, 회의를 마친 뒤, 연구팀은 알 수 없는 긴장감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해적의 위협, 예측할 수 없는 기상, 그리고 광막한 미지의 바다가 우리의 도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긴장은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라, 도전에 대한 설렘이기도 했다. 모든 준비가 끝난 밤, 항구에 정박한 배 위로 별빛이 쏟아졌다. 바다는 잔잔했지만, 머지않아 펼쳐질 모험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모든 연구원은 회의실로 모여 주십시오. 잠시 후 7시부터 안전교육이 있을 예정입니다.”
이사부호는 6천 톤에 이르는 대형 연구선이다. 4층 구조로 되어있으며, 길이가 100미터에 가깝고, 폭은 18미터나 된다. 꽤 큰 4층 건물이라 생각하면 딱 맞다. 한국에서 제일 커서 떠다니는 바다 위의 연구선이라고도 한다. 출항은 내일 아침이지만, 이미 선상생활이 시작되었다. 해상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작업해야 하므로 무엇보다 안전에 유의해야 하며, 이를 위해 사전 안전교육이 필수적이다.
일등 항해사의 안전교육을 받은 후, 준호는 선미에 올라 콜롬보항을 떠나며 항 입구에 세워진 낡은 등대를 바라보았다. 그 등대는 크지 않았고, 꽤 오래전에 세워진 것 같았다. 등대는 오래된 수호신처럼 항구를 지키고 있었다. 조금은 탁하게 보였던 콜롬보항에서 회색빛 방파제와 조그마한 등대가 어울렸다. 새로운 테트라포드로 항만 지역을 확장하는 것도 보였다. 이 좁은 항로를 수없이 오가던 배들과 그 위의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들 역시 준호처럼 저 멀리 선 채 바다를 비추는 불빛을 바라보며 크고 작은 근심을 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 불빛은 떠나는 배들을 묵묵히 배웅하는 존재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 길을 지나온 수많은 선배가 느꼈던 안도와 희망 또한 함께 전해지는 듯했다. 뱃머리가 가르는 파도를 유유히 내려다보며 이번 항해의 무사 안녕을 축복하는 듯했다. 등대가 점점 멀어지고, 마침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연구 과제도 내년까지기에 다음 항해는 없을 것이다. 준호는 멀어져가는 등대를 보며 말했다.
‘콜롬보여, 아유보완.’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오래오래 살라는 그 인사는, 어쩌면 준호 자신에게 던지는 주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배는 파도를 가르며 동인도양으로 나가고 있었다.
항해
이사부호는 콜롬보항을 떠나 드넓은 동인도양을 목표로 달리고 있었다. 물결 하나 없이 잔잔한 해수면 위를 미끄러지고 있었다. 빙판 위를 미끄러지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야말로 바다는 고요했다. 얼마 전까지 보였던 바닷새는 보이지 않는다. 이제 콜롬보와는 꽤 떨어진 대양이라는 의미다.
하루 만에 무풍지대에 들어섰다. 바람은 숨을 죽였고, 고요는 끝없이 이어지며 점점 압박하며 다가왔다. 마치 거대한 빈 공간에 갇힌 듯, 바다의 정적은 이상할 정도로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여럿이 함께 있어도 말 한마디 없으면 침묵만 남고, 그 침묵은 곧 분위기를 짓누른다. 지금의 바다도 다르지 않았다. 기척 하나 없는 열대의 열기만이 갑판 위에 가득 쌓여 있었다. 이사부호는 뜨거운 수면을 가르며 나아갔고, 갑판에서도 그 열기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준호는 그 가운데 서서 자신이 밟고 있는 항로를 떠올렸다. 지금 지나고 있는 바다가, 예로부터 해양 실크로드라 불리던 길이었을까. 비장한 각오와 욕망으로 점철된 뱃사람들은 지금 준호가 가진 마음으로 해양 실크로드를 항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준호는 이 침묵의 바다에 서서 바다가 품고 있는 과거의 역사를 풀어내려고 했다.
햇볕은 강렬했다. 바다 사나이들이 했던 ‘적도제’를 생각했다. 그 옛날, 무사 안녕을 기원하며 바다에서 행했던 의식이다. 이사부호가 항해하는 지역은 적도 바로 위다. 무풍지대 속이다. ‘적도제’를 지냈던 선배들의 행위는 분명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그때는 무풍지대로 들어가길 꺼렸겠지만, 이제 우리는 무풍지대를 거침없이 달릴 수 있다.
실험실에서 갑판으로 나오는 것조차 머뭇거릴 정도다. 문턱을 넘기만 해도 온도가 10도 이상 차이 났다. 갑판으로 나가는 것은 한여름 백사장으로 가는 것보다 더 격렬한 더위를 느끼게 했다. 퇴적물 채취 지점까지 가는 것도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 것이다. 몇 년 동안 기획했고, 운 좋게 프로젝트에 당첨되어 이 항해가 생긴 것이다. 선배들이 적도제까지 지내면서 가졌던 그 마음처럼, 연구원들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기를 기대했다. 첫 번째 정점까지는 가는 데 5일은 더 항해해야 했다. 망망대해 무풍지대에서 한 척 연구선이 그냥 달리고 있다. 갑판으로 나오길 꺼리는 연구원들은 아마도 각자의 방에서 쉽게 잠들지 못했을 터였다. 밤은 깊어졌지만, 배에 탄 모두가 긴장 속에서 깨어 있을 깨어 있었을 것이다.
첫째 날 밤, 준호는 브리지 대신 갑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야행성 동물처럼 밤이면 늘 나와야 할 것 같았다. 갑판에 나와서 엔진 소리를 듣거나 밤바다를 보고 싶었다. 혹시 미미한 바람이라도 있다면 느껴보고 싶었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마주하고 싶은 마음은 부질없는 욕심이었다. 무풍지대의 공기는 마치 정지한 듯 조그만 움직임도 없었다. 엔진 소리와 뱃전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만 약하게 들릴 뿐이었다.
“박사님, 안 주무세요?”
갑판 모퉁이 윈치가 있는 곳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수현이었다. 그는 난간에 기대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바다였다.
“수현이구나, 뭔 일 있니? 잠은 자야지!. 며칠 지나면 힘든 작업이 기다리고 있는데.”
“잠이 잘 안 와요.”
수현이 고개를 들어서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박사님, 피스톤 코아 실패하면…. 제 논문은 끝이에요.”
수현의 목소리는 파도에 젖은 밧줄처럼 축 늘어졌고 불안했다. 준호는 그를 위로할 겸 옆에 다가가 바다를 함께 바라보았다. 역시 깜깜한 바다, 후갑판에 설치한 작은 미등은 후갑판 아래 바닷물과 닿는 흘수선 부근만 겨우 비치고 있었다. 불빛에 스친 물의 미끄러짐이 오히려 수현의 마음을 더 뒤흔들었을지도 모른다. 잔잔한 거품을 실은 물결은 마치 그가 느끼는 불안을 그대로 닮은 듯했다.
“수현아, 실패도 연구의 일부야. 다만, 그걸로 좌절하진 말자. 우린 잘 준비했고, 바다도 준비한 자에게 선물 하나쯤 주겠지!”
그는 고개를 끄덕이는 듯했지만, 표정은 아직 밤바다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걱정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수현이가 박사과정 1년 차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준호 역시 학위과정 때 북대서양에서 두 달간 배를 타며 시료를 채취한 경험이 있었다. 그때 모아 온 자료로 논문을 완성했지만, 그 여정이 얼마나 고되고 힘들었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시료를 얻지 못하면 실험할 수 없고, 실험 결과가 없으면 논문 작성도 불가능하다. 그리고 학위과정은 연기될 수밖에 없다. 수현의 마음속 압박감이 전해졌다.
오래전이지만, 북대서양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지금의 ‘적도제’처럼 북극권으로 진입하면서, 북극의 신에게 세레머니도 했다. 북극을 지배하는 신에게 북극권에 진입한다는 허가를 받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엄숙했다. 승조원 중에 수염이 덥수룩한 사람이 그 의식을 주도했었다. 강렬한 기억이어서 그때 받았던 증명서를 지금도 가지고 있다. 조그만 종이쪽지에 불과하지만, 의지할 곳 없었던 그 당시에, 마음을 맡겼던 그 증명서를 볼 때마다, 준호는 언제나 야릇한 기분에 빠졌던 걸 기억한다.
‘아차.’ 순간 깨달았다. 준호는 항해 준비를 철저히 하라고만 강조했을 뿐, 팀원들이 처한 상황과 감정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했다. 그들을 다독이고 격려하는 것도 수석연구원이 해야 하는 일이었다. 수현은 이미 실험실로 들어갔지만, 준호는 갑판에 한참을 서 있었다.
수석연구원실로 돌아온 준호는 ‘논문은 끝이에요’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잠시 침대에 누워 뒤척이다가 결국 브리지 옆 독서실로 향했다. 책장을 훑다 눈에 들어온 한 시집을 들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 천천히 첫 장을 펼쳤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그래, 흔들림 없이 이루어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꽃도, 사람도 마찬가지다.’
구절을 읽던 준호는 책을 내려놓았다가 다시 들었다. 다른 시가 보였다. ‘여백’이라는 시었다.
‘언덕 위에 줄지어 선 나무들이 아름다운 건
나무 뒤에서 말없이
나무들을 받아안고 있는 여백 때문이다.
......
비어 있는 곳이 없는 사람은 아름답지 않다.
여백을 가장 든든한 배경으로 삼을 줄 모르는 사람은’
여백이라는 말이 더 마음에 와닿았다. 준호가 선실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듯, 시인도 눈 내리던 숲에서 밤을 지새운 적이 있다고 했다. 새벽이 되어 잎을 털어낸 가지를 올려다보며, 그 너머로 하늘을 다시 본 순간을 말이다. 그 이야기를 떠올리자, 수현이 문득 준호와 닮아 보였다. 정작 준호는 그에게 필요한 여백이 되어주지 못하고 있었다.
이사부호는 여전히 항해 중이다. 신라 장군 ‘이사부’가 충심과 결기의 마음을 멈추지 않았던 것처럼, 그의 이름을 딴 이사부호는 목표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옛날에 무풍은 항해를 방해했다. 방해가 아니라 애초에 무풍은 항해의 조건이 되지 않는다. 역풍에서 범선은 지브세일(Jib sail)이라는 돛이 생기고 나서는 항해가 가능해졌다. 옛사람들은 그래서, 순풍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도시를 가꾸었고, 문화를 발전시켰다. 이사부가 출항한 콜롬보항도, 순풍을 기다렸던 사람들로 한때는 다양한 문화가 도시를 활기차게 했을 것이다.
세상이 바뀐 지금, 이사부는 무풍지대를 뚫고 달리고 있다. 향료를 찾기 위해 가는 항해는 아니지만, 향로보다 더 가치 있는 과거의 진실을 찾아 떠나는 항해이다. 퇴적물은 저 암흑 같은 해저에서 우리의 도전을 기다리고 있다. 우린 꼭 그 퇴적물을 채취해야 한다. 그래서 이사부는 달리고 있었다.
둘째 날, 브리지에 올라 잠깐 머물렀지만, 거의 하루 종일 수석연구원실에서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어제 읽기 시작한 시집과 책을 쉽게 도서실로 갖다 놓지 못하고 있다. 점심 식사 후 잠깐 면담을 하자던 수현이와 상범이도 맞이했다.
“박사님, 모습이 안 보여서 같이 와봤어요”
연구원으로 승선한 그들은 수석연구원인 나와 호흡을 맞추어야 했다. 그들이 시료 채취에 걱정이 많은 것은 준호의 마음과 다르지 않았다.
셋째 날 밤, 또다시 갑판으로 향했다. 주변은 온통 검은색으로 물든 바다와 별이 보이지 않는 하늘뿐이었다. 생명의 흔적도, 빛의 조각도 보이지 않는 수평선 너머의 어둠은 마치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했다. 새까만 어둠이 배를 감싸며 적막한 공기를 퍼뜨렸다. 무풍의 정적은 평화로움 대신 고독을 불러왔다. 갑판에 서 있는 동안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갑자기 브리지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곳에 도착했더니, 일등 항해사가 커피를 끓이고 있었다. 습관적으로 브리지에 오르면 레이더를 쳐다봤지만, 레이더 화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밖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고, 분명 망망대해 어디쯤에서 이사부가 달리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일항사의 손에는 막 전송된 기상도가 들려 있었다.
“박사님, 조금 걱정스럽습니다.”
그는 준호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손끝이 기상도 한쪽을 가리켰다.
“정점에 도착할 시간에 기상이 나빠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준호는 그와 함께 기상도를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속도를 올려서 가능한 한 빨리 정점에 도착하고 작업을 시작해야 할 것 같아요.”
그의 표정은 다소 무거워 보였다.
“선장님과 이 일정을 상의하게 좋을 것 같은데요?.”
“네, 알겠습니다.”
연구는 연구팀의 책임이지만, 배에서는 모든 것이 선장의 지휘 아래 움직인다. 항해사에게 물어보니 선장은 현재 비번이며, 아마도 취침 중일 거라고 했다. 할 수 없이 몇 시간 기다려보고 선장과 상의하기로 했다. 준호는 어차피 잠을 이루지 못하는 피곤한 밤이 계속되는 터라, 방과 브리지를 오가며 시간을 보냈다. 얼마 후 선장은 브리지로 왔다. 일등 항해사는 비번이 되었고, 삼등 항해사가 근무자로 교대된 상태였다.
“선장님, 몇 시간 전 일항사가 일기 예보도를 보여주면서, 날씨가 좀 염려된다고 했습니다만….”
지난 근무시간에 일등 항해사가 기상도를 보여주면서 했던 얘기를 선장에게 말했다.
“알고 있네요~.”
선장은 무표정한 반응을 보이며, 브리지로 오기 전 보고를 받았다고 말한다. 선장은 잠시 준호를 바라보더니, 사무적인 말투로 담담하게 말했다.
“운항 속도를 높이는 건 연료 소모가 많아서 원칙적으로는 안 되는데, 이번 상황은 좀 다르네요.”
준호는 선장을 잘 안다. 까탈스러울 정도로 원칙적이며, 무슨 일이 있건 정상궤도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그의 성정은 지금까지 곳곳에서 알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선장은 출항 전이란 이유로 미팅에서도 맥주 한 잔도 사양했다. 원칙주의자다운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선 선장은 최선책이 사라진 상황에서 차선책을 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었다. 망망대해에서 떠 있는 이사부가 계획대로 운행한다고 하더라도, 궂은 날씨와 만날 수밖에 없으니, 조금 빨리 목적지에 도착해서 연구에 협조하는 방법이 차선책이었다. 그는 눈을 좁혀 기상도를 다시 들여다보고 있었다.
브리지 한구석에 빛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해도실(chart실) 마련되어 있다. 암실에 들어가는 것처럼 커튼 속으로 선장과 함께 들어갔다. 책상 위에는 넓은 해도가 한 장 놓여 있었다. 선장은 컴퍼스로 목표 지점까지 남은 거리를 재어보고 있다.
“음, 좋아. 밤에는 결국 작업을 할 수 없는 것이고, 남은 거리와 항속을 계산해 보니 조금 빨리 가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하네.”
선장은 인심 쓰는 게 아니라,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인다.
“예상 도착 시간이 32시간 후, 아침 6시경이니, 준비하고 있다가 차질이 없도록 부탁할게.”
교대한 삼등 항해사가 옆에서 예의를 갖추어 대답했다.
“네, 차질 없게 하겠습니다.”
선장이 사라지고 난 후, 삼등 항해사는 배의 속도를 높였다. 준호는 콜롬보 출항 전에 느꼈던 그녀의 태도가 떠올라 순간 놀랐다. 근무시간에 선장과 항해사가 이렇게까지 수직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은 처음 마주하는 장면이었다.
피스톤 코어(Piston core) 작업은 어려운 작업 중 하나다. 특히 대형 피스톤 코어(Giant piston corer)를 이용해서 퇴적물을 채취하는 작업은 높은 숙련도를 요구한다. 피스톤 코어는 바다의 심장을 꿰뚫는 바늘과도 같다. 한 가닥 쇠 파이프가 3천 미터 수심을 내려가 퇴적층을 뚫고, 내려간 길이만큼 퇴적물을 떠올린다. 코어의 중심을 잡기 위한 추(Weight)만 해도 500kg이 훌쩍 넘으며, 장비 대부분이 철로 만들어져 있어 전체 무게는 상상 이상이다. 이 무게를 지탱하며 올리고 내리는 로프 와이어의 부담은 말할 것도 없다. 배 옆 모퉁이 갑판에서 윈치(Winch)를 이용해 장비를 내리고, 회수할 때는 후갑판의 대형 크레인을 사용한다. 목표 지점의 평균 수심은 3천 미터가 넘는다. 그곳은 인간도 기계도 압착 당할 수 있는 심연이다. 이사부호는 그 깊이를 향해 실같이 가는 와이어를 길게 풀어내려야 한다. 의지할 것은 단 하나, 내려가는 그 줄뿐이다. 단 한 번의 삐끗함이라도 생기면 장비는 영영 바닷속에 묻혀버린다.
바다는 언제나 작은 실수조차 놓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바다는 실수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난번에도 장비를 연결하고 있었던 와이어에 문제가 발생하여 장비를 통째로 바다에 수장시켰던 경우가 있었다. 장비는 억대가 넘어가는 고가다. 고가의 장비라는 걸 차치하더라도, 장비가 분실되거나 한다면, 그 항해는 완전 실패로 끝나는 것이다. 퇴적물을 채취할 수 없으니, 결국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빈손으로 돌아오는 것보다 더 나쁜 결과도 있다. 롤링과 피칭으로 흔들리는 배에서, 쇠 파이프에 부딪히기라도 하는 날엔, 골절상을 입기도 한다. 이런 사고는 항해 자체를 포기하게 만든다. 허연 이빨을 드러낸 파도는 언제 돌변하고 목숨을 앗아갈지도 모르는 흉기나 다름없다. 그러니 바다라는 공간에서 한 번의 실패는 곧 흉기를 휘두를 기회를 주는 것과 같다. 작업은 진중해야 하고 항상 어렵다. 한번 작업하는 데 다섯 시간은 족히 걸린다. 수심이 3천 미터가 넘으니, 코아를 내리는 시간이나 올리는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1톤 이상 나가는 피스톤 코아는 균형 있게 내려야만 정상적으로 해저면에 착지 되고, 퇴적물을 뜰 수 있다. 그러나, 바닷속에도 해류가 있다. 이런 해류 때문에 피스톤 코아는 수직으로 내려가지 않는다.
일등 항해사는 잠시 기상도를 살피더니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인도양 기후는 언제 돌변할지 알 수 없습니다”
당직 중인 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장비를 한 번 더 철저히 점검하고 작업을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보호 장비와 채취 장비 모두 다시 확인하는 게 좋겠네요.”
준호가 짧게 “네” 하고 대답하자,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다짐하듯 말을 덧붙였다.
“주변 서베이가 끝나고, 착지 지점이 확실하게 정해지면 바로 시작할 수 있도록 알려 주시고요.”
옳은 말이었다. 일항사는 말을 이어갔다.
“열대 지역이라 강한 햇볕 아래 갑판 작업이 쉽지 않기도 하지만, 만약 좀 강한 바람이라도 불면 아무리 준비가 철저해도 불안해집니다.”
그의 말대로 무풍지대의 기상은 차분해 보였지만, 언제 돌변할지 모른다. 장시간 이어지는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퇴적물을 안정적으로 채취하는 일은 그 자체로 고된 작업이다. 준호는 원양 항해에서 종종 발생하는 위급 상황들을 떠올렸다. 아무리 준비를 철저히 한다 해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부딪혀 연구를 포기하고 귀항하는 일은 흔했다. 그래도 모든 상황에 대비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새벽 무렵, 드디어 예상보다 한 시간 일찍 첫 번째 정점에 도착했다. 기상 상태를 고려한 선장의 예측대로였다. 바다는 금방이라도 거칠어질 듯, 작은 물결이 배를 스쳤다. 정점에 도착했지만, 곧바로 피스톤 코아를 내릴 수는 없다. 먼저 배에 장착된 다중음향측심기(multi beam echo sounder)를 사용해서 탐사 지역 주변에 대한 서베이(survey)를 해야 한다. 대양이기 때문에 바닥이 암반일 가능성은 적지만, 해저면이 평평하지 않거나 경사진 경우에는 퇴적물 채취가 불가능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해저 면은 바다 아래에 있는 땅이다. 육지처럼 들어간 부분도 있고 나온 부분도 있다. 안전하게 해저면에 피스톤 코어를 착지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평평한 지점을 찾는 과정이 필요했다.
이사부가 서베이를 하는 동안 준호는 실험실로 전송되어 오는 멀티 빔 기록을 살피고 있었다. 배 밑바닥에 붙어 있는 다중음향측심기는 목표한 지점과 그 주위를 선회하면서 해저 면으로 음파를 발사한다. 기록지에는 발사된 음파가 해저면에 부딪힌 뒤 되돌아올 때의 시간과 반사면이 표시된다. 바닷물에서 음파는 수심이 1미터 증가하면 0.017미터씩 전달 속도가 빨라진다. 그런데 온도는 천 미터보다 깊은 곳에서는 거의 일정하다. 이렇게 물속에서 음파의 전달 속도는 복잡하게 계산된다. 물속에서 음파는 일 초에 천5백 미터를 간다. 이것은 대기에서 전달되는 음파의 속도보다 4배 정도 빠르다. 그러니 바닷물에 쏜 음파가 되돌아오는 시간으로 수심을 알 수 있다. 수심이 다르면, 되돌아오는 시간은 조금씩 차이가 있기 마련인데, 그것으로 해저 면의 굴곡 상태가 실험실로 계산되어 전송된다. 놀랍다. 과학의 힘은 이토록 놀랍다.
서베이 과정에서 전송되는 수신 기록은 기록지에 즉시 프린터 된다. 마치 기상도를 보는 것과 비슷하다. 기상도는 변화하는 중간값을 그린 것으로, 그것으로 앞으로 2~3일 뒤를 예측할 수 있지만 멀티 빔 기록은 있는 상태 그대로를 보내온 것이다. 물론 배가 움직이는 실시간 각 지점은 GPS(위치정보 시스템)를 통해 초 단위로 정확하게 기록된다. 그러니 기록지에서 평평한 한 지점을 선택하면, 그곳은 이사부가 조금 전 지나가면서 해저면을 측정한 지점이 된다. 그 지점을 선택해서 피스톤 코어를 정확하게 떨어뜨리는 것이다. 그러나 피스톤 코어가 3천 미터를 내려가는 동안 배가 움직이거나, 강한 해류가 있다면 정확한 곳으로 내려갈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얼마나 잘못될 가능성이 크겠는가.
‘잘 살피고, 잘 선택해야 한다.’
피스톤 코어 투하 위치는 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연구 책임자인 준호의 몫이다. 이것조차도 잘못 고르면 모든 게 허무하게 끝날 수 있다. 한 번의 선택은 신중해야 하고, 정상적으로 선택했다 하더라도, 코아를 내리는 과정이 잘못되면 그 또한 헛수고가 된다.
서베이를 진행하며 기록지를 확인할 때는 수현과 성범도 함께 살폈다.그들도 어렴풋하게 잘 알고 있다. 한 번의 선택이 모든 걸 결정한다는 걸.
기록지에 연필을 갖다 놓고,
“여기로 하려는데... 어때?”
기록지를 보던 수현이와 성범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준호가 다시 말했다. 최소한의 동의를 구하는 절차이고 책임을 공유하는 것이기도 했다.
“여기로 할게.”
짤막한 질문에 짤막한 대답이 돌아왔다.
“네, 그렇게 하시죠!”
“브리지, 조금 전 00분 00초에 통과한 지점으로 목표를 정했습니다. 오버.”
실험실에서 멀티 빔 탐사 기록지를 검토하고, 수현과 상범에게 동의를 구한 준호는 무전기를 통해 브리지에 메시지를 전달했다.
“네, 알겠습니다. 배를 선회시키고 그쪽에 정지시키겠습니다. 오버”
브리지에서 대답이 왔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나간다. 여기까지 오는 데 5일이 걸렸고, 코어 조립 등 모든 준비를 모두 마쳤고, 점검도 이미 한 상태다.
브리지에서는 해류 방향을 고려해 배를 정지시켰다.
첫 번째 시도는 실패였다. 다섯 시간이 노력이 아무런 수확 없이 끝나버린 것이다. 코어를 신중하게 내렸고, 해저면에 안정하게 착지했다고 생각하고 끌어 올렸지만, 퇴적물은 전혀 없었다. 빈 깡통을 건져 올린 것이다.
허무했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이유는 명확하지 않았지만, 피스톤 코아를 지탱하는 와이어와 균형추가 흔들려 균형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코아를 정확히 수직으로 내렸고, 해저면에 수직으로 떨어뜨렸다고 생각했지만, 아니 그렇게 했지만 실패했다. 해저면 위 20미터에서 잠깐 정지하고 있을 때 해류로 코어가 균형을 잃고 비스듬하게 착지하게 된 것으로 판단되었다. 갑판 위는 열대의 뜨거운 날씨였지만, 냉랭한 공기가 흘렀다. 모두가 같은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 말도 없었다. 누군가는 무슨 말을 해야 한다. 준호가 먼저 말을 꺼내야 했다.
“자, 이건 연습이라고 생각하자. 두 번째는 성공할 거야.”
팀원들에게 힘주어 말했다. 격려했다. 배에는 ‘자이언트 피스톤 코어’라는 장비가 1대만 비치되어 있다. 구조상으로도 갑판 옆구리 쪽에서 내려야 하므로 하나밖에 운용할 수 없다. 한번 실패하면, 처음부터 조립하고 다시 준비해야 한다. 쇠 파이프 안쪽에는 퇴적물을 직접 담을 수 있는 라인어를 넣는 작업을 해야 하므로 15미터나 되는 바렐은 전부 해체하고 다시 라인어를 통해 퇴적물을 포집할 수 있는 코어 캐처를 통과시켜야 한다. 연구원들은 묵묵하게 아무 말 없이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피스톤 코어를 해체하고, 다시 라인어를 넣고 조립이 완성했다. 하지만 이미 날은 저물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아침까지 기다려야 할 상황이었다. 성공 확률을 높이기 위해 다시 한번 서베이를 하기로 했다. 서베이는 야간에도 가능하다. 실험실에서 멀티 빔 기록지로 들어오는 기록을 촘촘하게 따지면서 살펴야 한다. 배에 장착된 기계는 로봇과 같이 밤낮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위치는 멀티 빔과 GPS로 알고 있으니, 작업시간에 맞추어 정확한 목표로 옮기면 된다. 준호는 탄성파 탐사 기록지를 누구보다도 먼저 봐야 한다. 아니, 들어오는 즉시 훑어보고, 예비 후보를 추려 놓고 다시 검토해야 한다. 준호는 실험실에서 아침이 오길 기다리며 첫 시도에 무엇이 문제였는지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다음 날, 똑같은 아침이었지만, 연구원들에겐 또 다른 하루였다. 두 번째 시도가 시작되었다. 어제 실패했기에, 이번엔 작전을 좀 바꾸었다. 욕심을 줄이고 10미터 길이의 퇴적물을 채취할 목적으로 3미터 바랠 4개만 조립했다. 어제 1차 시도에서는 3미터 바랠 5개를 연결했다. 피스톤 코어 길이는 바랠 길이만 15미터이고, 코어 중량을 합치면 20미터에 가까운 길이가 된다. 1톤이 넘는 무게에 20미터나 되는 대형 장비를 다루는 것은 후갑판의 대형 크레인을 사용한다고 해도 어렵다. 그래도 이사부호라는 대형 연구선이기에 이 정도가 작업이 가능했다. 약간의 아쉬움도 있었지만, 빈 깡통을 올리는 헛수고보다 퇴적물을 채취하는 데 방점을 둔다면 옳은 판단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럼에도 결과는 절반의 성공이었다. 우리는 약 5미터 길이의 퇴적물을 얻었다. 이번에도 해류가 코어의 정확한 위치 도달을 방해한 듯했다.
“5미터라. 실패는 아니지만, 만족할 순 없군.”
일등 항해사에게 낮게 중얼거렸다. 준호는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을 겁니다. 해류 방향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봐 주시죠.”
갑판에서는 어제와 같이 조금씩 바람이 세어지고 있는 듯했다. 팀원들은 분주히 움직이며 다음 작업을 준비했다. 바람이 강해지면, 채취 작업은 더 어려워질 것이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이 퇴적물을 확보하지 못하면 지금까지 한 모든 노력이 헛될 수 있다는 사실을. 준호는 갑판 가장자리에 서서 다시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람에 실린 짧은 물결이 배의 옆구리를 두드렸다. 그 소리는 마치 바다가 우리에게 말을 거는 듯했다.
‘기다리고 있으니, 어디 한번 해봐!’
이제 우리가 그 이야기를 들어야 할 차례다. 준호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날은 이미 저물어 가고 있었다. 첫 번째 시도가 실패했고, 두 번째 시도 역시 기대에 못 미쳤다. 하루 24시간은 정해진 시간이었고, 실패가 계속되면 어려운 상황에 부닥치게 된다. 모두가 그걸 알고 있다. 갑자기 상범이가 말을 건넸다.
“박사님, 이곳에서 계속 코너링하실 건가요?”
지금까지 두 번 시도한 코어링은 준호의 실험실에서 사용할 시료로 퇴적물을 채취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상범이 속한 부산대 연구팀에선 이곳이 아닌 조금 떨어진 곳에서 코어링을 계획하고 있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코어링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머뭇거리는 준호를 매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은 부산대 몫으로 하면 안 될까요? 하는 강렬한 눈빛이기도 했다.
“아, 참. 그렇지. 코어 몇 개를 한다고 했지?”
반사적으로 빠른 대답이 돌아왔다.
“두 갭니다.”
“여기서 한 번 더 하고 옮기면 안 되겠니? 사이트를 옮기면 다시 서베이를 해야 해서….”
“박사님, 어차피 일정에 들어있고, 이 사이트는 두 번이나 했는데요?”
잠시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분명 부산대팀에도 기회를 주어야 한다. 준호가 아무리 수석연구원으로서 이 항해를 책임지고 있다 해도, 기회를 줘야 하는 것도 연구 책임자의 의무였다.
“그래, 그럼 이번은 부산대팀에서 계획한 거 하기로 하자.”
이사부호는 그들이 목표로 한 곳으로 이동했고, 사이트 서베이를 시작한다. 똑같은 과정이다. 다만, 정확한 위치를 정하는 것은 준호의 몫으로 남아 있었다. 원칙적으로는 한 번씩 번갈아 가면서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세 번째 코어 작업이 시작되었다. 선원들과 연구원들은 마치 오랜 연습을 거친 합주단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승조원들은 내용을 모른다. 여전히 연구 책임자인 준호의 실험실에서 사용할 퇴적물을 채취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준호 연구실 소속 수현이는 알고 있다. 만약에 문제라도 생기면 자신이 사용할 퇴적물을 채취할 기회가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연구 책임자인 준호의 속마음도 편하지 않았다. 이미 두 번이나 시도했기에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수현의 눈빛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이 선택이 최선이었다는 사실만큼은 수현도 이해하고 있을 거라 믿었다.
“준비 완료! 천천히 내려갑니다!”
다음 날 아침, 준호의 지시에 따라, 사이트가 정해졌고, 코어링 작업이 시작되었다. 윈치를 조종하는 선원이 외치자, 피스톤 코어는 깊은 바다로 서서히 내려갔다. 흘수선 밑으로 내려가는 와이어가 눈에 들어온다. 해저면까지는 3천 200미터. 바다의 압력과 해류를 뚫고 무게추가 수직으로 내려가야 한다. 비바람이 잦아든 틈을 타, 장비를 해저면 20미터 상부에 잠시 멈추도록 했다. 코어를 내리는 동안에도 해류로 인해 수직으로 내려갔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고, 혹시나 잘못되었더라도 균형을 되찾을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와이어가 직각으로 홀수선을 뚫고 있는지를 보면 된다. 모두의 시선이 고정된 가운데, 준호는 ‘낙하’라고 언급했다. 드디어 코어는 자유낙하를 했다.
‘덜컹-.’ 팽팽했던 와이어가 너울이 밀려오는 것처럼 한 번 출렁거렸다. 1톤 이상 가는 코아의 착지로, 3천 200미터 해저면 착지의 충격이 와이어를 통해 전달되었다. 멀티 빔이라면 2초 정도에 전달되겠지만, 와이어를 통해 전달되는 착지 신호는 다소 늦을 수밖에 없다. 신호는 다소 지연됐지만, 정상적인 출렁거림으로 해저 바닥에 무사히 닿았다는 것은 분명했다. 여전히 성공을 장담할 수 없었기에 갑판 위에는 긴장된 공기가 넘쳐났다. 누구도 안심할 수 없었다.
와이어를 끌어 올리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윈치를 조정하는 승조원은 와이어의 텐션(장력)이 3톤이나 된다고 한다. 일단 피스톤 코어가 해저면에 잘 박힌 것이다. 팽팽한 와이어는 피스톤 코어의 운명을 쥔 생명줄과도 같았다. 한 방울, 두 방울 와이어를 타고 흘수선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은 잔잔한 해수면에 작은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긴장감을 더했다. 와이어가 풀리거나 조인 나사가 느슨해지면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다. 갑판 위에서는 누구도 말을 내뱉지 못한 채 윈치를 조종하는 승조원의 외침만이 이어졌다.
“1,000미터 남았습니다!”
“500미터!”
“100미터!”
길고 지루한 시간이다. 1톤이 넘는 피스톤 코어는 두 시간 이상에 걸쳐 서서히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희미한 실루엣이 수면 아래로 보였다. 갑판에서 기다리던 연구원과 승조원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보인다!”
피스톤이 올라오기만을 학수고대하던 상범이가 외쳤다. 피스톤 코어는 마치 낚시꾼과 긴 사투 끝에 허연 배를 드러내고 항복하는 거대한 물고기처럼 수면을 뚫고 올라왔다. 수면으로 올라온 피스톤 코어는 후갑판의 대형 크레인으로 옮겨야 한다. 크레인을 조종하던 선원과 갑판 위 연구원들의 눈이 한곳으로 모였다. 모두의 숨이 멎은 듯한 순간, 대형 크레인에 대롱대롱 매달린 15미터 길이의 코어 끝부분에서는 누런 황토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흘러내리는 황토물과는 아랑곳하지 않고, 승조원과 연구원들은 모두 합심해서 코아 바렐에 밧줄을 걸고, 코아를 갑판으로 눕혀야 했다. 이 과정도 매우 위험하다. 배가 크게 움직이거나 잡고 있던 밧줄을 놓치면, 1톤이나 되는 거대한 피스톤이 갑작스럽게 움직인다. 이 마지막 작업에서 쇳덩이와 부딪혀 골절상을 입었던 사례를 기억하는 준호는 큰 소리로 모두에게 지시해야 했다.
“모두 헬멧 착용!”
“오른쪽 밧줄을 좀 더 당기고, 갑판 안쪽으로 좀 더 끌어!”
수십만 년에 걸쳐 캄캄한 심해에 잠들어 있던 퇴적물이 다시 갑판으로 등장하면서 내놓는 신고식이었다. 크레인으로, 후갑판으로 이동시킨 후에도 황토물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너무나 반가운 모습이다. 황토물에 작업복이 젖는 것은 오히려 영광스럽기까지 하다. 그것은 퇴적물이 성공적으로 채취되었다는 사실을 직감하는 기쁨의 표현이었다. 바렐을 조립한 순서와는 정반대로 바렐을 해체한다. 드디어 라인어 안에 들어있는 퇴적물이 보였다. 10미터 이상의 코어 퇴적물을 채취했다. 대성공이었다. 드디어 고대하던 퇴적물을 얻은 것이다. 작은 환호가 터져 나왔고, 감격이 갑판 위를 가득 채웠다.
갑판 위는 기쁨과 흥분으로 어수선했다. 얼마나 기다렸던가. 긴장감에 경색되었던 상범의 얼굴은 감출 수 없는 환희로 빛났고, 크레인을 잡고 있던 선원은 땀에 젖은 얼굴로 환한 미소를 지었다. 크레인 끝에서 줄을 잡아 균형을 맞추던 연구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고 있었다. 이 순간만큼은 팀 전체가 한 몸처럼 움직였다. 준호는 선장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브리지의 바깥쪽에 서서 소란스러운 광경을 바라보면서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떠올리고 있었다. 최소한 할 일을 했다는 뜻으로 보였다. 준호의 얼굴은 의외로 평온했다. 이번에도 실패했으면, 다시 한번 부산대에 기회를 주어야 했다. 그런 상황이 오면 수현에겐 그만큼 기회가 줄어들 수 있었기에 준호의 마음도 편하지 않았을 테였다. 이제 부산대가 하고 싶었던 코어 한 개는 완수했고, 한 번 더 코아를 하면 된다.
본래 코어링은 두 개씩 수행한다. 대형 굴삭선에서는 세 개에서 네 개까지 채취하기도 한다. 한 지점에서 얻은 단일 코어만으로는 정확한 정보를 충분히 확보하기 어려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로 인접한 지점에서 추가로 퇴적물을 채취한 뒤, 두 시료를 비교하여 신뢰도 높은 결과를 도출하려고 한다. 이제 남은 일은 부산대에서 분석하기로 한 코어 하나와, 수현의 학위논문에 사용할 코어를 각각 확보하는 것이다. 현의 학위논문 재료로 계획해 둔 코어 하나를 채취하는 것이다. 이로써 목표의 4분의 1은 이미 달성된 셈이었다. 수현이가 코어 바랠 해체를 도와준 후, 다음 사이트 서베이 결과를 검토하고 있는 준호를 찾아왔다.
“박사님, 다 잘되시는 거죠?”
“당연하지!”
수현이는 웃고 있었지만, 약간 어둡고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몬순 기후
다시 항해가 시작되었다. 동인도양 나인티이스트 릿지 근처에서 우리는 코어 퇴적물 4개를 채취하는 데 성공했다. 두 개는 부산대, 두 개는 준호의 실험실 몫이다. 4개의 코어 퇴적물을 채취하는데, 꼬박 나흘이 걸렸다. 바람은 다시 잔잔해졌다. 코어 작업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던 것인지, 그렇게 우리를 불안하게 했던 바람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무풍지대였던가, 여기가.’ 콜롬보에서 출항하고 막 대양으로 나왔을 때처럼 강렬한 햇볕이 갑판을 달구고 있었다. 바람이 간 자리에 햇볕이 찾아온 것이다. 연구원들은 이제 정말 실험실에서 밖으로 나올 이유가 없어졌다. 실험실 안에서는 취득한 코어 퇴적물을 전처리하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은 동인도양 끝으로 항해하고 있다. 아라비아 바닷길에서 시작되어 인도양을 물들인 상인들이 갔던 길일 것이다. 그들의 항해는 과거에 천년의 항구라 불리는 아덴에서 시작되었다. 아덴을 떠난 배들은 인도의 여러 섬으로 향했고, 이어지는 항로는 언제나 삶과 죽음의 경계를 시험하던 바다였다. 그 항구에서 상품을 실은 배가 인도의 여러 섬으로 갔고, 항상 삶과 죽음의 경계를 시험했던 곳이다. 동인도 끝을 나가면, 믈라카나 코 앞인데, 지금 우리가 통과해야 하는 믈라카는 원래 아덴으로 가는 무역 통로였다. 준호는 동인도양으로 향하던 긴 역사 속에서 선배들의 지났던 여정을 떠올리고 있었다. 우리는 과거에 신드바드가 갔던 것처럼, 인도양을 가로질러 동남아시아를 거치고 남중국해를 거쳐 한국으로 가는 일정이다.
인도양에 싹 텄던 인류 문명도 비슷하다. 인도양 문명은 바람의 길이라 했다. 몬순은 이 바람의 길에 항상 있다. 몬순(monsoon)은 인도어로 모숨(mosum)이며, 말레이어로는 모심(moossim)이다. 모두 ‘계절’과 ‘바람’을 이른다. 지금 우리가 가는 길도 무풍지대를 벗어나고 있지만, 몬순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기에 인도양은 몬순이 영역이며, 우리가 가는 바닷길도 따지고 보면 몬순이 영역이다. 몬순은 모든 것을 결정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과 식물과 먹거리조차도 몬순의 영향을 받는다. 동인도양의 끝으로 가면서 준호는 별의별 생각에 휩싸였다. 기후와 그 기후와 관련되었던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이 삶과 죽음의 항해에는 언제나 몬순이 있었다. 몬순 기후 영향으로 인해 바오바브나무가 건조한 열대 지역에 자라고 있는 걸 생각한다면, 사람들은 기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야 한다. 기후가 어떤 식생도 바꾸고, 사람을 바꾸고, 생활양식을 바꾼다는 사실을…. 준호는 그런 중요한 사실을 모르는 일반인들에게 좀 아쉬움을 느꼈다.
“다 내려왔나?”
준호는 동승한 연구원들의 안부부터 물었다. 꼬박 나흘 이상 힘든 일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연구원들은 다 실험실로 모이라고 사전에 얘기했지만, 언제부턴가 벌써 코어 절개가 시작되고 있었다. 수십만 년 전부터 차곡차곡 쌓인 퇴적물은 코어 내부의 라인어 속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 퇴적물 안에는 수만 년, 수백만 년 동안 쌓인 바람과 강물, 별빛의 흔적이 겹겹이 쌓여 있다. 수만 년의 인연을 아쉬워해야 하는 것처럼, 채취된 퇴적물은 하룻밤 동안 갑판 기둥에 묶어서 세워 두었다. 차곡차곡 쌓였다는 것은 시간 순서로 쌓였다는 걸 의미한다.
“일단, 부산대 것부터 가져오고 절개하자, 어느 정도로 자르니?”
라인어의 기본 길이는 4미터다. 20미터 피스톤 코아를 조립하려면 총 다섯 개를 연결해야 한다. 하지만 채취 후 실제로 얼마나 많은 퇴적물이 라인어에 들어올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이런 이유로 보관과 취급을 고려해 라인어를 1미터, 1.2미터, 혹은 1.5미터 단위로 절단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단, 짧게 자를수록 연속된 퇴적층이 교란되지 않도록 더욱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
“저희는 1미터 간격으로 자르기로 했습니다.”
“그래, 그러면, 먼저 부산대학 코어부터 1미터로 자른 후, 이어서 연구원 코어 자르기로 하자.”
“예, 알겠습니다.”
준호는 갑판에 세워진 잘라야 할 퇴적물을 살펴봤다. 100% 만족은 아니지만, 90% 이상 만족했다. 부산대학교가 바라고 있던 퇴적물도 성공적으로 채취되었고, 연구실에서 사용할 퇴적물도 본래는 15미터 정도 길이의 퇴적물을 원했지만 9.8미터와 5미터 길이 정도의 퇴적물을 얻었으니 만족할 만했다. 사실 채취된 주상 시료 퇴적물의 길이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연안에서는 퇴적물이 1미터 쌓이는 데 1년이 걸릴 수도 있고, 지금처럼 대양에서는 1미터 쌓이는데 만년이나 10만 년, 또는 그 이상 100만 년이 걸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중요한 건 퇴적률이다.
“수현아, 이쪽 지역 퇴적률 어느 정도인지 알겠니?.”
“네, 관련 논문 한 번 찾아봤는데, 1미터에 약 10만 년 정도 되는 것 같던데요”
“그렇구나.”
“우리 연구원 코어 길이가 9.8미터 정도니까 대충 계산하면 약 100만 년 정도네?”
“네, 맞습니다.”
“그러면 그걸 고려해서, 알고자 하는 시대의 퇴적물을 다룰 때는 특히 주의해서 하도록 부탁하고.”
“부산대도 지금 얘기한 것처럼 주의해서 하고…. 나중에 저녁 식사 후에는 회의실에서 항차 보고서도 써야 하니 회의 좀 하자.”
“네, 알겠습니다.”
실험실에서는 연구원들과 당직인 승조원이 도와가면서, 채취된 코어 퇴적물을 절개하고 있었다. 이사부는 혹시 일어날 수 있는 기상 악화에 대비해서 적당한 항속으로 달리고 있다. 사실 코어 퇴적물 채취가 끝난 상태기에 승선한 연구원들은 모두 안심하고 있는 듯했다. 표정이 좋지 않았던 수현이도 그렇고, 상범이도 그랬다.
“선장님, 실패도 몇 번 했지만, 다행히 코어 퇴적물을 잘 채취했습니다.”
“잘 돼야죠. 오랜만에 현 박사가 탔는데, 안 되면 안 되죠!”
선장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얘기했다. 사실 그렇다. 콜롬보까지 가서, 귀국 항차에 배를 탔고, 시료를 채취하지 못하면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 국외 출장이 되고 만다. 더 중요한 것은, 이번 항차에서 꼭 퇴적물 시료를 얻어야 보고서도 쓰고, 또 프로젝트도 마무리해야 했다. 예기치 못한 일로, 항해 중 적당한 곳으로 피항해서 예정된 일정을 다 소화하지 못하거나, 목표로 했던 임무를 다하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봐왔다. 그런 생각을 하면, 이번 항차는 일단 성공한 셈이다.
“다, 이 선장 덕분입니다. 하하. 콜롬보에서 출항할 때 좀 걱정도 했는데, 이렇게 되고 보니 이제 한숨 놓네요.”
“항해하면서 이 정도는 다 하는 거니까, 이번도 평범한 항해지, 뭐”
선장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코어 작업할 때 정확한 위치에 배를 정지시킨 일등 항해사도 한마디 한다.
“현 박사님, 운이 나쁜 건 아닙니다. 시간이 하루 정도 더 걸리긴 했지만, 이 정도면 훌륭한 거죠, 뭐”
“네, 일항사님도 많이 고생하셨습니다. 제가 귀국하면 적당한 시기에 술 한잔 사죠. 뭐.”
“아이고, 감사합니다. 그건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승조원들 좀 불합리한 처우 개선 하는데 목소릴 높여 주십시오. 이번처럼 사실상 두 달 가까이 나와 있었는데, 혹시 다음 항차 나갈 때까지 휴식할 수 있는 시간은 충분히 줘야죠~.”
“네, 맞습니다. 내 소관은 아니지만, 기회 있으면 그런 말 하는 데 일조할게요.”
사실 그랬다. 연구원에 소속되어 있는 승조원은 주로 항해가 있을 때만 역할이 주어진다. 그들 중에는 대형 상선을 타다가 이쪽으로 이직한 승조원도 있었다. 문제는 상선을 타서 높은 보수를 받는 것보다는 안정적인 생활을 원했기 때문에 연구선으로 이직한 것이다. 연구원에 있는 모든 연구원이 연구선을 타는 것도 아니라 필요한 사람만 연구선을 탄다. 그러니 연구원에선 승조원의 존재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들에 대한 처우도 마찬가지다. 그런 이유로, 얼마 전에는 승조원들이 지나치게 많은 운항 일수로 인해 승선을 거부했고, 파업 비슷한 조그만 충돌도 있었다. 연구원으로서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현실에선 불합리한 일도 종종 일어난다.
“박사님, 꼭 그렇게 해주셔야 합니다.”
일등 항해사는 다소 불만이 많은 말투로 얘기한다. 선장은 못 들은 척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준호는 선장도 분명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철조망은 살짝 닿기만 해도 살갗이 패일 것 같은 날카로움이 배어있었다. 붉게 물든 황혼을 배경으로 드러난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다. 그것은 인간의 연약함과 두려움을 응축한 상징처럼 보였다. 다음 날 갑판으로 나온 준호는 어느새 후갑판을 둘러싼 철조망이 설치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언제 친 거지?’ 연구원이나 승조원들이 쉬고 있는 틈을 타서, 철조망을 설치한 게 틀림없었다.
‘벌써 이렇게 준비하는구나.’
철조망은 물들기 시작한 황혼에 더 날카롭게 느껴진다. 황혼은 아름다움만 주는 것은 아니었다. 연구원들과 회의 후 차 한잔하려고 식당으로 갔다. 승조원 간에 격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갑판장이 주도권을 잡고 말을 이어갔다. 갑판장은 경비원과 승조원들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만약 해적이 갑판에 올라온다면, 그 순간 모든 것이 끝난다.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해적이 갑판에 올라오는 것은 무조건 막아야 해”.
“어떻게 막아야 한다는 거죠”
승조원 누군가가 말했다.
“만약 그들의 손이 갑판에 닿으면, 도끼로 손을 찍어낼 수밖에 없지 않나.?”
앞으로 벌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해 몇몇 승조원들은 다소 흥분된 어조로 이야기하고 있다. 잘 보이지 않던 경비 업무 담당 외국인도 보였다. 그들의 허리엔 가스총으로 보이는 권총도 차고 있었다. 갑판장의 말은 과장이 아닌듯했다.
문득 얼마 전 있었던 사건이 떠올랐다. 아덴만에서 해적의 기습을 받았던 상선이었다. 그때 선장은 총상을 입고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총격으로 황폐해진 배와 납치된 승무원들은 얼마나 참혹한 고통 속에 있었던가를 기억했다. 죽음이 코앞에 닥친 그 공포가 믈라카 해협에서 우리를 노려보는 듯했다. 해적의 위협은 그저 상상만으로도 심장을 죄어왔다. 최악의 경우, 우리의 긴 항해는 물론, 생명도 위협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승조원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답답함을 떨치기 위해 브리지로 올라갔다. 브리지 역시 캄캄하다. 주변의 정보를 알려주는 레이더 화면만이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컴퓨터와 레이더 화면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실 같은 고요가 흐르고 있었다. 긴장감에 숨을 고르며 믈라카 해협의 지도 위로 눈을 돌렸다. 믈라카 해협의 거리는 약 900km 정도였다. 그렇다면 서울에서 부산을 왕복하는 거리와 비슷하다. 이 구간을 무사히 통과하려면 얼마나 걸릴까.
“정말 끝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내일 늦은 오후면 해협을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준호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직사관인 이등 항해사는 무심하게 얘기한다.
“그렇다면 내일 아침부터가 가장 위험한 구간이겠군요.”
당직사관은 잠시 망설이다가 질문에 대답하지는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가 통과하는 믈라카는 예로부터 해적이 종종 출몰하는 지역입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어요.”
사실 콜롬보에서 출항할 때부터 그런 얘기를 듣고 시간을 내어 살펴봤다. 이 좁은 믈라카 해협은 동서를 잇는 중요한 바닷길이었다. 우리도 지금 시간을 단축하려고 여길 통과하려고 하지 않는가. 이 길을 문명사적 의의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콜롬보에서도 연구원에게 얘기했지만, 명나라 시기에는 정화의 함대가 이곳에서 원주민과 경쟁했고, 무역이나 항행에 어려움을 겪었던 곳이다. 지리적으로 동서를 잇는 하나밖에 없는 통로나 다름없으니 그 중요성이 클 수밖에 없다. 반면 그걸 아는 이곳 원주민은 언제나 기회를 엿보고 있다.
“과거 명나라의 정화 함대도 이곳에서 현지 해적들과 충돌을 겪었죠. 부기스족이나 오랑 라우트족 같은 해적들은 이 해협의 지형을 이용해 종종 배를 공격했다고 합니다.”
“그때와 비교할 수는 없죠?”
당직사관의 말이 다소 비관적이라 준호는 안심되는 말을 건네야 했다. 하기야 당직사관이라 해도 그는 경험이 많지 않은 듯했다. 이번 항차에서 처음 만났는데, 준호는 그 말에 휘둘리지 않으려고 침착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준호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긴장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준호는 레이더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늘이 2초마다 한 바퀴씩 회전하며 바다를 훑었다. 작은 물체 하나라도 화면에 나타난다면 곧바로 경계 태세로 돌입해야 했다. 이 연구선의 운명은 회전하는 레이더 바늘 하나에 걸린 듯했다. 브리지의 적막 속에서 당직사관과 준호, 그리고 화면 속 회전하는 바늘이 하나로 이어지는 듯했다. 침묵은 무겁고 긴장이 짙었다. 그러나 준호는 브리지에 있는 동안 눈을 떼지 않았다. 사관이 이야기한다.
“어차피, 한밤중에는 그들의 활동도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 안심해도 됩니다. 내일 아침 믈라카에 진입하고 나서가 문제입니다.”
“오늘 밤은 내려가서 쉬시고, 내일 일찍 보시죠.”
그는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나를 타이르듯 얘기하고 있다. 당직사관이 말에 따르기로 했다. 지금 연구 책임자가 브리지에 있어 봐도 도움이 되는 건 하나도 없다. 그런데 내일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어려운 상황에 부닥쳤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 준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다시 브리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잠을 잘 자지도 못했거니와,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이사부호는 믈라카에 진입했고 거의 100km 정도를 통과하고 있었다. 이제 800km만 지나가면 여기를 빠져나간다. 이 지역은 열대 지역이면서 열대우림 기후대에 속한다. 언제 스콜과 같은 폭우가 쏟아질지 모르는 지역이다. 그리고 양 대륙에서 가깝고, 수로가 좁아 물살이 빠르기도 해서 항상 항해에 주의해야 하는 지역이기도 했다. 전방을 주의하며, 항해에 집중하던 당직사관에게 안부도 물을 겸, 언제쯤 믈라카를 빠져나갈 수 있냐고 물어보려고 했다. 레이더와 전방을 유심히 살피던 일등 항해사는 다소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직사관은 레이더 화면에는 빠르게 접근하는 하얀 점 두어 개를 보고 있었다. 분명 작은 선박처럼 보였다. 다소 좋지 못한 날씨 속에서도 이사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십중팔구, 우려했던 해적선일 가능성이 높았다.
“선장님, 급히 브리지로 와 주십시오! 선장님!”
긴장으로 떨리는 당직사관의 목소리다. 레이더 화면을 쳐다봤다.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하얀 점 두어 개가 이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당직사관은 한 30여 분이면 그 모습이 눈앞에 나타날 것이라고 한다. 선장이 급히 브리지에 올라왔지만, 그의 표정은 의외로 태연했다.
“조금 더 지켜봅시다. 지금은 뭐라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준호는 그 말을 들으며 의아함과 불안을 동시에 느꼈다. 레이더 화면 속 하얀 점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심장은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이상하게 바람이 조금씩 강해지면서 배 전체를 휘감는 듯했다. 하늘도 좀 어두워지는 듯했다. 심상치 않은 바람은 배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당직사관은 몇 번인가 긴 항해를 해봤지만, 이런 바람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던 선장은 단호한 명령을 내린다.
“보안 요원은 무기를 소지하고 2층 갑판으로 대기 요망!”
선내 마이크를 통해 선장의 지시가 이어졌다.
“전 승조원, 각자의 위치에서 대기 바랍니다!”
짧고 가느다란 목소리가 선내로 퍼졌다.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그 안엔 분명한 권위가 담겨 있었다. 경비요원과 갑판원 몇몇은 이미 갑판에 나와 있다.
“선장님, 바람이 조금 더 세어지는 것 같은데요.”
일등 항해사가 얘기했지만, 선장은 대답은 하지 않은 채 레이더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선장은 일등 항해사에게 전속력으로 회피 동작을 예고한다.
“이 상태가 계속되면 5분 후부터 풀 스피드로 회피 동작으로 운행!.”
“회피 동작 시작은, 내 지시를 기다리세요!”
“네, 알겠습니다.”
회피 동작은 해적선이 연구선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지그재그’로 운항하는 것을 말한다. 보트의 크기는 알 수 없지만, 속도는 이사부호보다 2배가량 빠르다고 했다. 이사부호는 최대 15노트로 달린다. 그러니 이사부호로 가까이 오는 것은 시간문제다. 지금은 얇은 물결이 춤을 추듯 일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정도 물결이 일더라도 보트가 접근하는 건 시간문제다. 그런데 언제인지는 모르나 하늘은 먹구름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이었다. 이번엔 바람과 함께 배는 롤링과 피칭으로 요동쳤다. 갑판 위에서는 승조원과 연구원들이 균형을 잡으려 애썼다. 오랫동안 바다를 누볐던 선원들조차 이 거친 바람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물결은 점점 거세지고, 배의 움직임은 더 요란해졌다. 차가운 바람에 실린 굵은 빗방울이 내리기 시작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시원하게 느꼈을 스콜이었다. 브리지 선회장은 엄청난 속도로 돌고 있었다. 아무리 빨리 돌아간들 밖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선장은 여전히 레이다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이제 어떤 명령을 내릴 타이밍을 잡는 듯했다.
준호는 입속에서 침이 꿀꺽 넘어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정말, 이 믈라카가 우리를 시험하고 있는 것일까?”
그 와중에도 레이더 화면 속 하얀 점들은 여전히 우리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런 굵은 빗속에서 하얀 점이 실체를 드러내는 순간, 그들이 어떤 도발을 할지 도저히 예상할 수 없다.
그런데, 그때 잠시 잦아들던 스콜이 더 세졌다. 조금 전 스콜은 스콜도 아니었다. 갑자기 굵은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건 또 무슨 일이람…’ 폭우가 쏟아지자, 배 주위는 순식간에 물안개처럼 뿌옇게 변했다. 빠르게 돌아가는 선회장은 미친 듯이 앞 유리를 쓸어내렸다. 배가 강한 바람에 흔들리는 가운데, 짙은 안개와 비는 마치 우리 배를 세상에서 감춰버리려는 듯 덮어쌌다.
선장은 여전히 이상하다는 듯이 레이더만 쳐다보고 있었다. 여러 개 있던 점이 하나로 보였다. 무슨 일일까. 선장은 조금 야릇한 미소를 짓는 것 같았다. 선장은 조금 후 브리지에서 밖을 내다봤다. 작고 허름한 배 한 척이 빠르게 이사부 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선장은 여전히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어떻게 하려고 그러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선장에게 질문하고 싶었지만, 그럴 엄두도 나지 않았다. 준호는 선장의 얼굴과 레이더, 그리고 브리지 밖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보려고 여기저기 눈을 돌리기에 바빴다. 빗줄기는 세졌다 약해졌다는 반복하고 있다가, 조금 약해진 듯하였고, 시야가 어느 정도 확보된 듯했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20톤 규모의 보트 한 척이 후미에서 엄청난 속도로 접근하고 있었다. 백파처럼 하얀 물결을 꼬리에 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보트는 우리 쪽으로 접근하는 듯하더니만, 이사부를 지나 빠르게 앞으로 지나갔다. 브리지에서 준호의 시선은 그 보트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고는 다시 반대편에서 이사부호를 살피면서 왔던 길로 되돌아가고 있다. ‘이게 뭐지?’ 이사부호가 어떤 상태인지 한번 보고 싶었던 걸까. 그렇게 정체불명의 작은 배가 시야에서 멀어져갔다. 조금 더 레이다를 보던 선장은 야릇한 미소에서 안심의 미소로 바뀌어 있었다. 1~2분이 지난 듯했다. 레이더에 잡혔던 흰 점은 더 멀어지고 있었다.
“전 승무원, 상황 해제.”
선내 방송으로 상황이 해제되었다고 방송하고 있다. 방송을 마친 후 선장은 내게 다가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번에는 기후가 우리 편이 된 것 같군…. 얘네들이 포기한 것 같아.?”
선장의 가는 목소리는 포근한 목소리로 돌아왔다.
“아… 예?”
준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겨우 대답했다.
“아마 무장한 보안 요원을 보았을 거고, 철조망도 쳐져 있고, 폭우가 내려서 이런 상황에선 어쩔 수가 없는 거지.”
선장은 그들의 돌아가야만 했던 이유를 설명하고 있었다.
폭우는 해적의 위협을 몰아내 주었다. 조금 전까지 레이더에 선명하게 찍혀 있던 하얀 점들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던 당직사관은 덤덤하게 말했다.
“이런 스콜은 축복이나 마찬가집니다. 이런 상황엔 해적들도 어렵겠죠?”
긴장했던 목소리는 이제 평온을 찾은 것처럼, 얼굴도 이미 환하게 변해 있었다.
선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렇지!, 그 스콜이 우릴 도운 건 맞네.”
선장은 걱정을 덜어낸 듯한 웃음을 보였지만, 그 웃음에는 묘한 여운이 묻어있었다. 의미를 가늠하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준호는 얼마 전 인도네시아를 방문했을 때, 정말로 강한 스콜을 경험했다. 차를 타고 가는 도중이었는데, 더 이상 차를 운행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인도네시아 친구와 도로 옆에 차를 세우고 스콜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던 경험을 떠올렸다. 선장이 얘기한 것처럼 스콜이 우리를 지켜줬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렇게 우리를 불안하게 했던 날씨가, 이번에는 역설적으로 든든한 보호막이 되어준 셈이다.
요란했던 비바람이 멈추고, 마침내 해협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짙은 어둠 속의 공포를 견뎌낸 후 맞이한 황혼은 마치 축복처럼 느껴졌다. 뱃머리를 두른 철조망 위에는 여전히 빗방울이 맺혀 있었다. 물방울을 머금은 철조망은 황혼의 부드러운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었다. 작은 포도송이처럼 알알이 맺혀 있는 물방울이 반갑게 맞아주는 것 같았다. 빗줄기가 지나간 자리에 갈매기 한 마리가 날아들어, 배 주위를 맴돌며 매끄러운 곡선을 그렸다. 갈매기도 우리를 환영하는 듯했다. 불안과 공포로 얼룩졌던 우리의 항해가 황혼의 바다 위에서 깨끗이 씻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모든 게 잘 지나간 건가요, 선장님.”
옆에 서 있던 선장은 준호의 말을 듣고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네. 현 박사가 운이 좋은 거지 뭐.”
덤덤하게 말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한마디 더 한다.
“모든 것은 결국 다 지나가기 마련이지. 중요한 건 우리가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죠.”
“아, 맞습니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갑니다. 그렇지만 잘 지나가도록 해야겠죠.”
그렇게 얘기하는 준호의 답변에 선장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준호는 선장이 한 말을 곱씹는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아니 ‘이제 모든 건 다 지나갔다.’ 이틀간의 긴장과 두려움이 서서히 평온함으로 변해갔다.
갑자기 연구원들이 궁금해졌다. 계단을 내려오다 말고 다시 올라가 선내 방송을 했다.
“모든 연구원은 10분 후 미팅룸으로 모여 주기 바랍니다.”
준호는 팀을 책임지는 입장이었다. 연구원들의 상황을 살펴야 했다. 스콜이 한바탕 휩쓸고 간 후, 선장과 얘기를 끝내고 브리지를 내려오는 순간, 준호는 불현듯 연구원들의 근황이 걱정되었다. 브리지는 이사부호의 4층에 있다. 그곳으로 가려면 좁은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어렵게 오르고 내리는 계단은 아니었지만, 방송 후에 내려오는 계단은 너무 짧은 것처럼 느껴졌다.
귀항
요란했던 비바람이 멈추고, 마침내 해협에도 황혼이 찾아왔다. 뱃머리를 두른 철조망 위에는 빗방울이 맺혀 있었고,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는 모습은 극한의 상황을 이겨낸 후의 어떤 보상처럼 느껴지는 장관이었다. 불안과 공포로 얼룩졌던 우리의 항해가 황혼의 바다 위에서 깨끗이 씻겨 나가는 듯했다. 차분하게 변한 바다를 바라보며 선장에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 선장님, 이제 정말 상황 해제 맞는 거죠.”
옆에 서 있던 선장은 준호의 말을 듣고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거지요.”
선장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러면서 한마디 더 한다.
“사실은 남중국해도 만만치 않은 곳인데, 일단 일기 예보 상으로는 우리가 지나간 다음엔 날씨도 좀 나빠질 것 같다고 하긴 하네.”
“그런가요? 우리가 지나간 뒤라면 상관없겠네요. 일단은 안심입니다.”
“그거야 그렇지, 뭐~. 하선할 준비 서서히 하면서, 마지막 마무리 차질 없도록 부탁할게. 현 박사!”
준호는 선장의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간의 긴장과 두려움이 서서히 평온함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선장이 남긴 ‘마지막’이라는 말에는 어딘가 걸리는 기운이 있었다. 거대한 사건이 벌어졌음에도 자신이 할 수 있었던 일은 거의 없었고, 그 때문에 존재감이 희미해졌다는 씁쓸함이 마음 한쪽에 남아 있었다. 결국 정체불명의 선박을 물러서게 만든 건, 경비요원을 2층 갑판에 드러나게 배치한 조치였다. 갑판장은 물론 승조원들까지 비에 흠뻑 젖은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연구원인 그는 그 과정에서 아무 역할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모든 일이 이미 지나갔다는 점이었다.
이사부는 믈라카 해협을 벗어났고, 싱가포르를 지나 남중국해로 향하고 있었다. 기상은 더없이 안정되어 있었고, 해적의 위협도 사라진 뒤였다. 싱가포르 항구를 지나며, 도시의 화려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천루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모습은 인간이 만들어낸 세계와 바다의 세계가 얼마나 다른지 선명히 보여주고 있었다. 바다의 경험과는 전혀 다른, 질서 있고 번화한 세상이다. 빌딩 숲 사이에서 잠시 안도감을 느꼈지만, 새로운 변수가 언제든 등장할 수 있다는 선장의 말이 떠올랐다. 정치적 갈등, 기상 이상, 혹은 해적. 평온해 보이는 바다도 언제든 위험을 품을 수 있었다. 준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 세상 어딜 가도 절대 안전한 곳은 없겠지…’
갑판에서는 승조원들이 철조망을 걷어내고 있었고, 다시 일상의 웃음이 돌아왔다. 연구원들과 승조원 모두 평화로운 항해의 마무리를 기대하며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선장님, 이번 항해에서 얻은 시료는 정말 귀중한데…. 잘 분석해 봐야겠네요.”
선장은 아무 말도 안 했지만, 옆에 있던 삼등 항해사가 준호의 말을 받아 이야기한다.
“기후변화가 한반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런 거 먼저 연구했으면 좋겠습니다. 인도양도 좋지만요.”
“아, 알겠습니다.”
삼등 항해사는 인도양에서 코어 퇴적물을 채취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듯 묻고 있다. 사실 기후에 대해 잘 모르면 그런 말이 나올 만도 하다. 도대체 인도양 기후가 한반도와 무슨 연관이 있을까. 준호는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거, 관련이 없지는 않아요. 아니, 관련이 많아요. 왜, 우리 북극 진동 때문에, 더 추워진다고 그렇지 않나요? 방송하잖아요. 아, 그리고 엘니뇨나 라니냐도 있고요.”
“듣고 보니 그렇긴 하네요, 박사님. 하지만 별 실감이 안가네요.”
정말 삼등 항해사는 기후변화의 중요성을 알기는 아는 듯했지만, 피부로 와닿는 체감은 없는 듯했다.
“아무튼 잘 분석해서 좋은 결과를 내도록 해야지요. 아마 수현이나, 상범이가 잘 연구하겠죠. 그래야 이런 어려운 상황을 극복한 보람도 있는 거고.”
선장과의 대화가 삼등 항해사와의 대화로 바뀌었다. 하지만 준호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우리가 이번 경험한 것도, 어쩌면 기후변화 연구의 필요성을 얘기하는 게 아닐까요. 어쨌든 하던 대로 연구를 하긴 해야죠.”
선장과 준호, 그리고 삼등 항해사는 브리지에서 이번 항해의 의미를 찾으려고 이야기하고 있는 꼴이다. 생각해 보면 시료 채취는 아슬아슬했다. 믈라카에선 더 극적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런 아슬아슬한 순간의 연속이었다는 건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단지, 바다로 나갔구나, 아니면 퇴적물을 떠왔구나, 이런 정도로 인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좀 서운하기도 했다.
“이번 경험을 통해 우리가 더 잘 이해하고, 더 잘 대비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준호는 깊은숨을 내쉬며 결론을 짓는듯한 말을 했다. 선장은 잠시 바다를 응시하면서 말을 건넸다.
“맞네. 자연은 때로 우리를 지켜주지만, 그 힘이 곧 위협이 되기도 하지. 이번 경험은 어쩌면 자연이 보낸 경고였을지도 몰라.”
그러면서 선장은 그들의 물러난 이유 중 하나는 스콜 때문만은 아니라고 거듭 말한다. 아마도 보안 요원을 2층 갑판에 대기시킨 것이 주요했다고 판단하고 있는 듯했다. 무장한 보안 요원은 그들에게도 위협적이기 때문에 쉽게 접근할 수 없었을 거라고 덧붙인다. 그의 말이 잠시 끊기더니, 다시 이어졌다.
“기후변화에 맞서기 위해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야 할 이유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오고 말겠지.”
“이번으로 치면, 보안 요원이겠군.”
준호가 다소 길게 느껴지는 선장의 말을 끊으며 이야기했다.
준호는 그의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삼등 항해사는 눈을 멀뚱거리며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참, 알 수가 없네요…”
하루 뒤, 고요한 아침 햇살이 배 위를 부드럽게 비추기 시작했다. 믈라카 해협의 위협을 무사히 넘긴 우리는 남중국해를 가로지르고 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은 꽤 남았다. 브리지에 올랐던 준호는 얼마 전에 남중국해에서 한 달 넘게 굴삭선에 있었던 일을 떠올린다. 남중국해도 인도 대륙처럼 수천만 년 전에 변화가 시작되었고, 마침내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조그만 바다가 현재처럼 넓혀진 것이다. 현재의 남중국해는 인도양보다는 더 많은 기후요소를 가지고 있고, 동북아시아 기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모른다. 이제 남중국해만 지나면, 거의 귀항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시원섭섭한 마음으로 실험실로 갔다. 항해의 마무리를 잘해야 했기 때문이다. 마침, 수현이가 실험실에 앉아 있다. 삼등 항해사가 옆에 있었다. 조금 전까지 무언가 챙기고 있었던 것 같았다.
“수현이, 여기 있었구나. 뭐 하고 있었니?”
“네, 박사님, 며칠 있으면 하선해야 하는데, 항해 중에 생성된 데이터 좀 내려받고 있었어요.”
“아, 참. 그게 있었구나.”
“네, 중요한 건 다 받았고요. 배에 관한 건 삼항사님께도 좀 물어봤어요.”
삼등 항해사가 조금 묘한 표정으로 이야기한다.
“지금 비번이라서, 실험실로 왔는데, 준호씨가 뭐 하고 있길래 좀 보고 있었어요.”
“아, 그런가요? 좋은 거죠. 항해 업무를 하더라도 어떤 연구를 하고 있는지 알면, 도움이 많이 되겠죠.”
“네, 박사님, 앞으로는 이것저것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아요.”
이런 대답을 하는 중에, 갑자기 수현이가 하던 말을 이어가면서 질문한다.
“근데 뭐가 중요한 건지 좀 궁금한 것도 있는데, 박사님 코멘트 좀 해주실래요?”
“그래, 뭐지?.”
수현이는 이번 항해에서 얻은 코어 퇴적물을 이용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묻고 싶었던 것 같았다. 나름대로 계획을 잘 생각해 놓고 있었지만, 출항 전에 잠깐 준호와 얘기한 내용이 마음에 걸렸던 것 같기도 했다.
“박사님, 아마 코어 연대가 100만 년 정도 되는 것 같던데, 어느 부분을 중점적으로 해야 하죠.”
그의 질문은 어느 시대의 기후를 연구할 것이냐에 대한 문제였다. 퇴적물을 떴을 때 퇴적률을 물었던 기억이 났다.
“아, 수현아, 그건 정말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데, 사실 어느 부분이든 상세한 연구가 필요한 것은 기본적인 전제이고, 그다음에 네가 특별히 관심 두는 부분을 선택하면 되는 거 아닐까-?.”
“네, 그렇게 하고 싶은데, 박사님은 어느 시대에 관심이 있으세요?”
“하하…, 난 요즘 나온 단어 중에 인류세라는 말이 좋더라. 구체적으론 나중에 연구실에서 좀 자세히 얘기하자….”
“박사님, 인류세라는 말도 있군요?”
삼등 항해사가 가지 않고 신중하게 듣고 있었다. 준호는 연구실로 돌아와서 역시 하선 준비를 하면서, 전공과는 관계없는 삼항사가 기후변화에 흥미를 보여준 것이 무척 고마웠다.
이사부는 남중국해를 지나왔고 남해를 거쳐, 마침내 대한민국 거제도로 귀항했다. 갑판을 두르고 있었던 철조망은 말끔히 사라졌고, 평온한 항구의 아침 햇살을 받으며 승조원들은 하선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예전처럼, 준호는 브리지로 올랐다. 예상대로 선장과 당직사관이 있었다. 선장은 지난 일을 회상하는 듯, 잠시 바깥쪽을 보며 잔잔히 미소를 짓는다. 이때까지 내내 위엄 있는 목소리로 배를 지휘했던 그는, 문득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현 박사, 이 모든 일이 정말 우연이었을까?”
선장은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라 눈치를 못 채고 있었지만, 그 자신도 이번 사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뭔가 의문이 남았다는 표정이었다. 그의 시선은 인도양의 탁 트인 바다를 상상하는 것처럼 보였다. 준호도 선장의 시선을 쫓았다. 바다 너머 어딘가에서 몰아쳤던 폭풍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콜롬보를 떠날 때 보았던 조그만 등대도 떠올랐다. 그 등대를 생각하며 준호는 차분한 소리로 대답했다.
“우연일지도 모르죠. 하지만… 아무튼 운 좋게 무사히 돌아왔네요.”
선장의 눈빛에는 우리가 마주했던 자연의 거대한 힘과 그 앞에서 느꼈던 인간의 나약함, 그리고 모든 것을 견디고 돌아온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된 깊은 안도감이 담겨 있었다. 선장은 작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바다가 우리에게 뭔가를 알려 주고 싶었던 게 아닌가?.”
“아, 그런가요, 선장님, 그런 말씀을 다 하시네요?”
준호는 선장의 언급한 내용을 곱씹으며 다시 바다를 응시했다. 잔잔한 수면 위로 햇살이 윤슬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 풍경 속에서 준호는 자연의 깊고도 복잡한 메시지를 읽으려 애썼다.
“선장님, 아무튼 정말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항해사님도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폭풍과 고요, 위협과 보호, 모든 것을 품은 바다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준호는 고요한 항구의 아침을 바라보며 천천히 크게 숨을 들이켰다. 17일간의 항해에서 우리가 얻은 것은 한 통의 퇴적물이었다. 힘든 노력으로 획득한 그 퇴적물은 벵골만에 묻힌 과거의 바람과 세월에 대한 무한한 흔적이 남아 있으리라 생각했다. 결국 연구원 모두는 지구의 기억을 품에 안고 돌아왔다.
눈에 익숙한 장목항이었다. 언제나 귀항할 때면 브리지에서 이 항구를 봐 왔다. 고향의 바람 내음처럼 포근함이 느껴졌다. 바다가 전해준 메시지는 바람 내음과 함께 여전히 가슴속에 녹아있다.